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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사회의 구조적 폭력에 눈뜨다전태일과 한국기독교 인권운동 ⑵
손승호(NCCK 간사) | 승인 2020.11.17 23:44
▲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갓 취직했을 때 동료 시다, 미싱보조들과 함께. (뒷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전태일) ⓒ전태일재단

전태일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1965년 가을 평화시장 내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하면서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생활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난에 대한 문제의식은 점차 노동문제와 결합되기 시작했다. 1966년 통일사의 미싱사로 일하던 그는 이미 야간작업과 수당 등의 노동조건에 대한 ‘억울함’을 느끼고 있었다.(1) 당시 그는 본인이 재단사가 되어 약한 직공들 편에 서겠다는 개인적 수준의 해결책을 떠올렸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나가며 구조적 모순에 눈을 떠갔다.

전태일의 좌절과 바보회

1966년 10월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입사한 전태일은 이듬해 2월 재단사가 된 직후 한미사 사장의 처제와 사랑 혹은 짝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를 기준으로 볼 때, 전태일이 일기를 비롯한 다양한 글을 남긴 시기는 이때부터이다. 이 중 가장 먼저 쓰인 것은 일기이다.

앞에서 언급된 수기들은 더 이전의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쓰인 것은 1969년 이후인 것에 반해 재단사가 된 1967년 2월부터 꾸준히 일기를 썼다. 그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1967년 2월부터 3월에 이르는 시기의 일기들은 온통 ‘이금희’, ‘오금희’, ‘희’, ‘금희 누나’, ‘이모’, ‘누님’과의 사랑으로 인한 환희, 그리고 그 사랑의 이루어질 수 없음으로 인한 고통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다.

19살에 찾아온 실연으로 인해 전태일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실연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사랑을 끊기 위해 은사인 이희규 선생과 금희 누나의 중매를 서기도 하였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타락으로 이해했다.

“내 정신이 이토록 타락할 줄은 정말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젊음을 출세를 위해서 스승님에게 밀다니. … 잘한 짓인지 못한 짓인지는 나 자신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목표를 향하여 행했을 뿐이다. 출세 바로 출세다. 출세뿐이다.”(2)

“솔직히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앞날의 출세를 위해서 이 공장에서 완전한 재단사가 되기 위해, 내 스스로 절제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한참 피어나는 사랑을 찍어버린 것이다. … 부디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3)

그는 사장의 처제와의 연애가 혹시 자신의 출세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인지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2월 23일의 일기에서는 “최소한 집 한 채는 마련해야지. … 나는 지금 한미사 이 집에, 온 생애를 다 걸다시피했다. 여기서 일이 계획대로 잘 되어 나가야 한다”고 자신의 처지를 기술하였다.(4)

그는 한미사에서 돈을 벌어 이듬해 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월 20일자로 보이는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마침내 생각대로 했다. 시청 뒤 보건사회부 옆 학원사 2층에 가서 연합 중고등 통신강의록 중학 1권을 150원에 샀다. 이로써 희미해져 가는 배움의 정신을 내 마음 한 곳에 심한 타격을 줌으로써 다시 똑똑하게 그리고 단단하게 붙들어 맨 것이다. 남은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어디 있어. 해보자. 그리고 내년 3월 달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5)

그리고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는 채 실컷 울었다. 전태일은 ‘거리에서 해매며 노숙할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금희를 생각하며 “동심을 버리고 현실에 충실하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오창은은 이 시기 전태일이 중요한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였고 ‘금희와의 사랑을 스스로 철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을 ‘태일(泰一)’에서 ‘태일(泰壹)’로 바꾸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새로운 주체로 살아갈 의지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태일이 겪은 실연의 아픔은 사적인 체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한국 노동시장의 특수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전태일의 개인적 사랑의 실패는 평화시장의 독특한 생산양식으로 인한 착취구조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6)

실제로 1967년 겨울 그는 한미사에서 시다와 미싱사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이유로 해고되었고 이후 재단사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아쉽게도 1967년 4월부터 1969년 8월까지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이 시기에 어떤 일이 그에게 있었으며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지 자세한 사항을 알기는 어렵다.(7) 다만 이 기간 그는 근로기준법을 알게 되고 바보회를 조직하였고, 평화시장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작업을 진행하다 업주에게 발각되어 본인은 해고되었으며 바보회는 해체되었다. 그는 이 좌절을 겪으며 노동문제에 대한 의식을 첨예하게 갈고 닦았던 것으로 보인다.(8)

바보회 해체와 건설노동자 시절

바보회의 해체 후 그는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건설 노동자로 일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수기와 소설 초안, ‘친구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 등을 썼다.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는 인간을 짐승보다 천대하며 생존경쟁에 내몰고 있는 현실을 여러 차례 비판하고 있다.

“내가 탄 버스엔 2백 명은 탄 것 같네. 벌써부터 땀이 나고 공기가 희박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다. 뭇 짐승보다 천대를 받는 인간들. 그것도 인간이 만든 차에게 말이다. 앞에 젖소가 트럭에 실려간다. 다섯 마리를 칸막이를 해서 실었다. 우습지 원섭아.”(9)

“아무리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도 체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 아닌가. …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이 악마는 이 어린 동심에게 너무나 가혹한 매질을 하고 있네.”(10)

이 글에서 전태일은 평등에 대한 높은 수준의 인식을 보여준다. 그는 사회에 부자와 빈자를 나누는 경계가 존재하고 이 경계가 사회 전체의 일부로 받아들여져야 할 “약한 여공”과 “어린 동심”, “천대 받는 인간”을 타자화 하고 있다고 보았다. 전태일이 여기에 대해 내놓은 해법은 그 경계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었다.

▲ 재단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즈음 청옥시절 친구 재철(왼쪽)과 원섭(가운데)와 함께. ⓒ전태일재단
“나는 그 속에 뭉치기를 희망하지 않고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 버리겠네. … 특히 나는 그 덩어리를 자진해서 풀어지게, 그들의 호흡 기관 입구에서 향을 피울 걸세. 한번 냄새를 맡고부터 영원히 뭉칠 생각을 아니하는 그런 아름다운 색깔의 향을 말일세. 그렇게 되면 사회는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부스러기란 말이 존재하지 않을 걸세.”(11)

덩어리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 역시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전태일은 그런 사회를 꿈꾸며 투쟁의 방식을 치열하게 고민하였다. 1970년 초에 작성한 단상에는 자신을 투영한 것으로 보이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B-2는 기성세대 사고방식에 항의하는 내성적 휴머니스트
B-2 :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수단과 방법을 무시할 수 없다는 철저한 이념의 소유자로써 여러 가지 방법이 대두되나 만족할만한 것을 찾지 못하고 선한 목적에 선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을 외친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항상 선을 기억한다. 현 세대 사회환경 속에서 현 기성세대들의 경박관념과 후진국 공통적 경제상황이라는 무책임하고 불투명한 편견 하에 부분적으로 희생되면서도 인간의 가치를 지킬 것을 세상에 호소한다. 여기에서 현 사회는 B-2를 멸시하고 자기들의 활동 범위 내에서 제지하려고 한다. B-2는 인간으로써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몰수당한다. 끝으로 총칼을 부정한다. 신의 은총만이 현 사회를 구할 수 있다.”(12)

여기에서 기존의 질서와 사상에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저항하며 세대(사회)를 변화시키려 하는 전태일의 사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폭력이 아닌 사랑의 저항을 선택하였으며 이것이 신에게 의지하고 신의 율례와 법도를 행하는 것이라 믿었다.(13)

“다시 여려 수천 번을 자문자답하던 문제를 결단을 내린다. 정립보다는, 총칼이 되기보다는 사랑을,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인공의 한 눈을 준다. 남이 총칼로 덤빈다고 해서 같이 총칼로 대적한다는 것은 같은 인간이기에. … 인간의 힘으로, 생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세계는 지나갔다. 신을 의지하고 신의 율례와 법도를 행하는 것만이 인간이 해야 할 급선무라고 … 단일신 여호와를”(14)

구조적 폭력이 가득한 세대를 보다

좌절의 시기를 보내고 있던 그가 인식한 세대는 인간을 물질화하는 시대이며 인간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또 박탈하는 구조적 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무시무시한 세대였다. 그는 이러한 세대에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고 시정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가 아는 나의 직장, 나의 행위는 분명히 인간 본질을 해치는 하나의 비평화적, 비인간적 행위다. 하나의 인간이 하나의 인간을 비인간적인 관계로 상대함을 말한다. 아무리 피고용인이지만 고용인과 같은 가치적 동등한 인감임엔 추호의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한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할 수 없는 적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 문제이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써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15)

이 시기 그의 일기에는 자주 죽음에 대한 언급이 보이며 평화시장으로 돌아오기 직전인 1970년 8월 9일 ‘자신을 다 바칠 것’을 결단하였다고 말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16)

1970년 9월 왕성사에 재단사로 취직하면서 평화시장으로 돌아온 그는 바보회를 ‘삼동친목회’로 새롭게 조직하고 평화시장의 근로조건 실태조사 설문을 무사히 마쳤다. 이어 10월 6일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성서’를 노동청장에게 제출하였고 10월 24일에는 근로조건개선 시위를 기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11월 13일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고 분신을 감행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미주

(미주 1) 전태일 지음, 전태일기념사업회 엮음,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 1988), 74-75.
(미주 2) “67년 2월 14일 일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87.
(미주 3) “부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86.
(미주 4) “67년 2월 23일 일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04.
(미주 5) “67년 2월 30일(20일의 오기로 보임) 일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97.
(미주 6) 오창은, “민중의 자기서사와 한국 노동현실의 증언-전태일의 일기‧수기‧편지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제76집(2017.9), 129-132.
(미주 7) 물론 『전태일 평전』에는 이 시기의 전태일의 행적과 생각이 상세하게 제시되어 있다.
(미주 8) 임송자, “전태일 분신과 1970년대 노동‧학생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65호(2010), 329.
(미주 9)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친구 원섭에서 쓴 편지,”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19.
(미주 10)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친구 원섭에서 쓴 편지,”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23.
(미주 11)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친구 원섭에서 쓴 편지,”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21.
(미주 12) “내일이 오늘보다 낫도록 노력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일기 속의 단상들,”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31.
(미주 13) 임송자는 이것이 1963년 연이어 발생한 티벳 불교의 소신공양과 연결점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임송자, “전태일의 분신과 1970년대 노동‧학생운동,” 325-326.
(미주 14)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소설 초안,”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48.
(미주 15) “나는 왜 언제나 이렇게 배가 고파야 하나: 전태일 회상수기,”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35.
(미주 16) “나는 돌아가야 한다: 결단(1970.8.9.),” 전태일 지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173.

손승호(NCCK 간사)  kncc@knc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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