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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영이 어디에 속해있느냐?저들을 죽일까요?(누가복음 9:51-5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11.08 13:46
▲ William Henry Bartlett, 「Jezreel Valley. Mount Gilboa and Beth-shan」 ⓒGetty Image
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6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한동안 너무 구약성경의 말씀만 전해드린 것 같아서 오늘은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9장은 누가복음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처음 알리신 순간이기도 하며,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시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걸음을 옮기시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짧은 말씀이지만, 누가복음 전체 구성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본문이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만한 본문은 아닙니다. 이 말씀이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고, 그 안에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해주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배척당하신 예수님

51절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기로 결심하셨다’는 말씀이 앞서 말씀드린 전환점이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로 결심하십니다.

복음서에서 갈릴리는 예수님 고향이면서 사역의 중심지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지리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해도, 이스라엘 지도를 떠올리면 동쪽으로 요단강이 흐르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습니다. 요단강 위쪽에 호수가 하나 있고, 아래쪽에 사해가 있다는 점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위쪽에 있는 호수가 갈릴리 호수입니다. 예루살렘은 사해에 가까운 위치에 있고,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는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사마리아는 과거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도시의 이름이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을 통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굳이 사마리아인의 지방을 통과하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거나, 사마리아인이 사는 마을에서 유숙하지 않고 노숙을 선택한다면 사마리아인들과 부딪힐 일은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인의 마을에서 하루 지내는 길을 선택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마음과는 다르게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5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추측일 뿐이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성소가 아닌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보내러 가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말을 보면 이 추측이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마리아인을 향해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들의 말은 열왕기상 18장의 엘리야를 떠올리게 합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의 제단에 불이 떨어져 제물을 살랐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 사마리아인은 엘리야 시대의 바알 숭배자들과 마찬가지로 이교도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흔드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불이 떨어져 멸망해 마땅한 이들이었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10장 15절에 나타난 제자 파송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은 도시에 하신 말씀인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분명 ‘불이 떨어지는 상황’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비슷해보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제자 파송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10장의 70인 제자 파송 시에는 ‘심판 때의 두로와 시돈’에 관한 언급이 나타납니다. 이는 마태복음 11장에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소돔과 고모라처럼, 또는 바알 선지자들처럼 심판받을 존재로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이런 말을 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드렸지만, 예수님의 ‘꾸짖음’은 귀신을 쫓아내시는 행동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향하시며 끝맺게 됩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이야기

오늘 본문을 단편적으로 보면 사마리아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깁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이 사마리아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전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넣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1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나병환자 10명이 치유 받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치유 받은 10명 중에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누가복음은 복음 전파의 여정 속에서 여러 마을의 배척을 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 전합니다. 이미 4장에서는 고향인 나사렛에서 배척당하신 사건을 통해 유대인의 마을에서도 배척당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누가복음 4장 25-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엘리야의 예를 들며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엘리야와 연결되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10장에 나오는 70명의 제자를 파송하시는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9장 이전에 배척당하던 상황은 10장의 70인 제자 파송 이후 복음 전파의 희망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또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집사 빌립에 의한 사마리아 복음 전파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배척당할지 몰라도 그곳에 분명 복음이 전파되는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누가복음-사도행전의 구성입니다.

이와 함께 우리가 한 가지 더 생각해 봤으면 하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개역개정)에는 55절에 각주가 붙어 있습니다. 고대 사본에는 55절 뒤에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는지 모르는구나.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노라”가 첨가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번역이 조금 이상합니다만, 새번역 성경과 공동번역 성경의 각주에 번역된, ‘너희는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모르는구나’가 맞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본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만, 5세기 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베자 사본(Codex Bezae)’에는 ‘너희는 어떤 영에 속해 있는지 모른다’가 추가되어 있고, 9세기 경에 기록된 ‘키프로스 사본(Codex Cyprius)’, ‘코리데티 사본(Codex Koridethi)’,  ‘페트로폴리타누스 사본(Codex Petropolitanus)’에는 각주에 달린 내용이 모두 첨가되어 있습니다. 9세기의 사본들에 추가된 ‘인자는’ 이후의 말씀은 아마 자세한 설명을 위해 누군가 첨가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잘못된 생각을 품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자신들이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어떤 행동을 따라야 하는지도 모르고 있음을 꾸짖으십니다. 이는 엘리야의 인용에 있어서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역시도 고향에서 배척당했다는 예를 드시며, 자신을 배척하고 있는 나사렛 사람들을 그냥 놔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죽였던 예를 들면서 자신들을 배척하는 이들을 멸망시키자고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만으로 보자면 제자들의 표현은 그냥 성경의 한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들이 하고 있는 말의 본질은 오늘 설교 제목과 같습니다. “저들을 죽일까요?”

지금의 개신교는?

예수님의 말씀과 누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개신교의 모습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지금 개신교는 어떤 모습을 지향하며 따르고 있습니까?

이곳이 안 된다면 다른 곳부터 가면 된다고 하시며, 결국 모든 이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전하신 예수님의 길입니까? 아니면, 안될 것 같으면 우선 때려 죽이고 보자는 제자들의 길입니까?

최근 일어난 불교 사찰 방화 사건이나 성소수자를 향한 교회의 태도를 보면, 지금 개신교가 따라가고 있는 길은 예수님의 길이 아닌 제자들의 길인 듯 합니다. 우리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선 죽이고 보자는 제자들의 방식을 지금 개신교가 걷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본이 처음의 형태 그대로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사본의 내용이 추가되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 말씀 55절에 설명이 덧붙게 된 이유는 이런 신앙인들의 모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제자들을 야단치셨다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너희의 영이 어디에 속해있느냐?’라는 말씀이 추가됩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살아가는 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영이고, 생명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은 꾸짖음 받아 마땅한 귀신에 속한 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한 문장이 더 추가됩니다. ‘나는 사람의 생명을 멸망시키러 온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의 길이 어떤 길인지 분명하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개신교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의 행동에 앞서 우리는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않기에 선한 길로 가셨던 예수님의 길을 믿고 있습니까?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그 길을 믿는다면, 이 길을 따를 때 우리에게도 날마다 희망이 있고, 우리 자신을 포함한 온 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분명 예수님을 따라 선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이 전하는 말씀은 단지 복음 전파의 상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길을 따르고 있다면, 여러분에게 희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길이 아닌 제자들의 길, 파괴의 길을 따라간다면 그곳에는 희망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이 원했던, 자신들만 구원받는 이상향의 세상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 외에 모두가 멸망해버렸기에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희망을 얻으시고, 생명을 살리는, 참된 복음을 전파하는 길을 걸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이 땅이 살아나고 하나님의 참된 진리가 세상에 퍼져나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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