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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전투의 서막청산리전투를 알면 궁금증이 생긴다 ⑵
이이소 | 승인 2020.11.21 16:59
▲ 홍범도 장군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무장독립부대의 이동

일제의 압력을 받은 중국정부는 연길주둔육군 제2 혼성여단 보병 제1 대장 맹부덕에게 무장독립군부대를 토벌하라고 명령하였다. 마지못해서 토벌을 수행하는 맹부덕 부대는 자기들의 토벌은 ‘일제를 속이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독립군부대에게 요녕성과 길림성 변경오지로 가서 ‘요녕에서 토벌하면 길림으로, 길림에서 토벌하면 요녕성으로 피하는 작전’으로 대응하라고 알리고 토벌을 시작하기 전에 독립군부대에게 부대의 이동경로를 미리 통보를 하여주었다.(1)

중국 정부의 토벌이 시작되자 독립군부대들은 8월 하순부터 근거지대이동을 시작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300여 명은 1920년 8월에 의란구에서 떠나 명월구를 거쳐 안도현과 화룡현의 접경지대인 어랑촌에 도착하였다. 8월 말에 연길현 의란구 이청배에 주둔하였던 안무의 국민회군 200여 명은 맹부덕 부대의 토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안도현 방면으로 이동하여 9월말에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국민회군의 목적지였던 어랑촌 부근에는 청산리, 백운평, 십리평에 캐나다 장로교 교회들이 이미 세워져 있어서 국민회군은 그들을 통하여 군수품의 보급을 받았다. 안무는 어랑촌 부근에서 홍범도 부대와 만난 후에 팔가자진 풍산촌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풍산촌은 ‘구세동’으로 불리기도 했던 캐나다 장로회 소속 교회가 있는 마을(2)이었다.

최진동의 도독부는 왕청현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한민회, 의민단, 의군부, 신민단 등 무장 단체들이 속속 어랑촌으로 집결하였다. 10월 13일 홍범도 연합부대 출범 이후 광복단도 청산리방면으로 도착하였다.

북로군정서는 9월 9일에 사관연성소 졸업식을 마치고 12일에 교성대(여행단)와 본대를 편성한 다음 이범석을 단장으로 하는 교성대가 먼저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을 떠나 10월 12일과 13일 사이에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본대는 10월 16일에 도착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 병력은 약 600명이였다.(3)

독립군부대들의 회합과 홍범도 연합부대 편성

당시 어랑촌에 집결한 부대는 대한독립단, 국민회군, 의군단, 의민부, 신민단 등의 부대들이었다. 이들은 10월 13일 모임을 가지고 홍범도를 지휘관으로 하는 연합부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부대 병력은 대한독립군단 300여 명, 국민회군 250여 명, 한민회 200여 명, 신민단 200여 명, 의민단 100여 명, 허근이 지휘하는 의군부 300여 명(연합모임 후에 참여), 광복단 200여 명(연합모임 후에 참여) 으로 대략 1550 여 명으로 추산된다.(4)

그러나 다른 기록도 있다.

… 무산간도 류동 홍범도부대 약 300명, 안무가 거느린 국민회군 약 250명, 한민회 약 200명, 의군단 약 100명, 신민단 약 1100명, 합계 1950명(5)

또 다른 기록이 있다.

홍범도 장군의 지휘하의 독립군련합부대가 구성전후 또 의군부와 광복단도 련합부대에 합세하여 더욱 큰 력량을 이루었다. 그 병력정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대한독립군 약 300명(봉오동전투 참전, 홍범도)
군민회군(6) 약 250명(봉오동전투 참전, 캐나다장로회, 안무)
한민회군 약 200명 (이명순단장, 캐나자장로회)
의민단군 약 100명 (방우룡 단장, 천주교계))
신민단군 약 200명 (봉오동전투 참전, 김규면 단장, 기독교 성리교파)
의군부군 약 150명 (이범윤 단장 , 복고주의)
광복단군 약 200명 (이범윤단장, 복고주의, 위정척사)

7개 반일무장부대의 병력은 도합 1,400여 명이였다.(7)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선발대(여행단, 교성대)와 본대를 합하여 1000여 명에 이르렀다.(8) 북로군정서의 병력이 1,800명(9)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화룡문사자료 4집 89쪽에 의하면 이는 가족과 비전투원이 1,200여 명이고 전투원은 600여 명이라고 하였다. 김철수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463쪽도 북로군정서의 병력을 600여 명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화룡문사자료 4집95쪽에 의하면 북로군정서 제1대대는 김좌진이 거느렸으며 제2대대 600명은 이범석이 거느렸다고 한다.

10월 13일 홍범도장군은 화룡현 이도구에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의민단, 한민회와 함께 독립군부대 지휘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홍범도를 사령관으로 하여 연합부대 편성하고 일본의 습격에 군사행동을 통일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통일된 작전 지휘부를 만들고 연합작전에 대한 5개 조항을 결의를 하였다.

1) 상술한 무장단체의 군사행동을 통일한다.
2) 국민회(간도국민회)에 등록된 자들을 총 동원하고 예정된 부서에 취임할 것.
3) 군량 및 군수품 징수에 급히 착수할 것.
4) 정찰대를 조직하여 각 방면에 밀행시켜 일본군대의 동정을 탐지할 것.
5) 일본군대와의 응전은 그 허를 찌르거나 또는 산간에 유인하여 필승을 기하도록 하고
그 외는 싸우지 말 것.

10월 19일 묘령에서 홍범도 연합부대와 북로군정서 수뇌부 회의를 열었다. 북로군정서에서 현천묵, 계화, 이범석 등이 참여를 하였고 연합부대에서는 안희(안무), 이학근, 홍범도, 박영희 등이 참여를 하였다. 당시 북로군정서 사령관인 김좌진은 묘령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라월평에서 북로군정서 본대를 후방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10)

묘령회의는 청산리 전투를 이틀 앞둔 긴급회의로 일본군의 공습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였으나 북로군정서 부총재인 현천묵의 피전책이 대세가 되어 일본군 공세에 대응하지 않고 회피할 것을 결의하였다. 홍범도는 연합해서 전투에 임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북로군정서와 끝내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두 부대는 각자 일본군의 공격에 대응하여야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포위와 급속한 추격은 독립군부대들로 하여금 피전책을 버리고 전투에 임하도록 몰아갔다.

일본군의 간도출병 

토비를 동원해서 훈춘사건을 일으켜 만주 출병에의 여론을 형성한 일제는 10월 3일에 야스베부대( 보병 1개 중대, 기관총 1개 소대)를 조선의 훈융에서 훈춘으로 출동시켰다. 이어서 7일 경부터 일본군은 연변을 갑구(훈춘, 초모정자 지방), 을구(서대파, 하마탕, 백초구), 병구(용정, 국자가, 투도구) 등 3개의 토벌구역으로 나누고 조선주둔군 제19사단 제38 여단장 이소바야시가 이끄는 이소바야시지대 4,000명, 보병 제76연대장 기무라가 이끄는 기무라지대 3,000명, 제37여단장 아즈마가 이끄는 아즈마지대 5,000명을 출동시켜 두만강을 건너서 독립군의 배후 근거지가 되는 훈춘, 왕청, 용정으로 진격하였다.

일본은 3개 지대 외에 무장독립군부대의 북만에로의 탈출을 막기 위하여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는 관동군 제53연대 야스니시지대를 해림을 중심으로 한 중동철도연변에 파견하였고, 러시아 간섭군으로 시베리아에 출병한 제11사단의 히데시마 소좌가 독립군부대의 러시아 연해주행을 막기 위하여 훈춘 춘화지구로 출격하였다. 제13 사단의 하네이리대좌는 흑룍강성 동녕현 동부에서 중국과 러시아 변경을 막았으며 후에는 로흑산 부근으로 진격하였다. 제14사단 제28여단의 4,000여 명의 일본군은 훈춘과 용정으로 들어가 이소바야시지대와 아즈마지대를 강화시키고 일부는 나남으로 돌아갔다.(11)

또한 무산대안에 있는 무장독립군부대들을 견제했던 두만강변의 제19사단 제73연대의 2개 중대를 도강시켜서 무산대안 일대의 독립군을 토벌하게 만들었다. 간도각처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총영사관, 분관, 경찰서들은 무장독립군부대와 항일민족의식을 가진 마을과 학교 명단을 작성하여 일본군의 토벌과 잔학행위에 협조를 하였다.

아즈마지대의 배치

일본군이 무장독립군부대 초토화를 목적으로 하고 사면에서 포위하며 압박하는 전술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 무장독립군부대의 일부는 북간도 서부 화룡현 밀림지역, 일부는 동부 라자구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하순에 화룡현 경내의 남쪽으로 삼도구의 청산리, 북쪽으로 고동하강반의 오도양차, 동쪽으로 이도구, 서쪽으로 봉밀구에 이르는 협소한 산악지역에서 아즈마지대의 5,000명 일본군과 무장독립군부대 2,400여 명이 쫓고 쫓기게 되어 일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용정, 국자가, 두도구, 삼도구 일대의 초토화를 맡은 아즈마지대의 참전 부대는 보병연대와 기병연대, 포병, 공병, 헌병 등의 혼성부대였으며 지대장은 아즈마 소장이었다. 부대 구성은 아래와 같다.(12)

지대장 : 육군소장 아즈마 세이히꼬
보병 제37여단 사령부
보병 제37연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헌병 약간

5,000명의 정예군으로 구성된 아즈마지대는 10월 15일에 용정에 도착하여 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들은 10월 17일 북로군정서 부대 500~600명이 청산리에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와 10월 18일 홍범도연합부대가 투도구 서쪽 약 5리 정도 떨어진 산속에 있다는 정보를 접수하고 아즈마지대는 부대를 두 개로 나누어서 청산리와 어랑촌으로 출동하였다.

아즈마는 청산리 북로군정서 토벌을 야마다대좌에게 맡겼다. 야마다대좌는 자기 부대를 좌우종대로 편성하였고 좌종대는 자기가 직접 거느리고 팔가자, 삼도구(충신장), 송월평을 거쳐 20일에 청산리에 도착하였다. 우종대는 나까무라대좌가 거느리고 이도구를 지나 봉밀구로 우회하여 북로군정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좌종대와 호응하여 북로군정서부대를 포위하였다. 야마다토벌대는 북로군정서를 대처하기 위한 부대로서 8, 9백 명으로 추정된다.(13)

다른 한편 아즈마소장은 홍범도 연합부대를 토벌하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보병제37여단 사령부, 보병제74연대 제2대대, 기병제27연대 전부 그리고 야포병, 공병, 제19사단직속부대를 총 망라하여 거의 모든 병력을 총망라하였다. 아즈마소장은 총지휘부를 어랑촌에 두고 본인이 이끄는 지대예비대와 이이노대대와 가노우기병연대를 각 방면으로 출동시켜 천보산, 이도구 어구, 봉밀구 부근, 와룡, 계령 및 동남지역, 남양촌, 어랑촌, 승평령 오도양차를 샅샅이 수색하게 하여 북와록구에 있는 홍범도 연합부대를 일거에 전멸시킬 태세를 취하였다.

아즈마소장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에게 최초로 참패를 안겨준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의 연합부대인 홍범도 연합부대를 철저하게 궤멸시킬 작정이었다.

미주

(미주 1) 허송남, “청산리 전역”,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 개척』 (민족출판사, 1999), 510, 511.
(미주 2)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1), 461.
(미주 3) 김철수, 같은 책, 463.
(미주 4) 장세윤,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 홍범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167~172.
(미주 5)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1991), 173.
(미주 6) 국민회군의 다른 칭호.
(미주 7)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83; 리광인·김송죽, 『백포 서일 장군』 (연변인민출판사, 2015) 378에서는 1,000여 명 정도로 계산함.
(미주 8) 리광인·김송죽, 『백포 서일 장군』, 354, 355.
(미주 9)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88, 189.
(미주 10)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468.
(미주 11) 같은 책, 403.
(미주 12) 김택 외, 『걸출한 조선민족영웅 이름난 독립군사령관 홍범도 장군』, 184.
(미주 13) 김철수, 『연변항일 사적지 연구』, 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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