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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기 ‘전태일’들을 위한 교회노동자의 인간선언과 그 신학적 메아리 ⑶
최형묵 회장(한국민중신학회) | 승인 2020.11.22 00:51
▲ 1987년 대투쟁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이 글은 지난 11월5일 전태일 열사 항거 50주년을 맞아 한국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열린 <한국교회, 전태일을 기억하다> 심포지엄에서 천안살림교회 담임목사이자 한국민중신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형묵 회장님의 발표문입니다. 글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최형묵 회장님과 전태일재단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지속되는 노동배제체제와 유보되는 노동권(1)

자생적 근대화의 실패로 인한 식민지화, 그리고 이어진 분단과 군정 등으로 한국사회는 전반적으로 왜곡과 지체의 현상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제정된 헌법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규범을 확립하였다. 또한 한국전쟁 중 1953년에 제정된 노동법들은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을 보장한 매우 진취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헌법과 노동관계법 등을 통해 제시된 기본권 규범이 곧바로 현실적인 구속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당시 국가권력은 냉전체제하에서 반공보루국가를 형성하고자 한 미국의 절대적 지원과 식민지적 관료체제의 존속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시도의 절실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 더욱이 분단 및 전쟁과 함께 극단적인 냉전 이념지형의 형성으로 기존의 민족ㆍ민중운동의 전통이 단절되었고, 권력에 대한 저항세력은 미미하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일관되게 지속된 노동에 대한 억압적인 배제체제(2)는 바로 그와 같은 시대 배경 가운데서 배태되었다. 해방직후 산업화의 수준이 빈약하고 남북의 분단으로 산업구조가 굴절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이 건재하였다. 농민층에서 농지개혁의 요구가 제기될 즈음 노동자들은 인민정권의 수립을 목적으로 노동자 자주관리와 산업건설 협력 등을 내세우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3)

이러한 노동운동은 정부수립 이전부터 배제의 대상이 되었고, 1946년 미군정과 과도정부 및 각 사회단체의 지원으로 대한노총이 결성됨으로써 전평은 견제를 받다가 1947년 3월 총파업으로 불법화되기에 이르렀다.(4) 대한노총의 등장은 강력한 국가통제하의 노동억압체제를 예시한 것이었고, 그 노동억압체제는 이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었을 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1953년 진취적인 노동법의 제정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의 정략적 이해관계에 따라 노동정책이 좌우되었고 노동자의 권리는 지속적으로 억압받았다.

4·19혁명으로 민중들의 민주주의에의 요구가 드높았지만 5·16 군사쿠데타로 좌절되었고, 이후 경제개발계획의 시작과 함께 국민총동원체제의 형성으로 노동배제체제는 실질적인 위력을 발휘하였다.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화의 추진은 국민적 공감대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내내 지속된 문제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부족한 자원의 한계 안에서 집중과 선택을 요한 산업화과정은 산업간 불균형을 초래하여 도시는 그 성과를 누린 반면 농촌은 피폐화되어갔다.

공업위주의 산업화과정에서 저임금 도시노동자의 생계유지를 위한 저곡가정책으로 농촌의 피폐화는 가속화되었고, 이로 인해 농촌인구의 도시로의 유입으로 광범위한 노동자군이 형성됨으로써 저임금 노동 상황이 지속되는 한편 도시빈민층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도시와 농촌은 악순환 구조를 형성하였고, 결과적으로 도시 중산층 이외에 농민과 도시 노동자 및 빈민층은 심각한 생활상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산업화로 인해 전반적으로 절대 빈곤선에는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농민과 도시 노동자 및 빈곤층의 상대적 빈곤과 기회의 박탈 상황은 더욱 심화되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의 강력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경제개발의 실질적인 주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권리의 주체로서 인정되기보다는 산업화를 위한 동원 대상으로서 간주되었다. 그것은 우선 노동법의 개정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1953년 제정 노동법은 이후 계속 개악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5·16군사쿠데타 이후 일련의 노동법 개정은 경제개발을 위한 노동권의 억제와 잠정적 유보를 목적으로 하였다. 노동자의 권리를 최대한 억압하고 임금의 최소화와 장시간 노동의 법적 근거가 노동법의 개정을 통해 만들어졌던 것이다.

1961년 노동법은 한국노총을 유일한 대표기구로 만들었고 노동자의 정치참여를 막았으며 노사협의회를 의무화하여 노동조합의 기능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1963년 노동법은 근로시간의 연장과 근로기준의 하향조정을 핵심으로 하여 본격적인 산업화에 대비하였다.(5) 이와 같은 노동법의 개정은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동원’이라는 개발독재의 이념을 구현한 것이었다.(6)

그러나 한편 일련의 개정 노동법은 1953년 노동법에서 크게 후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파업권을 보장하는 등 단결법을 유지시켰다. 그 때문에 법률로 완전하게 노동자들 통제할 수 없었던 국가는 반공주의와 노사협조주의 등 이데올로기적 통제수단과 노동법 이외의 국가보안법과 집시법 등의 법적 수단, 그리고 경찰력의 동원 등 물리력을 수시로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통제하였다.

전태일 사건이 일어난 1970년은 2차 경제개발이 진척되어 고도성장기에 접어듦과 동시에 개발독재로 치닫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1969년 삼선개헌, 1971년 국가비상사태 선언 및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에 이어 1972년 유신체제로 독재체제가 완성되었다.

고도성장의 경제개발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노동문제였다.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의 노동을 강요받았고 작업장 내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분신 사건이 준 충격은 컸지만 국가의 노동정책 기조는 바뀌지 않았다. 국가의 노동정책은 오히려 경제적 고도성장 기조에 맞춰 노동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유신체제하에서 노동통제는 노동법의 개정을 동반하지 않고 1971년 12월 27일 국가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공포된 국가보위법에 의해 이뤄졌다.

국가보위법은 노동자의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의 행사는 주무관청에 미리 조정을 신청하도록 규정하고 국가경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업장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규제하기 위해 대통령이 특별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노동3권 가운데 주요 두 가지 권리를 제한하였다. 노동자들의 두 가지 핵심 권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단결권마저도 사실상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법의 시행으로 노동관계법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고, 고도성장기 내내 노동자들의 권리는 극도로 억압당하였다. 유신체제 말기 노동자들의 쟁의가 빈발하고, 그 체제가 붕괴되었을 때 쟁의가 폭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은 그 억압적 상황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1980년 신군부 집권과 함께 시작된 제5공화국 하에서 농민과 노동자 등 기층민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개발정책의 기조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물가안정을 이유로 추곡수매가가 동결되었고, 주곡의 인상억제로 복합영농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지만 수급불균형과 계속된 가격폭락으로 적자영농에 시달리는 농가가 증가하였다. 농가부채는 계속 증가하였고, 따라서 농민층의 기본적인 생활압박은 개선되지 않았다.

지속되어 온 억압적 노동배제체제는 제5공화국에 이르러 법률적ㆍ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1980년 개정 노동법은 노동조합 결성의 억제, 조합활동의 작업장 내부화, 정치활동의 결빙, 제3자개입금지 등을 골자로 함으로써 노동조합에서 정치적, 경제적 기능을 제거함과 동시에 그 기능을 복지에 한정하였다.(7) 국가강권력에 의한 노동통제 또한 지속되어, ‘사회정화’를 명분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조합원들이 폭력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또한 경제안정화정책에 따라 물가안정을 위해 임금이 억제되었고, 노동시간도 늘어났다. 그러한 억압적 상황 가운데서도 오히려 민주노조운동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운동이 조직화되고 급기야 19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폭발한 것은 한국 민주화의 특성을 형성한 매우 역설적인 현상이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 민주주의의 중대한 전환 기점이었다. 이를 계기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도화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노동권의 보장 또한 진전되었다. 1987년 노동법 개정은 노동조합 설립형태의 자유화, 설립요건의 완화, 설립신고증 교부기간의 단축, 서류의 간소화 등을 그 주요 내용으로 함으로써, 1980년 노동법 개정에서 거의 완전하게 억제되었던 노동3권을 상당부분 복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8)

민주화의 요구가 정점에 달했던 국면에서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지배체제가 해체되지 않고 지속된 까닭에 노동권의 확장이 저절로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1987년의 개정 노동법 자체 안에도 노동조합의 정치활동 금지 등 기업별 조직과 활동범위를 벗어나는 노조활동을 제약하는 억압적 조항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거니와, 이후에도 여전히 노동을 배제하는 정책들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노동권의 확장은 계속되는 숙제로 남았다. 단적으로 말해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에 대한 배제체제는 지속되었고, 노동권의 확장은 노동자들의 요구와 투쟁으로써만 확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1996년 노동법 개정과 이에 대한 반발로 이어진 노동자 총파업, 그리고 1997년 노동법의 재개정 사태는 그 상황을 단적으로 말해 주었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노동배제체제가 유지된 것은 기존의 지배체제가 여전히 지속된 데다가 자본의 지구화 현상 앞에서 경제의 전면적 개방화가 겹친 것 또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애초부터 대외의존성이 강한 한국경제는 자본의 지구화 현실이 빚어내는 문제점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운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국가와 자본의 선택은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하여 노동의 유연성을 대안으로 삼는 것이었다.

더욱이 민주화 이후 국가에 대한 자본의 우위 상황은 노동자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더하여 과거 권위주의체제하에서 강고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민중운동세력이 분화되는 양상 또한 노동자의 문제를 전 사회적인 문제로 이해하기보다는 ‘노동’문제로만 한정시켜 이해하게 만드는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노동자계급에 속하는 가계 전반의 생존 및 생활은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다.

1997년 벽두 최대의 총파업으로 국가권력과 자본의 공세에 맞섰던 노동운동은 바로 그 해 말 닥친 구제금융 사태로 위기를 맞이했고, 이후 노동자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사실상 최초의 정권교체라 할 수 있는 김대중 정부의 집권이 이뤄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표방하는 정책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지만, 구제금융 사태로 인한 경제위기 상황에서 그 방점은 시장경제의 발전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진척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시장경제의 발전은 곧 강도 높은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구현을 뜻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외국 자본의 도입 및 각종 규제 완화와 함께 기업ㆍ금융산업ㆍ공공부문ㆍ노동시장의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특히 이른바 노동의 유연화제도를 확실하게 정착시켰다. 자본은 정리해고, 명예퇴직, 외주화 등을 통하여 노동력을 축소했고, 노동현장은 소수의 핵심노동력과 다수의 비정규 노동력으로 분단되었다.(9)

그 기조는 노무현 정부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전교조와 민주노총이 합법화되었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직권중재 폐지, 손해배상 및 가압류, 공무원노동 기본권 보장 등 법 제도 개선과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공권력 자제, 일방적 민영화 철회, 노사정위원회의 강화 등이 시도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기조 아래 노사안정을 시도한 것으로(10) 노동배제체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노사정위는 오히려 노동자를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고, 전반적으로 신자유주의 파고 가운데서 자본의 권력이 강화되는 양상이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을 지나고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 이르러서는 노동배제 정책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특히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를 배경으로 경제살리기를 전면에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노골적으로 친기업정책을 펼치는 가운데 노동자들을 억압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민주화’의 부담을 덜어내 버리고(11) 노동유연화를 확대하고 노사관계의 선진화를 표방하며 노동자들을 압박하였다.

구체적으로 타임오프제도, 기업단위 복수노조제도와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 등은 노동조합의 자주적 활동을 저해하는 한편 교섭능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더불어 공공부문의 구조조정과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강행하고,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의 단체교섭 해태, 단체협약 개선명령, 단체협약 해지, 노조변경설립신고증 교부거부 등으로 노동조합을 압박하였다.(12) 한편으로 법치주의와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하고 더불어 각종 쟁의와 집회 등에 경찰력을 중심으로 한 물리력을 동원이 빈번해졌다.(13) 쌍용자동차 사태는 그 단적인 예였다. 그와 같이 노골적인 반노동정책 아래서 상시적인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외주ㆍ하청화, 비정규직의 확대로 고용불안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었다.(14)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혁’ 정책을 내세우며, 이전부터 강화되어온 신자유주의적 노동배제 정책을 더욱 선명하게 추진하였다. 그것은 비정규직 문제, 노동시간과 임금제도, 정규직 해고 제도, 산업재해 등 전반적인 노동정책과 관련되었고, 단적으로 말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극단화하고 경제 불황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을 지향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전교조와 공무원노조에 대한 법외노조 판정과 진보정당 해산까지 감행하였다. 이는 정권의 핵심부를 차지한 1970년대 개발독재체제하에서 장시간ㆍ저임금 노동체제를 지향해왔던 정치세력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법치주의의 궤도를 따르는 것이기는 했지만, 그것은 1987년 이후 확장되어 왔던 노동 기본권을 사실상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15)

2016년 말에서 2017년 초로 이어진 촛불항쟁은 새로운 노동체제를 형성하는 중요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에도 그간 강고하게 지속되어 왔던 노동배제체제로부터 노동포용체제로의 전환, 곧 ‘노동 없는 민주주의’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로의 전환이 기대되었다. 1987년과 달리 사실상 촛불항쟁을 촉발한 주역이 노동자들이었고, 항쟁과정에서도 노동의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촛불항쟁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 역시 그 기대에 부응하는 듯했다. ‘사람이 먼저다’를 내세우며 ‘노동 존중의 사회’를 만들겠다고 그 의지를 밝혔다. 일자리 정책, 차별해소와 비정규직 노동 정책, 노동기본권 및 노사관계 정책 모두 이전 정부들과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의 확대,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과 상시 지속 업무의 직접 고용 원칙, 공공 부문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특수 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최저임금 인상 등 모두 반길 만하였고, ILO 핵심 협약 비준을 통한 노조 조직률 제고, 산별교섭 등 기업단위를 넘어선 단체교섭 촉진 제도 도입, 근로감독 강화, 노동 인권 교육 의무화 역시 노동계의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었다.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한국형 사회적 대화 기구를 만들어 노동존중 사회의 기본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것도 기대되는 바였다.(16)

그러나 그 기대가 무너졌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시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뿐, 아직까지 그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의 추세로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난망해 보인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태일 사건 50주년인 지금 ‘전태일 3법’을 요구해야 하는 것이 현재 노동자들이 처해 있는 현실이다. 아직도 노동배제체제는 지속되고 있고,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다시 생각하는 노동자의 인간선언의 의미

하나의 불꽃이 되어 자신의 몸을 사르며 외친 노동자 전태일의 인간선언에 대해 당대의 신학적 반향은 놀라웠다. 바로 그 사건에서 구원사적 의미를 발견하였으니 신학적 반향으로서는 더 다다를 수 없는 최고의 수위에 이르렀다 할 것이다. 그로써 새로운 신학, 곧 민중신학이 탄생하였고 교회를 각성시켜 민중연대와 민중선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하였으니 그 영향은 한국 기독교 신학과 교회에 아로 새겨져 있다 할 것이다. 물론 노동계와 사회 전반에 대한 영향 역시 두말할 것 없다.

그 사건의 영향이 그렇게 기념비로 선명하게 새겨져 있건만 정작 그가 외친 노동자의 인간선언은 어찌하여 아직까지도 실현되지 못한 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일까?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50년 아니, 그보다 앞선 시간을 포함하여 70년에 걸친 노동배제체제를 되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강고한 노동배제체제를 역사적으로 서술한 것만으로 어째서 노동자의 인간선언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는지에 대한 답이 찾아진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역사적 현상태만을 기술한 것뿐이다. 그렇게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 해명한 것일 뿐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다시 캐물어야 한다.

노동배제체제의 기원을 자본주의 역사 일반으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자와 자본가의 모순관계 안에 있는 엄연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노동자의 인간선언 요구는 외면될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순관계 자체가 끊임없이 노동자의 인간선언 요구를 불러일으키는 현실적 기반이었다. 그 요구는 현실의 모순관계를 조정하는 가운데 노동자의 인간적 권리 곧 노동기본권을 형성하고 확장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보편적 인권, 곧 모든 인간의 기본적 권리로서 인권은 그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배제된 이들의 이의제기에 의해 그 허구성이 드러남과 동시에 실질적 내용을 확보해왔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근대의 정치적 혁명을 통해 제기된 인권은 보편성을 지니는 것으로 표방되었다.

그러나 그 허구성은 곧바로 드러났다. 예컨대 여성과 어린이, 노예 등이 배제되었고,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본격화되었을 때 노동자 역시 그 보편적 인권의 범위 밖에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흔히 자유권으로 표현되는 시민적ㆍ정치적 권리를 향유지 못했던 노동자들은 그 권리를 요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사회권으로 표현되는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요구가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노동권을 중심으로 하여 교육과 여러 사회복지의 권리 등을 수반하였다. 그와 같이 인권의 요구는 항상 특정한 정치 공동체의 성원 내지는 시민의 권리와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지는 보편적 권리로서 인권의 대립(17) 지점에서 발생하며, 배제당하고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에 대한 요구로서 인권은 현실에 존재하는 부당함을 드러내줌으로써(18)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을 시정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체제 밖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 체제 안에서 지속되어 온 현상이다.(19)

바로 그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의 인간선언의 요구가 무시된 채 강고한 노동배제체제가 자리하고 있는 현상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시민혁명을 통한 자유권의 개념이 확립된 이후 산업혁명을 통한 노동자의 부상으로 사회권 개념이 확립된 것과 달리 한국사회에서는 그 이중의 과제가 동시에 제기되었다. 간략히 말하면, 한국사회에서는 시민적ㆍ정치적 권리가 확보된 조건에서 경제적ㆍ사회적 권리 확장의 요구가 제기된 것이 아니라 그 이중의 과제가 노동자를 포함한 민중들의 요구로서 동시에 제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찍이 박형규 목사가 “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이웃사랑도 할 수 없다.”(20)고 한 것은 정치적 자유 없이 민중적 권리 보장 또한 어려운 현실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자생적 근대화의 실패 이후 식민지를 경유하여 분단체제가 형성된 조건에서 강력한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이룬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에서 비롯된다.(21)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 그리고 이와 동시적으로 성취된 급속한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그 정치적 민주화가 일상적 삶의 민주화와 기본권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못한 한국사회의 현실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나 그것이 운명적 조건은 아니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다.”(22) 우리가 역사로부터 얻는 교훈은, 불행한 과거의 유산으로 누적된 현실의 고통을 직시하는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질곡을 넘어서기 위해 분투해 왔던 기억을 되살려 오늘의 엄중한 현실을 넘어서는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와 ‘일상 민주주의’의 괴리(23)로 집약되는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일상의 민주주의를 확장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여기서 보편적 인권의 실현은 민주주의의 내적 근거이자 동시에 그 구체적 결과이기도 하다.

그 보편적 인권의 실현은 언제나 배제되고 무시당하는 사회적 약자들과 소수자의 권리를 확장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다양한 인권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그 어떤 과제이든 다른 어떤 과제로 환원될 수 없기에 그 경중을 따질 일은 아니지만, 너무도 오랜 시간 사실상 외면되어 온 노동자의 인간선언 요구를 아직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 것은 한국사회의 부끄러움이다.

특별히 전태일을 기억해 왔고 기억하고자 하는 교회들이 그 현실을 직시하여 복음을 구체화하는 과제로서 오늘의 인권선교에 나서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고귀한 형상을 부여해주었다는 진실, 마침내 하느님이 인간이 된 진실에 기초하고 있다. 그 복음의 진실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마땅히 오늘의 인권실현, 여전히 노동 현장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인간선언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다.

한 노동자의 인간선언, 곧 50년 전 전태일 사건에서 구원사적 의미를 통찰한 민중신학의 메아리는 기존의 교회들에 너무나 충격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소수의 교회들만이 그 메아리에 반응하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보편적 인권의 요구와 노동자의 기본권 요구는 오늘 세계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교회와 신학의 마땅한 과제로 여겨진지 또한 오래이다.(24) 한국교회는 그 역사 안에 인권선교의 귀중한 유산을 이어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당대의 인권 문제에 무심하다. 우리사회 구성원 절대다수가 노동자로서 일상의 삶을 영위해나가고 있는 엄연한 현실 가운데서 50년 전 한 노동자의 인간선언, 아니 ‘기독청년’ 전태일의 절규를 다시 듣고 응답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미주

(미주 1) 이하 1997년에 이르기까지 내용은 최형묵, 『한국 근대화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평가 - 산업화와 민주화의 모순관계에 주목하다』 (서울: 한울, 2015)에서 관련 내용을 발췌하여 재구성하였다.
(미주 2) 노중기,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서울: 후마니타스, 2008), 86-87 참조.
(미주 3) 박현채, “남북분단의 민족경제사적 위치”, 강만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2』(서울: 한길사, 1985), 232; 성한표, “9월총파업과 노동운동의 전환”, 강만길 외, 『해방전후사의 인식 2』, 372.
(미주 4) 김윤환, “산업화 단계의 노동문제와 노동운동,” 박현채 외, 『한국사회의 재인식 1』 (서울: 한울, 1984), 357.
(미주 5) 송호근, “한국의 노동과 인권,” 『민주주의와 인권』2/2(2002/10), 23 참조.
(미주 6) 노중기, 『한국의 노동체제와 사회적 합의』, 88.
(미주 7) 송호근, “한국의 노동과 인권”, 24 참조.
(미주 8) 송호근, “한국의 노동과 인권”, 24.
(미주 9)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울: 노동사회연구소, 2013), 353-355.
(미주 10)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355-356.
(미주 11) 노중기, 『노동체제 변동과 한국 국가의 노동정책(2003~18)』 (서울: 후마니타스, 2020), 71.
(미주 12)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401.
(미주 13) 노중기, 『노동체제 변동과 한국 국가의 노동정책(2003~18)』, 71.
(미주 14)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 402.
(미주 15) 노중기, 『노동체제 변동과 한국 국가의 노동정책(2003~18)』, 162-197 참조.
(미주 16) 노중기, 『노동체제 변동과 한국 국가의 노동정책(2003~18)』, 227, 229.
(미주 17) Slavoj Žižek, “반인권론”, 『창작과비평』132(2006/여름), 398.
(미주 18) 박기순, “근대와 인권의 정치”, 맑스코뮤날레조직위원회 엮음, 『맑스주의와 정치』 (서울: 문화과학사, 2009), 177 참조.
(미주 19) 이는 인권의 문제의식이 자본주의 체제 한계 안에 머문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제된 자들의 권리로서 인권의 제기는 그 체제의 한계를 노정함으로써 다른 가능성의 전망을 열어준다.
(미주 20) 신홍범 정리,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 박형규 회고록』 (서울: 창비, 2010), 207.
(미주 21) 이에 대한 더 충분한 설명은 최형묵, 『한국 근대화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평가』, 128-134 참조.
(미주 22)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미주 23) 김누리,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32.
(미주 24) 최형묵, 『한국 근대화에 대한 기독교윤리적 평가』, 9-96.

최형묵 회장(한국민중신학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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