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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오늘 여기를 살아가는 공동체를 위한 기도기도 ⑵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11.14 17:24
▲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는 공동체와 나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다. ⓒGetty Image

앞선 글에서 기도의 필요성과 유용성, 그리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와 기도의 몇 가지 법칙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나 아직 가장 중요한 문제를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갈 자격을 갖춘 자가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면 수치심과 공포심에 절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경외심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존엄을 생각하면, 우리는 떨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고 멀리 도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이유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언자(요일 2:1)와 중보자(딤전2:5)로 삼으셔서 무서운 영광의 보좌를 은혜로 보좌로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에, 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인도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히4:16)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여기서 보다 명백하게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요16:24).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16:26). 우리는 중보자 그리스도 덕분에, 기도하는 매 시간마다, 하늘 아버지 앞에서 “그의 중보에 의해서 아버지께서 우리 에게 은혜로우신 분, 기도를 쉽게 들어주시는 분”이 되는 친구를 갖고 있다는 확신과 함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III.xx.19).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그의 뜻을 어기는 사람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며, 로마교회의 성자들의 중보기도에 대한 그릇 된 교리를 거부합니다(III.xx.17).

성경은 우리를 모든 것에서 소환해서 오직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게 하며,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기를 원하신다(골1:20; 엡1:10). 그러므로 그를 떠나서는 들어갈 길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서 멀어질 정도로 성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애썼다는 것은, 미친 짓은 아니더라도 우매의 극치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이런 일이 보통이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것인가? 지금도 이른바 교황 제도가 번창하는 곳에서는 이런 짓을 하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그들은 대개는 그리스도를 무시하면서 빈번히 성자들의 공로를 내세우며 그들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 묻노니, 이것은 그 리스도께만 속한다고 우리가 이미 주장한 그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지위를 성자들에게 이전하는 것이 아닌가?(III.xx.21).

로마의 신학자들이 성자들의 중보기도의 기초가 성경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도(III.xx.23) 칼빈은 성경 전체의 교훈을 토대로 논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만을 기뻐하시며,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야 할 것을 명령하신다. … 말씀을 기초로 한 믿음은 올바른 기도의 어머니이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멀어지는 기도는 즉시 부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성경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이 영예는 하나님께만 속한다고 하였다. 중보하는 직무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리스도 특유의 일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 중보자가 성결케 하시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III.xx.27).

주기도문, 공동체를 위한 기도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결코 기도의 신학이나 기도의 교리를 전개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에 관한 실제적인 교훈을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 이하) 말씀하며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표준”(III.xx.48)인 주기도문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덧붙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으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기도문과 함께 우리는 마치 주님 자신의 말씀으로 기도하듯이 기도하기 때문입니다.(1)

여섯 개의 기원들에는 우리가 마땅히 구해야 할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처음 세 개의 기원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고, 다음 세 개의 기원들은 우리 자신의 유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는 일이며, 이어지는 세 개의 기원들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해야 합니다 (III.xx.3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선 “하늘에 계신”이란 구절은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 전능하신 분, 우리의 오감을 통해서 파악할 수 없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그 어떤 육적인 것이나, 땅에 속한 그 무엇을 생각해서 는 안 되며, 이 하나님을 우리의 이해력을 따라 헤아려서도 안 되고, 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욕정에 예속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은혜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그분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고(요1:12) 말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 리의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우리가 그를 대할 때에도 이렇게 부르기를 원 하신다. 이 한없이 다정한 이름으로 그는 우리 마음에서 모든 불신감을 없애려 하신다. 아버지의 사랑 이상으로 더 큰 사랑은 아무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III.xx.36).

칼빈은 또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주기도문 이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나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이 특징은 굉장한 사회적 함의를 띠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들 사이에 큰 형제애가 있어야 한다는 경고를 준다. … 한 아버지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아버지가 되시며 (마23:9), 우리가 얻는 좋은 것이 모두 그에게서 오는 것이라면, 당연히 우 리를 서로 분리시키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기꺼이 또 진심으로 서로 나누지 못할 것이 없어야 한다(III.xx.38).

그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온 세상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그들과 믿음의 유대와 교제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기독교인들이든 아니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가정들”(갈6:10)에 해당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III.xx.38).

주기도문의 여섯 개의 기원

첫째 기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은 그의 지혜, 선하심, 능력, 의, 그리고 자비와 같은 탁월함에 의해서 사람들 가운데 기억되고 찬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기원과 함께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받으시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가 받은 명령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수호하셔서 모든 경멸과 불경을 물리치실 뿐 아니라, 전 인류를 복종시켜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게 만드시기를 기원하라는 것입니다(III.xx.41).

둘째 기원: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과 지상 생활을 경멸하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로 약속하며 하늘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기원을 드릴 때에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평화로운 상태를 어지럽게 하며 그 순수함을 더럽히는 일체의 부패를 자기에게서 깨끗이 씻어버리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받은 명령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꺼이 복종하게 되도록 하나님께 기원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방식으로 온 세상을 굴복시켜서 나라를 세우십니다.

방자한 자들을 길들이시며, 길들일 수 없는 자들은 그 교만을 꺾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계 각지로부터 자기 앞으로 모으시도록, 교회와 교인의 수를 늘이시도록, 교회에 각종 선물을 주시도록, 교회 사이에 바른 질서를 확립하시도록, 그러나 순수한 교리와 경건의 원수들을 모두 타도하시도록, 그들의 계획과 노력을 분쇄하시도록, 이런 일들을 매일 기 원해야한다(III.xx.42).

셋째 기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아닌 일은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받은 명령은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상생활에서도 그러한 규칙에 따라서 모든 교만과 사악이 제거되기를 기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의 육의 욕망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이 기도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우리를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도록(시51:10) 우리 자신을 부정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III.xx.43).

넷째 기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님께서는 특히 처음 세 기원을 요구하시며, 우리를 전적으로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우리의 경건을 입증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야 우리 자신의 일을 돌보도록 허락하시는데, 거기에는 제한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혜는 모두 그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는 의도가 없이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며 죽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롬17:7-9).

그러나 이 기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모든 것, 즉 음식과 의복뿐만 아니라, 우리에 게 유익하다고 하나님께서 간주하시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는 그의 「소교리문답」에서 그 목록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 먹는 것, 마시는 것, 옷,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현금, 재산, 순수하고 선한 배우자, 순박한 아이들, 착한 고용인, 순수하고 신뢰할 수 있는 통치자, 선한 정부, 좋은 날씨, 평화, 건강, 교육, 명예, 좋은 친구, 신용 있는 이웃 등.”(2) 이같이 우리의 지극히 은혜로우신 아버지는 단지 영혼만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까지도 보호하고 지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영혼을 위탁하고도 여전히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을까 하고 육에 속한 일을 염려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III.xx.44).

칼빈은 “오늘”이라는 말과 “일용할”이란 형용사는 곧 없어질 것에 대한 무제한적인 욕망을 억제하는데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것을 가졌을 때, 쾌락과 오락과 사치에 허비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먹여주신 것처럼 내일도 그러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그날그날 쓰기에 충분할 정도만 구하라고(출16:18, 참조) 명하신 것입니다(III.xx.44).

다섯째 기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베푸시는 죄사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로 이 놀라운 사랑을 앞서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에게 죄 지은(빚진) 자를 사해주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고, 하나님의 용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는 누구나 우리 이웃들, 우리에게 죄를 지었던 자들을 용서하는 것과 달리 어떤 것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에게 빚진 자들의 채무가 매우 무겁게 보일지 라도,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지고 있는 우리의 채무에 비하면 무한히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위법이나 불법에 대한 죄책을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사43:25, 참조). 우리가 용서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마음에 있는 분노와 증오, 복수심을 기꺼이 버리고, 부당한 처사를 기꺼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 없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원하는 것은 우리 죄 를 용서하시지 말라고 기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하시라고 요청하는 것(마7:12 참조)과 같기 때문입니다(III.xx.45).

여섯째 기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의 나이에 따라서, 즉 청년, 장년, 그리고 노년에 따라서 변화하는,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는 보다 중요하지 않은 시험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그 시험들은 우리가 저항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야고보에서 그것은 기쁨의 대상일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약 1:12). 아마도 모질고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는,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고난을 야기하는 불행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견뎌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그것들이 서로 협력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롬 8:28). 따라서 우리는 그런 시험들, 그러나 불행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면하게 해달라고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기원 에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시험이나 불행들, 이 같이 보다 중요하지 않은 유혹들, 상대적으로 견딜 수 있는 그런 유혹들과 관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위대한 용사인 마귀와 싸우는 일이거나 그의 힘과 공격을 견디는 일 같은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여섯 번째 기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마귀의 세력에 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구해주시지 않는 다면, 우리는 마귀의 날카로운 이와 발톱에 찢기고 결국 그에게 삼켜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만을 의지함으로써 모든 악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III.xx.46).

이어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는 송영이 뒤따릅니다. 고대 교회의 신자들이 ‘주기도문’ 마지막에 이 송영을 읊조릴 때, 그들은 이 송영이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기원한 여섯 번째 기원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틀림없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사탄이나 죽음, 혹은 지옥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악에서 구원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나라,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는, 바꿔 말하면, “우리를 악에서 구원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강력하고 영광스러운 왕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시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III.xx.47). “아멘.” 이 말은 단순히 “그렇게 되게 해 주옵소서”를 의미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을 얻고 싶다는 열의를 표명하는 말입니다(III.xx.47).

기도, 습관으로 만들라

칼빈은 주기도문 해설을 마치며 기도의 실천을 위해 한두 가지 권면사항을 덧붙입니다. 먼저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라고 권하면서, 아침에 일어날 때, 일과를 시작하기 전, 식사 전후, 밤에 자기 전을 그 예로 제시합니다(III.xx.50). 그리고 어떤 경우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깨어 기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III.xx.52).

미주

(미주 1) 존 칼빈, 이형기 옮김, 『칼빈의 신앙교육서』(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60.
(미주 2) J. M. 로호만/정권모 옮김, 『주기도문 강해: 기도와 정치』(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5), 133.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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