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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되고 평화를 주는 사람우리의 신앙은?(역대하 35:20-2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0.11.15 17:06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Josias vernimmt des Herrn Wort aus dem Gesetzbuch」 (1858) ⓒWikipedia
20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성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 애굽 왕 느고가 유브라데 강 가의 갈그미스를 치러 올라왔으므로 요시야가 나가서 방비하였더니 21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 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23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을 입었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 24 그 부하들이 그를 병거에서 내리게 하고 그의 버금 병거에 태워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25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

오늘은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평소 같으면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주제의 말씀을 전해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코로나 시기에 우리는 무얼 감사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는 흩어져버렸고, 이를 계기로 많은 신앙인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는 코로나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잠도 못 자며 일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고작 지금 정부를 비판하기 위해 이렇게 고생하는 이들을 우롱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런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할까요. 사실 평범하게 생각했던 주제들도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발표된 가수 이적의 ‘당연한 것들’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때는 알지 못했죠. 우리가 무얼 누리는지. 거릴 걷고 친굴 만나고. 손을 잡고 껴안아주던 것. 우리에게 너무 당연한 것들.”

지금에 와서야 우리는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일상을 허락하셨던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 역시도 우리의 일상이기에 지금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자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은 이미 대표기도를 통해, 지난 설교를 통해 다 전해드렸던 말씀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감사함’ 자체보다는 우리의 신앙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봤으면 하는 말씀을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열왕기의 연좌제

오늘 저희가 읽은 역대기의 말씀은 남왕국 유다의 왕 요시야가 죽는 순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열왕기하 23장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열왕기와 역대기의 기록은 조금 다릅니다.

열왕기에서 요시야는 사사 시대 이후로 유일하게 유월절을 지킨 훌륭한 왕의 전형으로 나타납니다. 열왕기하 23장 25절은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라고 말하며 요시야를 설명합니다.

요시야가 이렇게 훌륭한 왕으로 표현되는 이유는 열왕기하 22-23장에 나타난 요시야의 종교개혁 때문일 것입니다. 22장 15-20절에는 여성 예언자 훌다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야가 돌이킨 모습을 보셨고, 그를 평안히 죽을 수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남왕국 유다에 내려질 재앙을 그는 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토록 훌륭한 왕이었던 요시야에 향한 훌다의 예언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분명 요시야는 남왕국 유다의 멸망을 보기 전에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진 못했습니다. 이집트 왕 느고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요시야는 너무나 훌륭한 왕이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죽어버립니다. 열왕기는 그 이유를 열왕기하 23장 26절에서 말합니다. 므낫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 진노를 돌이키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무엘과 열왕기를 기록한 소위 신명기 역사가들은 요시야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전합니다. 바벨론에 의해 속국이 되고, 또 나라가 멸망하는 모습을 본 이들은 과거 행해왔던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른다는 신앙을 전했습니다.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도 내려와 자식이 벌을 받게 되는 연좌제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외우고 있는 십계명의 제2 계명의 후반부가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신5:9)”이기 때문입니다.

‘연좌제’라는 표현은 어쩌면 우리에게 거부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명기 역사가의 신앙은 연좌제가 맞습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죄와 벌의 전가만을 이야기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우리가 부모의 죄, 조상의 죄로 인해 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손 대대로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면 결국 하나님의 구원하심, 도우심을 얻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열왕기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여호야긴이 높임을 받으며 끝납니다. 또 앞서 말씀드린 십계명 제2계명의 마지막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5:10)”로 끝납니다.

예언자의 반론-죄는 자신에게 속한 것이다

신명기 역사서는 그 마지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벨론 포로 초기에 기록된 역사서로 보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들 역사가의 신앙을 반박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와 에스겔입니다.

예레미야 31장 29-30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는데 아들이 이가 시다고 말하는 것은 죄의 전가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그 날이 되면, 더 이상 아버지의 죄로 인해 아들이 벌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리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지금은 연좌제가 있지만, 앞으로는 없을 것이다’라는 의미로도 읽히기 때문에 약간 중간적인 입장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에스겔은 예레미야와 똑같은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에 대해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에스겔 18장 2-4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그의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

사무엘-열왕기를 기록한 신명기 역사가는 분명 연좌제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예레미야는 이를 절반 정도만 반박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신앙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의 죄로 인해 벌을 받는 때가 오리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를 살았지만 아마도 가장 젊었을 에스겔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벌은 연좌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는 벌은 우리의 잘못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역대기의 신앙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인 역대기는 포로기 해방 이후에 기록된 역사서입니다. 이들은 에스겔의 신앙을 따릅니다. 부모의 죄로 인해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해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열왕기에서 요시야는 정말 뜬금없이 죽어버리지만, 역대기는 이 장면에 느고의 말과 요시야의 행동을 추가합니다. 느고는 요시야를 향해 말합니다. “우리는 너희의 적이 아니다. 나는 너희가 믿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의 적과 싸우러 갈 뿐이다.”

느고의 말을 들은 요시야는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느고와 싸우기 위해 변장까지 하며 전쟁터로 나갑니다. 오늘 본문 22절은 ‘그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역대기는 요시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를 범했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가 아무리 종교개혁을 일으킨 훌륭한 왕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그 말씀을 거부한다면, 결국 벌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역대기에서 요시야의 죽음은 므낫세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죄로 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역대기는 요시야의 죽음을 전장에서 왕으로서는 수치스러운 죽음인,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가 죽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출애굽기과 신명기에 나타난 십계명의 영향 때문인지 조상의 죄가 대물림 된다는 당연한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죄가 지금까지 대물림 되고 있다는 원죄를 믿는 우리에게 포로기 이후의 변화된 신앙은 생소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이 변화된 이유는 분명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의 죄가 전가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포로기를 겪으며 신앙적으로 자포자기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잘 믿어봤자 부모 죄로 인해 벌 받을텐데 뭐하러 하나님을 믿냐는 생각들이 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죄는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에스겔의 선포와 역대기의 역사 기록이 필요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경은 어떤 고정된 신앙을 우리에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다보면 시대 속에서 이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얼마나 고민했는지 보게 되며, 그 신앙의 변화와 흐름에 따라 이들이 처한 상황을 역추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위대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생각에 고정되어 과거의 유물로 남아버리는 책이 아니라 언제나 시대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고민하고 변화시켜가며, 하나님을 바르게 섬겨 나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모색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거 우리는 아프리카의 굶주린 사람들을 보며, 우린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니 복 받았다고 말해왔습니다. 우리가 저런 처지가 되지 않았음에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어렵게 살던 시절을 극복했던 우리나라였기에 이런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감사를 드리는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나의 감사로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만도 코로나 확진 되었던 사람이 3만명 가까이 되고, 코로나로 사망한 사람은 500명 가까이 됩니다. 지금까지 미국은 110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24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세계적으로는 헤아리기도 어려운 사람이 코로나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의료현장에는 코로나로 인해 오늘도 힘겹게 노력하고 있는 의료진들도 있습니다.

그런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코로나에 안 걸렸으니까 감사합니다.’라는 식의 감사는 내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신앙의 발로일 뿐입니다. 지금 시대에 우리의 신앙, 감사에 관한 우리의 신앙은 분명 바뀌어야 합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사회,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사회, 너무 많은 이들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파하는 사회, 그곳에서 우리는 무엇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이제 ‘나는 괜찮으니까’ 감사한다는 신앙에서 ‘나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니까’, ‘내가 느낀 평안은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으니까’ 감사하는 신앙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사람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는 사회 속에서 오히려 사람이 있음에 서로가 평안을 전하고 위로를 전하며 힘이 될 수 있음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분명 이 사회 속에서 그 역할을 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누군가의 위로가 되고 누군가에게 평화를 주는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역할을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삶도 지키시고 평안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아니라 ‘남’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안을 채움 받는 여러분 되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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