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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와 교회, 과연 전태일을 알고 있을까전태일과 한국기독교 인권운동 ⑴
손승호(NCCK 간사) | 승인 2020.11.11 17:13
▲ 1969년 청옥 시절 친구들과 남산에 오르던 날 (맨 왼쪽이 전태일) ⓒ전태일재단
이 글은 지난 11월5일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린 <한국교회, 전태일을 기억하다> 심포지엄에서 NCCK 손승호 간사님이 발표하신 발표문입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손승호 간사님과 전태일재단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전태일, 한국 교회 인권운동의 시작점

‘전태일이 죽은 것이 벌써 50년이 지났나’라고 생각하다 문득 발표자가 아직 50살이 안되었음이 떠올랐다. 발표자에게 마치 자신이 전태일의 죽음을 경험하였던 것 같은 착각이 있었던 것 같다. 1970년 11월 13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했다는 이야기를 청소년 시기부터 계속 교육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마치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몇몇 단편적인 지식일 뿐이다.

이러한 착각의 기반 위에 일부 사실을 더하여 개신교인들은 전태일이 개신교인이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따져보면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도 힘들다. 한 사람의 죽음이 역사의 방향을 이만큼 틀어 놓은 경우는 흔치 않다.

많은 이들이 1970년대와 그 시절의 노동운동에 대해 비슷한 말을 한다. 전태일의 죽음이 1970년대의 시작이었고 다른 한 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이 1970년대의 마지막이었다는 말이다.(1)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사회를 뒤흔들었으며 역사의 방향을 견인하였다. 오늘의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은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것인데, 개신교인이 전태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가 개신교인임을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대체로 2가지 경우로 나뉜다. 첫째, 전태일이 개신교인임을 모르는 경우로 거의 대부분이 여기에 해당한다. 사실 전태일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둘째는 전태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사람이 감리교인인 경우이다. 감리교인들을 대체로 전태일을 기독교인 또는 개신교인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감리교인이라고 말한다. 전태일을 어떻게든 더 좁은 ‘우리’의 일원으로 말하고 싶어한다는 것은 전태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본 글은 이렇게 역사적 인물로 완전히 자리매김한 전태일이 한국기독교 인권운동의 출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 목적을 위해 본 글은 우선 전태일이 실제 지니고 있었던 문제의식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상을 살펴보고, 그것이 한국기독교 인권운동 태동기에 한국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인권의식과 어떤 연속성을 가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사상적으로는 상이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한국기독교의 저항적 흐름이 어떻게 인권운동에 이르는지도 함께 검토할 것이다.

전태일에 관련된 연구는 상당히 많다. 학술연구정보서비스에 ‘전태일’을 검색어로 입력했을 때 찾을 수 있는 선행연구는 학위논문 92건, 국내학술논문 203건에 이른다.(2) 그러나 이 중 기독교와 전태일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본 글의 목적에 맞게 참고할 만한 전태일 관련 선행연구는 별로 없는 실정이다. 다만 임송자의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학생운동”은 전태일의 사상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였기에 참고하였다.(3) 또한 오창은의 “민중의 자기서사와 한국 노동현실의 증언-전태일의 일기‧수기‧편지를 중심으로” 역시 전태일의 사상의 변화를 다루고 있기에 참고자료로 사용하였다.(4)

기독교와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공적 기록을 찾기 어려웠던 관계로 당시 한국기독교 사회운동에 앞장섰던 인사들의 회고록과 기관사를 사용하였다. ‘박형규’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와 ‘권호경’의 회고록 『역사의 흐름, 사람을 향하여』는 전태일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박형규의 활동이 소개되어 있으며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이하 KSCF)의 기관사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는 전태일의 죽음 이후 발생한 기독청년들의 변화가 소략하나마 정리되어 있다.(5) 또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의 인권위원회의 창설로 한국기독교 인권운동이 시작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졸고 『유신체제와 한국기독교 인권운동』과 ‘장숙경’의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을 주로 참고하였다.(6)

하지만 무엇보다 전태일의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집중적으로 참고한 것은 그의 일기‧수기‧편지 모음인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이다.(7) 이 책은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전태일이 쓴 글을 모은 것으로 가장 소중한 1차 사료라 할 수 있다. 다만 이 책에서는 전태일의 오기를 그대로 살렸으며 당시와 지금의 표현법이 다른 면이 있어 이 글에서 인용할 때는 오자를 바로 잡고 현대의 한글 표현에 맞게 수정하였음을 미리 밝혀둔다.

현재까지 가장 권위 있는 전태일 관련 서적은 ‘조영래’의 『전태일 평전』이다.(8)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의도적으로 『전태일 평전』을 사용하지 않았다. 현재까지의 대부분의 연구가 『전태일 평전』이 그려놓은 전태일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글은 『전태일 평전』의 권위에 눌려 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전태일이 직접 쓴 글을 원본으로 삼고자 하였다.

전태일의 지독히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널리 알려졌다시피 전태일은 어려서부터 지독한 가난에 힘겨운 삶을 살았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완벽하게 무시당하는 경험을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어린 시절 가출했던 전태일은 집으로 돌아가려고 몰래 탄 기차가 서울이 아닌 영천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 좌절하며 차라리 역무원에게 잡혀가 매를 맞더라도 배고픔을 면하기를 원했지만 이마저도 이룰 수 없었다.

“순간적인 조그마한 희망은 이내 실망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개찰구를 지나치자 수포원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빨리 나가라고 뒷머리를 밀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그때 전형적인 거지였으니까? 아예 나는 잡혀갈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9)

‘잡혀갈 가치도 없는 거지’의 서러움은 내내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요. 나는 태어날 때부터 거지에요. 댁은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도도한 집안에서 태어났고요. 내내 도도하십시오.”(10)

그러면서도 전태일은 타인이 베푸는 선의에 고통을 느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지나치는구나. 못내 아쉬워하면서도 거의 발악에 가까운 자존심 때문에 허기찬 배는 다시 일거리를 달라고 아우성이다.”(11)

“이렇게 하룻밤을 따뜻한 방에서 잘 땐 얼굴을 들 수 없는 패배감과 자존심이 나를 죽이도록 증오한다.”(12)

이런 경험과 강한 자존심은 그로 하여금 빈자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갖게 하였다. 그에게 사회적 약자란 “동정을 받고 양심까지도 다 내어 보여야 하는” 존재로 인간의 자존심을 지키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는 이런 빈자를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막연한 생각을 청옥고등공민학교 재학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하였다.

“점심시간에는 나는 학교 주최 측에서 제공하는 식당에서 다른 선수들과 나란히 자리를 같이 하면서 남•여 선수들과 같이 즐거운 대화를 나눌 때 문득 내가 아직도 서울에서 방황하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겠나를 생각할 때 가슴이 뭉클하면서 … 어떻게든지 공부를 끝까지 해서 지금도 서울에서 고생하고 있는 친구들을, 그리고 거리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5원의 동정을 받고 양심까지도 다 내어 보여야 하는 언제든지 밑지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애쓰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리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했었다.”(13)

이 인용문은 학교대표로 체육대회를 나갔을 때의 기억을 회고한 것으로 전태일은 이때를 그의 어린 시절 중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문도 같은 순간에 대한 것이다.

“맑은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주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인 손 선생님께서 나를 손수 찾아다니시며 대견해 하실 땐 얼마나 좋았는지, 선생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었습니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 내 자신이 너무 그런 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14)

흥미로운 것은 위의 두 인용문 모두에서 전태일은 본인의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서술하다가 갑자기 빈자에 대한 연민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한 예수가 갑자기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 38년 된 병자를 만났다는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물론 이 수기는 1969년 가을에 작성된 것이므로 이 글에 등장하는 빈자에 대한 연민에 가득 찬 전태일이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재학 중인 1963년의 전태일인지 평화시장에서 해고되어 공사판의 막노동자로 일하던 1969년 가을의 전태일인지는 불명확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충만함이 벅차오른 순간에 갑자기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 떠올랐던 것을 꾸며낼 정도로 전체적인 글의 스토리 구성이 탄탄하지는 않은 것을 볼 때 막연하나마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15)

미주

(미주 1) 한홍구, 『유신: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겨레출판, 2014), 337; 정영훈, “세상이 다 알았던 죽음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죽음 - 김경숙 일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https://archives.kdemo.or.kr/contents/view/181 2020년 10월 19일 접속.

(미주 2) 학술연구정보서비스 홈페이지, 검색어 ‘전태일’ 입력 시 결과, 2020년 10월 27일 접속.
(미주 3) 임송자,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학생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5호(2010), 319-360.
(미주 4) 오창은, “민중의 자기서사와 한국 노동현실의 증언-전태일의 일기‧수기‧편지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6집(2017.9), 115-147.
(미주 5) 박형규, 신홍범 정리,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창비, 2010); 권호경, 『역사의 흐름, 사람을 향하여』(대한기독교서회, 2019);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50년사』(다락원, 1988).
(미주 6) 손승호, 『유신체제와 한국기독교 인권운동』(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7); 장숙경, 『산업선교, 그리고 70년대 노동운동』(선인, 2013).
(미주 7) 전태일 지음, 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
(미주 8) 조영래, 『전태일 평전』(아름다운 전태일, 2009).
(미주 9)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40-41.
(미주 10) “67년 2월 30일 일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98.
(미주 11)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37.
(미주 12)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69.
(미주 13)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49.
(미주 14)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50.
(미주 15) 그의 가난에 대한 문제의식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없지 않아 보인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도우라는 명령에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다며 가출하고 돌아온 전태일에게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하며 소리를 질렀다. “공부해가지고는 대통령이나 안된 다음에야 밤낮 남의 밑에서 빌어먹기 알맞지. 어디 장관이나 국회의원들 되는 사람이 공부 가지고 하는 줄 알아. 돈 가지고 하는거야, 돈. 이 병신 새끼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던 가난과 생활고는 아버지의 알콜중독과 폭력이라는 더 큰 고통으로 돌아왔으며 이런 상황은 전태일에게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더욱 강한 동기를 부여했을 것이다.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58.

손승호(NCCK 간사)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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