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인터뷰
무명의 사람, 첫 여성 장애인 총장이 되다채은하 한일장신대 총장을 만났다
홍인식 | 승인 2020.11.16 01:03
▲ 소아마비로 2급 지체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채은하 총장. 부드럽고 웃음이 가득하지만 그가 살아온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홍인식

지난 11월 6일 오전 9시 전라북도 전주시에 자리 잡고 있는 ‘한일장신대학교 황기주 채플실’에서 신임 총장 직무 시작 감사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주인공은 지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 제105회 총회에서 7대 총장으로 인준을 받은 ‘채은하’ 교수(63, 구약학)였다.

채 교수가 총장으로 직무를 시작한 한일장신대학교는 1922년 6월 22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파견한 ‘서서평(Eeliz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가 광주 여성들을 위한 ‘전도부인(Bible Woman)’ 양성학교로부터 시작했다. 학교 역사에서 외국 여성 선교사들 외에 한국인 여성이 총장에 선임된 것은 채 교수가 첫 번째이다. 학교 역사에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더한 것이다.

채 교수의 총장 선임은 여성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에서 첫 한국인 여성 총장이 배출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채 총장이 2급 여성 지체장애인이라는 부분에서 통합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 새로운 의미를 던져 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채 총장은 앞으로 총장으로서 전통적인 섬김의 정신을 이어나가는 것은 물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면서 ‘행복 플랫폼 대학’을 제시한다. 특히 행복 플랫폼에서 3가지 H를, 즉 건강하고(Healthy), 행복하고(Happy), 희망찬(Hopeful) 삶을 추구하겠다고 언급한다.

12월 11일 취임식을 앞두고 있는 채 신임 총장을 11월10일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총장실은 화려하기보다는 초라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단순했다. 기자가 집무실을 찾았을 때 채 총장은 옆 사무실에서 한일신학대학 동문들과 만남을 갖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온 채 총장은 반갑게 기자를 맞아주었다. 키가 무척 작은 채 총장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약간은 들뜬 목소리로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채 총장과의 면담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순간순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나라를 이룩하시는 분이십니다. 한국교회가 보수화되고 내 것만 주장하는 편협한 신앙을 돌아보게 하시고 교회를 돌아보게 하시고 교회를 향한 비난이 그저 하나의 비난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하고 한국교회를 갱신할 수 있은 기회가 되게 해 주소서. ‘총장 됨’이 누림과 명예의 자리가 아니고 더 섬기고 더욱 더 사랑할 수 있는 자리임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게 하소서.”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는 그의 총장 선임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되었다.

▲ 먼저 총장에 선출되신 것을 축하드린다. 여성이 총장에 선출된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다. 처음부터 실례되는 질문일지 모르겠다. 예전부터 총장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계셨는가?(웃음) 그리고 총장 선출 과정은 어떠했는가?

나는 1997년 한일 장신대학에 겸임교수로 왔다. 당시 풀타임이기는 하였지만 직위는 겸임교수로 왔다. 그 후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계약직 교수로 직위가 변경되었고 그 후 비정년 교수 그리고 2006년에 정교수로 승진했던 바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저는 한 번도 총장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그런 꿈도 꾼 적이 없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교협회장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 전임 총장이 재임에 실패하면서 그러면 누가 차기 총장을 하면 좋겠느냐 하는 생각들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으나 그 와중에서도 내가 총장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기 총장에 대하여 동문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내부에서는 어려운 학교에 외부에서 오는 것보다는 내부에서 새로운 총장이 선임되는 것이 좋겠다는 중론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를 오랜 세월동안 섬기고 있는 교수님 몇 분들에게 시선이 모이기도 했는데 이름이 오르던 분들이 고사하는 상황이 지속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어느덧 그 시선이 나에게로 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나는 교수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데 그리고 특히 교수은퇴를 앞둔 상황에서 은퇴 후에 무엇을 하고 놀 것인가를 생각하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은근히 나에게 시선이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엄청난 부담감이 몰려왔다. 하지만 그 시선을 무작정 외면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 학교는 ‘서서평’처럼 죽을 사람, 죽겠다는 사람만 총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나는 지난 24년 동안 교수로서 나의 일만 충실하게 하며 살면 된다는 어찌보면 편안한 생각을 가지고 나름 열심히 살아오기는 했다. 그러나 총장이 되면 나라는 존재를 뛰어넘어 학교라는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기에 무겁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 학교를 세운 선교사들은 한국 땅까지 와서 학교를 세우고 선교를 했는데’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나도 그들을 본받아 이 땅에서 선교사처럼 그 짐을 맡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되었고 결단하고 총장에 지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 신학대학 7개 중 여자 총장은 처음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축하를 기쁘게 받기보다 무거운 마음이다. 오히려 축하보다는 위로가 더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나는 준비된 총장은 아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저 학교를 위해 죽어보자. 수고하자. 애써보자. 내가 총장을 하면서 갖는 각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흉내 낸다’는 것이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최선을 다하겠다.

▲ 여성으로 그리고 2급 장애인으로 총장이 되신 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다. 채은하 총장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삶을 살았는가? 총장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 좋겠다. 채 총장은 자신을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내 자신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무명(無名)의 사람, 익명(匿名)의 사람”이라고 말한다. 내가 총장이 되었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채은하가 누구냐? 도대체 그렇게 사람이 없느냐?”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무명의 사람’, 어떻게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총장이 되었나 하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그 말이 맞다. 나는 그리 이름이 뛰어나게 알려진 사람이 아니다. 더욱이 나는 여성이며 2급 지체장애자이다. 나는 한국에서 여성과 장애인으로서의 이중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다.

▲ 채은하 총장은 자신의 삶에서 어머니의 생각의 발상의 전환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한다. 장애인은 집 안으로 숨기기에 바빴던 시절, 어머니는 오히려 자신을 사회로 내보냈다고 했다. ⓒ홍인식

나는 가난한 집의 맏딸로서 2살 때 앓은 소아마비가 발병했고 그때부터 2급 지체 장애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난한 집의 맏딸이 장애인이라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어떻게 먹고 살아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하신곤 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안에서 너는 장애인이기에 너만이라도 대학을 가야 한다.’라고 늘 강조를 하셨다. 대단한 어머니셨다.

일반적으로 장애인 딸을 가둘 텐데. 동생 셋이 있는데 동생들을 불러다가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사지가 멀쩡하니 몸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데 언니는 그렇지 못하니 어떻게 해서든지 대학을 가서 혼자 먹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언니가 대학을 가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너희들은 공장을 가서라도 돈을 벌어서 언니를 도와야 한다.”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었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에서 나온 발상의 전환이었다. 당시에는 장애인들은 집안에 갇혀 있을 때였지만 나의 어머니는 그런 편견을 깨고 나를 세상 밖으로 내 보내셨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우리 집안에서 나를 비롯해서 모든 동생들도 대학을 나왔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선택한 것이 약학대학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약학을 공부하고 약국에서 일하며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약학대학 지원하고 필기고사에 합격하였지만 결국에는 장애인이기에 여러 가지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구실로 그만 신체검사에서 낙방을 하고 말았다. 그때는 나는 나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경험하면서 가슴아파했다. 그렇게 실망하고 있을 때 당시 내가 다니던 교회의 교회학교선생님들이 나에게 신학을 권유에 따라 1976년 장로회 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성격이 활달하고 밝은 편인데 교회 생활을 통하여 목사님과 교회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은 것이 성격 형성에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가난하고 장애가 있는 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소외하고 자신감 없게 만들 수도 있지만 나는 교회의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 아니 나는 극복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못할 만큼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과 돌봄의 중심에 조성기 목사님이 계셨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교회학교의 선생님으로 나를 가르치고 격려해주셨던 분이 조성기 목사님이셨다. 어린 학생시절 맺었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집에서는 형제 많고 가난하니까 부모님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었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가 없는 상황(중학교 3학년 사망)에서 어머니가 경제생활을 도맡아해야 했기에 돌봄이 충분하지 않았다. 자녀에 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부모로부터 받을 사랑을 교회에서부터 받았다. 교회가 부모의 역할 이상을 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자라났기에 나는 매우 활발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장애인으로서 나는 10여년 동안 여성 장애인을 위한 운동을 하기도 했다. 여성 장애인은 이중 차별을 받고 있다. 나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성 장애인들을 위한 인권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여성들을 위한 야학도 하고 인권운동도 펼쳤다. 여성 장애인의 열악한 상황을 보면서 이들의 딱한 사정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여성 장애인을 위한 인권운동에 뛰어 들기도 했다.

약학대학을 낙방하고 1976년 장신대학교 기독교육학과로 진학하고 곧 바로 신대원을 졸업하고였다. 대학 3년 때 수화를 배운 관계로 온양에서 5명의 농아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를 하고 농아인 교회를 1978년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오늘의 온양 농아인 교회이다.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 온양으로 내려와 농아인 교회를 약 6년간 목회했다.

그 당시에 농아인 교회가 드물었다. 충청도에는 농아인 교회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교인이 많아지고 마침내 69평 규모의 교회 건물을 구입하게 되었다. 구입 후 곧바로 호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입주는 하지 못했다. 농아인들의 자립을 위해 500평의 땅을 구입했다.

여성 목회자이기에 목회한 교인들에게 세례와 성찬을 베풀 수도 없었고 예배 시에 축도도 하지 못했다. 세례와 성찬 집례 때마다 남자 목사가 와야만 했다. 울분을 느끼기도 했다. 여성 안수는 언젠가 되겠지 시간이 필요하니 그동안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호주 멜버른에 석사 학위를 공부하러 갔다. 호주에서 많은 차이를 느꼈다. 계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경사로 혹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7년 유학 후 귀국하여 92년부터 서울 장신과 장신에서 강사로 구약을 강의하면서 장신대에서 고 이동수 교수 지도로 구약학으로 박사학위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한 주제는 전도서였는데 전도서가 제시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 질문이 나의 질문과 동일해서 전도서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신앙은 삶의 질문과 연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의 질문은 무엇이었는가? 고난의 문제, 신정론적인 질문, 인생의 불평등의 문제 등이 나의 삶의 장애와 삶의 경험과 연결되었다. 나의 억울한 질문, ‘왜 너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가 부족하다.’라는 사람들의 질책 아닌 질책 속에서 느꼈던 억울함과 질문들이 나로 하여금 전도서에 관심을 갖게 했고 박사공부의 연구주제로 삼게 되었다. 2002년 박사학위 공부를 마쳤다. 97년 박사학위 과정 중에 겸임교수로 한일장신으로 오게 되었고 계약직, 비정년 교수를 거쳐 2006년 정교수로 임명되었고 오늘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여성 총장으로서 그리고 2급 장애인으로서 어떤 점이 어려운가? 장점은 없는가?

이건 나의 느낌이기는 하지만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남자들이 경쟁의식을 별로 느끼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는 조금 괜찮다. 그런데 여성에 대한 경쟁심 약화는 여성을 무시하는 것으로부터 온다. 여성이기에 남성들의 견제가 덜하다. 그러나 여성의 권위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낮게 보려고 한다. 소위 ‘흥’하는 반응을 보인다.

사람들은 나에게 하는 ‘당차고 자신 있게 명령하고 지시하라’고 조언한다. 그래야 총장으로서 권위가 선다는 조언들이다. 그런데 여성의 리더십이 남자를 흉내 내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설득하고 부드러움을 통해서 공동체 유지 기능을 보여주고 알게 해야 한다. 혹자는 안 먹힐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여성권리가 신장 되었다고 하지만 남성 중심의 구조는 여전하다. 핏속에 흐르고 있다.

총장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들과 교직원들과 함께 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동문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함께 가자고 호소했다. 여성 지도자들이 부각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한일신학대학은 여성 리더십에 대한 개방적인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여성 리더십이 부각되는 시기는 남성들의 리더십의 무능력이 보일 때이다. 남성들이 어찌할 수 없을 때 여성 리더십이 등장한다는 것이 성서의 특징이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잘 나가고 있다고 혹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절대 여성에게 지도력을 양보 부여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남성들의 성찰이 필요하다. 이것도 양보의 의미보다는 어디 여자가 해봐라는 심정이 강하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의 등장이 신선한 느낌을 준 것이 아닌가? 신학대학 특히 지방 신학대학이 어려운 상황인데, 흥, 얼마나 잘하나 보자 관망의 시선도 있다. 그러나 못할 때는 가차 없는 질책이 있을 것이다.

장애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장애를 극복해야겠다는 의식을 갖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나의 모습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왔다. 장애인을 표현하는 말을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장애와 비장애인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장애인은 어떤 부분에서 기능적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장애우(友)라는 말도 나는 거부한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친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잖는가.

장애인은 단지 장애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소아마비로 지체 장애가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둥그렇게 말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 있는 그대로 보자는 말이다. 이것이 나를 이렇게 활발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다. 키가 작고 지팡이를 짚고 있는 이 모습이 나다. 누군가는 잡아주지 않으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는 사람이 나다. 이것이 나다. 나는 2급 장애를 갖고 있는 중증 장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을 표현하는 성서의 언어가 장애인 차별과 혐오의 단어가 많다. 성서공회에 장애인에 대한 언어를 개정해 줄 것을 요청하고 반영될 것으로 기대된다. 성서를 인용하면서 성서에 나타난 비속어적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용어를 중성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바꿔야 한다.

▲ 남들이 보기에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는 많은 무게와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채은하 총장 ⓒ홍인식

▲ 신학교육과 목회 신학교수로서 보수 일색의 한국 교회에서 신학과 목회의 불연속성의 문제에 대한 극복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제시 한다면 무엇이 있겠는가?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고 뿐만 아니라 신학생들의 진로가 매우 어렵다. 요즘에 일반사회에서 최저임금을 통하여 기본적으로 받아야 할 임금이 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종과 헌신의 이름으로 부교역자들이 제대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이다. 요즘 발생하는 일은 젊은 신학생들이 교육 전도사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알바를 선호한다. 기초임금에도 못 미치고 그리고 하라는 일은 많은 교회의 교육전도사 보다는 알바를 해서 경비를 벌고 학업을 계속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또 다른 편으로 목회라는 가치에 대해서 저평가하기도 한다. 세속적인 가치 속에서 금전적인 가치가 모든 것이 평가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살고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목회적 가치를 설득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이런 와중에서 대두되는 것이 이중직 목회가 아닐까? 전통적인 목회만으로 진로를 지도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론적인 신학도 중요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도외시 할 수 없다. 목회적 가치도 유지하면서 현실적인 상황에서 이중직 목회를 위한 시도를 해야 한다. 전문적인 직업 훈련의 기회도 제공해 줘야 한다. 한일장신 신학의 특징은 학생 비율에 있어서 여성이 50% 정도이며 비교적 나이가 많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교회 내에서 직업의 기회가 생기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노령의 사회에서 간호학과와 연계해서 호스피스 등 전문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현실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목회적 가치가 경제적인 가치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어려움이 발생한다. 경제적 자립을 통하여 목회적 가치를 유지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 요즘 신학대학의 과제이기도 하다.

목회의 다양성 측면에서 교회 안과 교회 밖의 목회에 대하여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직업교육으로 인한 신학교육의 약화가 우려되기도 한다. 한때 한일신학대학은 사회복지 자격을 필수로 하였으나 학생들의 반발과 신학교육의 악화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로 인해 현재는 선택으로 하였다.

▲ 예장 통합 교단 내에는 여러 신학대학이 존재한다. 이들 중 한일 장신대학교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성은 어떤 것이 있나?

통합 총회내의 7개 신학대학 중에서 한일 신학대학의 독특성은 상담학과 간호학을 통해 간호사 상담사 자격 취득 등을 통한 직업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특징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의 서울 집중 현상이다. 최근 장신대의 경쟁약화로 이제 지방 신학생들이 서울 집중 현상이 일어난다. 교회와 신학대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사회의 문제이다. 최고의 명문 학교인 전북대의 경우도 몇 인기학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생이 없다. “소는 누가 키우냐? 이것이 총장으로 고민의 현장이다.

지방의 문제는 다 서울로 가고자 한다는데 있다. 남아있는 사람들의 패배감, 나는 서울로 가지 못했다, 경쟁에서 탈락되었다고 하는 생각이 큰 문제이다. 외국의 경우 지방마다 특성이 있는데 우리는 ‘IN SEOUL’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고질적으로 남아있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의 교회는 서울의 부교역자 출신을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현상들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일단 사람들이 서울로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지방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고 살리려고 하는 노력이 아쉽다.

▲ 총장으로서 통합 교단에 지방 신학대학들의 통합 문제 등 학교운영의 책임이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가?

당연히 무겁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 7개 신학대학의 통합문제는 그 발상 자체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것은 오직 경제논리일 뿐이다. 각 신학교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지역이 산다는 부분을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신학생이 줄어드니 학교 수를 줄이자는 것이다. 그러면 나중에는 하나만 남기고 말 것이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것은 세상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한일 신학대학의 미래에 대해 한때 미국의 선교부에서 고민을 했다고 한다. 서울의 학교가 분교를 세우는 현상을 보면서 한일도 서울로 옮겨서 크게 키워보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소외된 사람들 여성들을 위하여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설립 정신을 포기하고 경쟁력을 갖추기 위하여 서울로 간다는 것은 이념과 맞지 않는다면서 설립 정신과 이념에 따라 서울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지역에 남겠다는 결단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그러한 결단은 바보짓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경제논리에도 맞지 않는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일장신에는 이런 정신이 남아 있다고 본다. 저항정신이 중요하지만 현대는 신앙적 가치들이 물질적 풍요에 의해 묻혀가고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총회에서도 학교 규모도 작고 인원이 줄고 있지만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서 그것에 맞는 신학대학에 대한 정책을 수립해 나가야 한다. 물리적으로 합쳐야 경쟁력이 있다는 발상은 옳지 않다. 합쳐서 크기를 늘리는 것이 경쟁력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와 특성이 평생 유지되는 것이 경쟁력이다. 예수님이 제자 12명의 복음의 가치가 그들을 살게 한다. 기독교의 정신과 가치를 세상의 표준과 가치로 평가 대치시키는 오늘이 모습이 안타깝고 아프다. 고유한 가치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싸워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한일신학대학 총장으로서 학교를 어떻게 알릴 것이며 또 어떤 학교를 만들어가고 싶은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홍보함으로서 학교를 알려야 하지 않을까? 부정적인 모습보다는 적극인 태도로 우리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 나는 한일장신대학교를 통하여 행복한 섬김의 인재를 만들어 내고 싶다. 섬김은 부담스럽고 괴롭기도 한 느낌을 준다. 섬김이 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을 하더라도 행복해야 한다. 우리 학교를 ‘행복한 플랫폼’으로 만들어 가고 싶다. 행복한 총장으로 살아가고 싶다. 나에게 주어지고 해야 될 총장이라면 끌려가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행함으로서 모두 행복한 삶을 살아가겠다.

홍인식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홍인식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