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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 100년이다청산리전투를 알면 궁금증이 생긴다 ⑴
이이소 | 승인 2020.11.14 17:30
▲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독립군 부대원들 기념촬영 ⓒ독립기념관 제공
어제 아침 6시 정도를 기해서 청산리전투의 대미였던 고동하곡의 전투가 끝이 났다. 청산리일대의 기후를 알기에 어제는 종일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의 신고에 가슴이 아리고 콧등이 시큰거렸다. 10월에도 서리가 내리고 영하의 추위로 얼어붙고 밤이면 더 낮아지는 청산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무명의 독립군들에게 깊은 감사를 담아서 마음의 꽃다발을 바친다.

올해는 청산리전투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이라는 숫자에 가슴 졸이며 지난 봄 부터 1920년 10월에 시작된 ❮경신참변❯에 관련된 글을 쓰며 일제의 조선인 대학살의 만행을 세세하게 곰곰 씹어보았다. 조상들의 살 냄새, 피 냄새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청산리전투의 역사적인 배경

조선에서 기아와 학대에 시달리던 상놈들이 두만강을 건넜다. 그들이 척박한 만주 땅을 일구어 벼농사로 굶주리지 않고 살만하게 되었을 때 조선이 망하자 소위 지사들이 망명해왔다. 그들은 상놈들의 자식과 상놈들의 생산 활동을 기반으로 하여 구국 교육과 종교 활동을 펼쳤다.

상놈들은 조선이라는 나라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아 본 적이 없지만 청나라 사람들에게 망국민으로 모멸과 토비와 마적들에게 약탈과 학대를 받으며 나라 없는 설움을 절절하게 느꼈다. 그들은 망국민의 고통을 처절하게 겪으면서 독립에의 열망을 품었다. 그리고 자녀들을 독립군으로 바치고 소작농으로 겨우 연명하면서도 독립의연금 모금에 서로 앞장섰다. 그들은 민족 독립에의 소망 때문에 경신년 대학살의 대상이 되어 처절하고 억울한 죽음, 한 맺힘 죽음, 끔찍한 죽음을 당하였다.

일제의 경신년 대토벌이 시작되자 독립군들은 조선 이주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조선인 마을이 없는 산지로 피하였다. 화룡방면으로 진출한 아즈마지대는 독립군들을 추격하여 청산리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독립군들에게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참패를 당한 일본군은 훈춘, 왕청, 연길, 화룡의 조선인마을들, 특별히 독립군들의 배후 기지가 되는 마을들을 더 철저하게 초토화시켰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 21일에서 26일 사이에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과 완류구( 와록구, 완루구, 만록구, 마록구, 왈류구, 만리구 등의 이칭이 있음) 북쪽 산 일대와 고동하강 일대에서 벌어진 대소 10여 차례에 걸쳐 있었던 독립군들과 일본군들의 사이의 전투를 총칭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청산리전투를 우리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하나의 독립된 전투로 인식하고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경신년)에 일제가 독립군의 배후세력이 되는 동만주와 서만주의 조선인 마을 특별히 독립군 단체들의 배후 기지가 되는 마을, 더욱 특별히 간도국민회 지회가 있었던 마을들의 초토화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투이었다.

전투는 우리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우리 독립군은 총알이 사진되었고 군량이 떨어졌으며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는 일본군을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서 부대별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독립군들은 중국 관리들의 권고, 조선인마을 대학살로 중국에서 더 이상의 활동이 어렵게 되자 러시아령 자유시로 넘어가서 자유시참변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 비극의 주인공들이 된다.

설립되는 무장독립군단체들

1919년 용정 3.13만세 시위 후에 북간도 (동만주, 연변)에는 30여 개에 이르는 독립운동단체가 세워졌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차츰 무장단체로 전환하며 무력투쟁을 위해 군인을 모집과 군사훈련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우며 무장을 위해 의연금을 모으는 등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홍범도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독립군을 만들었으며 1919년 8월에 압록강유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당시 대한독립군은 300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1920년 1월에는 연변일대로 부대를 이동하였다.

간도국민회는 안무를 사령관으로 추대하여 국민회군은 설립하였다. 국민회군은 450명의 대원에 총 560 개를 보유하였으며 1920년 5월에는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였다.

서일은 현천묵, 계화와 함께 북로군정서를 만들었으며 휘하에 사관연성소를 두어 1920년 3월에 김좌진을 소장으로 임명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600여 명의 병력을 갖고 있었다. 김규면의 대한신민단, 훈춘한민회의 급진단, 임창세의 야단, 이범윤의 의군부, 김성극의 광복단 등은 북간도(동만주, 연변)에서 군인을 모집하며 의연금을 모금하며 독립운동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남만주(서간도)에서는 서로군정서가 이상룡을 독판으로 이청천(지청천)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과 사생들로 편성된 무장대오를 갖추었다. 병력은 대략 의용군 제1중대 800~900명 정도였다.

무장독립부대들의 국내진입작전과 봉오동전투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송하여 독립을 청원키로 하였던 조선인들의 대망이 보기 좋게 걷어 채이자 만주의 독립운동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봉오동전투이전까지 무장독립투쟁의 대부분이 조선국내진입작전 이였다. 홍범도의 독립군은 1919년 8~10월에 압록강을 건너 함경도의 혜산진, 갑산군과 평안도의 강계, 만포, 자성에까지 들어가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상해임시정부 군무부는 1919년 연말에 독립군의 조선국내 진입작전이 3월 1일에서 6월초까지 32회나 전개되었고 일제 군경 등의 관서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고 확인 발표하였다.(1) 조선총독부는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이 조선 땅을 침입한 것이 32차에 이르렀다고 하였다.(2) 통계에 의하면 동만(북간도, 연변)에만 하여도 2,900여명의 무장독립군들이 있었고 그들이 두만강 남북에서 일제침략군과 싸운 횟수는 1920년 한해만 하여도 1,651차에 달하였다.(3)

일제는 독립군의 무장투쟁이 식민지 통치에 위협이 되며 만주와 시베리아 진출에 장애물 됨을 인식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국내진입작전을 마치고 돌아간 부대를 따라 중국영토에 침입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최초의 독립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봉오동전투❱가 발생하였다.

1920년 6월 4일,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대략 7km 떨어진 춘화향(석현)에 본부를 둔 신민단의 30여 명의 대원들이 두만강을 건너 조선 강양동의 일본군초소를 습격한 후에 되돌아왔다. 그러자 남양의 일본군수비대와 제19사단의 월강추격대가 강을 건너서 독립군들을 추격하였다. 6월 7일, 최진동 도독부의 근거지인 봉오동에 집결해있던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신민단의 300여명의 독립군들은 일본군의 추격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고 인근의 주민들을 대피시키며 전투에 유리한 곳에 매복하여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유인되어 오는 일본군들이 매복지점에 들어서자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고 전투는 오후까지 계속되었다.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150여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고 패배한 채로 조선으로 철수하였다. 봉오동전투는 독립무장단체들의 연합하여 중국내에서 정규 일본군과 벌인 최초의 전투였으며 최초의 승리로서 조선인들에게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투지와 신념을 고양시켜주었다.

일제의 독립군부대 토벌계획과 훈춘사건 조작

❰3.13❱용정만세시위 이후 일본은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의 국내진입작전에 위협을 느꼈다. 일제는 1920년 5월 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를 봉천에 파견하여 동북3성 순열사 장작림과 중일공동 ❰수사반❱을 조직하여 봉천성과 간도일대의 조선독립무장부대를 토벌하기로 협정을 맺었다. ❰수사반❱은 5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남만의 안동, 환인, 관전, 집안, 무순, 유하 등지에서 수백 명의 독립지사들과 독립군들을 체포하고 학살하였다. 남만주에서는 장작림의 협조로 독립군 부대를 마음대로 토벌할 수 있었으나 간도방면에서는 길림성 성장 서정림의 완강한 반대로 중일공동 수사반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아까즈까 총영사는 5월 29일 봉천총영사관에서 마찌노 고문, 마루야마 총독부사무관, 히라마쯔 군참모 등과 함께 북간도 일대의 무장독립부대에 대한 토벌 대책을 세웠다. 그리고 마찌노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사령부와 총독부 관계자들과 상의하고 ‘길림성장의 취체가 철저하지 못하고 간도의 불령선인들의 정황이 악화되면 일본이 철저한 토벌을 주도한다.’는 결의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은 조선인들의 독립군부대를 발본색원할 계책을 세웠다. 먼저 화룡현 관할지역내의 두만강 나루터를 모조리 봉쇄하고 교통을 단절시켰다. 또한 조선 변경지대 회령에서 삼봉까지 통하는 경편철도 열차의 승객과 화물 운송을 중지시키고 일본군대만 수송하였는데 6월 12일까지 총 3천여 명의 육군을 수송하여 종성, 동관, 창수, 삼봉 등지에 주둔시키고 수시로 월경 토벌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4)

6월 9일, 북경주재 일본공사 오하다는 북경정부 외교총장대리를 회견하고 ❮봉천, 길림 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당지 일본 영사와 시급히 협력하도록❯압력을 가하도록 강요하였다. 7월 16일, 조선주재 일본군참모장 오노, 관동군참모장대리 기시, 군사고문 사이또, 마찌노, 조선총독부 경무과장 구니도모, 조선주둔군 참모 히라마쯔 등은 봉천총영사관에서 회의를 열고 아까쯔까 총영사가 토벌기한은 2개월로 하고, 출동 병력은 1개 연대로 하며, 토벌지역은 간도와 훈춘, 동녕현 일대로 할 것을 장작림과 교섭하여 ❮중국군대의 토벌에 길림독군 고문으로 사이또 대좌가 동행하며 만약 중국군대가 토벌 시 원조를 요구하면 일본군대도 참가할 수 있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5)

8월 15일, 조선주둔군 참모장 오노, 총독부 경무국장 아까이께와 사이또 고문은 서울 회견에서 ❮간도지방에서의 불령선인에 대한 토벌은 사이또 대좌의 감독아래서 진행하되 중국관헌이 토벌에 성의가 부족하거나 노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에는 경고를 주며 필요시에는 중국관원에게 일중협동수사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중협동토벌은 그 영향이 크기 때문에 중국정부를 강박하여 우리의 출병을 요구하게 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하므로 형세의 발전에 따라 중국관원과 협정에 의해 실시되도록 하여야 하며 외교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군당국의 금후 방침을 세워야 한다❯고 전략을 세웠다.(6)

길림당국은 일본이 조선독립군부대의 토벌을 위해 중국에 출병하는 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중국군대를 출동해서 토벌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중국군경들은 토벌할 때 마다 토벌 소식을 사전에 누설해서 독립군들로 하여금 미리 이동하게 하였으며 그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을 수집하고 가옥과 병영을 소각하였다. 이런 정황을 포착한 일제는 중국군대의 토벌에 불만을 품고 조선독립군부대의 토벌에 직접 나서기로 하였다.

6월 17일, 일본 대장성(재정성)에서는 용정 일본총영사관 산하의 경찰인력을 2배로 증가할 것을 비준하였다. 7월 조선주둔군 사령부에서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토벌계획서❱을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8월 20일, 조선주둔군 사령부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러시아 간섭군으로 파견한 군사령부와 연락하여 일부 부대를 춘화의 토문자, 초모정자, 동녕현의 삼차구, 왕청현의 라자구 방면에 파견하여 조선주둔군의 작전에 협력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육군성과 참모본부에 28만원의 경비를 신청하였다.(7)

8월 말에 ❮간도지방 불령선인토벌 계획서❯일체를 완성하였다. 계획서는 6개 부분으로 구성되었으며 토벌기간은 2개월로 첫 단계는 주로 독립무장부대에 대한 토벌을 실시하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잔여부대를 소멸하는 것이었다. 병력은 제19사단의 제37, 제38여단을 주력으로 하고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제 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의 일부를 훈춘과 동녕 일대에 포진하여 독립무장부대의 러시아행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였다. 일본군은 연변을 두개의 토벌구역으로 나누고 훈춘, 왕청, 용정, 두만강연안 사면에서 포위하여 일시에 토벌하여 하였다. 그리고 관동군(북만주 주둔군)에게도 토벌계획서에 따라 만약의 경우 북쪽으로 퇴각하는 독립군무장부대를 도륙하도록 해림 방면으로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8)

일제는 간도에 출병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후, 중국정부가 항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론이 출병을 비난하지 못하도록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1920년 9월 12일, 9월 30일 그리고 10월 2일 두 번에 걸쳐 비적을 동원하여❮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1920년 9월 12일, 동녕현 로흑산에 근거지를 둔 왕사해와 기꾸꼬라는 일본인 애첩을 거느리고 사는 친일비적 고산의 수하인 만순 등은 300~400명의 비적을 동원하여 훈춘현 소재지를 습격하였다. 그들은 아침 5시경에 훈춘현 소재지를 포위하고 변방 초소에 불을 지른 후 관은전호, 현공서, 세무국, 전부국에 쳐들어가 재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일본 경찰서와 영사관은 피해가 전혀 없었다. 비적들은 세 시간 정도 성안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퇴각하였다. ❮갈장일보❯ 보도에 의하면 그들의 습격으로 상가지역 내 가옥 200간이 불에 탔고 80여 명의 중국인과 6명의 조선인이 납치를 당하였고 약탈당한 재물은 1,500만조에 달하였다.(9)

그 후 9월 30일에 친일 비적 고산의 수하인 비적 진동이 훈춘현 대황구에 주둔하고 있는 중국군 공병영 제4련을 습격하여 20여 명을 납치하고 무기와 탄약을 탈취해갔다. 두 차례의 비적들의 훈춘현 습격사건은 문제가 되었으나 중국인, 중국군대 및 조선인에게만 피해를 주었고 일본 영사관이나 일본 거주민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제는 간도에 출병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건을 조작해야 했다.

10월 2일 새벽 4시 비적 400여 명은 두목 진동과 만순 등의 지휘 하에 기관총 2정, 대포 1문을 가지고 동서로 나뉘어서 훈춘현 소재지를 공격하였다. 비적들은 대포로 서북 성문을 통제하고 기관총을 난사하며 일본영사관을 포위하고 폭탄을 던져 불태웠다. 이어서 6개의 상점을 방화하고 약탈하였다. 그들은 현금 12만원을 약탈하였으며 일본인 경찰 1명, 일본인 11명, 조선인 6명을 살해하고 200여 명의 백성들을 납치하여 철수하였다.(10)

두 번째 ❮훈춘사건❯의 사망자, 중상자와 경상자 대부분이 일본인들이었고 영사관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으므로 일본은 ❮최근 훈춘에서 발생한 흉변은 전적으로 불령선인들이 마적 그리고 과격파 로씨야인들과 손을 잡고 일으킨 것이다.❯는 여론을 대대적으로 조성한 후❮일본인의 생명의 안전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간도에 25,00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불령선인❯이라 불리는 무장독립군에 대한 대토벌이 시작되었다.

무장독립부대는 중국군의 사전 고지를 따라서 이동을 시작하였다. 청산리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한민회군, 의민단, 북로군정서 등 무장독립군부대들은 산악지대이며 지리적으로 조선과 가까운 화룡현 2도구와 3도구로 집결하였다.

미주

(미주 1) 김춘선 외 2인, 『최진동 장군』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6), 98.
(미주 2) 같은 책, 98.
(미주 3) 김기봉 외 2인 편저,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연변인민출판사, 1987), 7.
(미주 4) 『최진동 장군』, 150.
(미주 5) 현천추, 「반일부대에 대한 일제의 토벌계획」,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벽』 (민족출판사, 1999), 501.
(미주 6) 같은 책, 501.
(미주 7) 같은 책, 503.
(미주 8) 김철수·김중하, “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 『룡정3.13반일운동 80돐기념문집』 (연변인민출판사, 2015), 230.
(미주 9) 심영숙, 「훈춘사건」,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벽』 (민족출판사, 1999), 506.  
(미주 10) “일제의 경신년대토벌에 대하여”, 281.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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