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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학생운동의 맹아기KSCF 역대 총무들, 기독학생운동을 이야기 하다 ⑴
권이민수 | 승인 2020.11.25 17:05
▲ 에큐메니안이 주최한 KSCF 역대 총무 초정 간담회 참석자들. 사진 제일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사회자 고상균 목사(에큐메니안 사무총장), 차선각 목사(1974-75), 박상증 목사(1964-65), 박종렬 목사(1996-1999), 이광일 목사(1999-2004), 장병기 목사(2012-2020), 최종덕 특별위원장,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안재웅 목사(1976-1980), 정상복 목사(1980-1983). ⓒ도임방주 KSCF 사무국장

11월 23일 낮 12시 종로 5가 한국기독교회관 508호에 흔치 않은 광경이 연출되었다.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 [KSCF], 이하 KSCF)의 역대 총무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종 KSCF 사무실을 찾는 역대 총무들의 모습은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역대 총무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조금 과장 섞어 ‘사건’으로 칭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멀게는 1940대부터 활동했던 총무에서부터 가까이는 2020년까지 활동했던 역대 총무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에큐메니안’(대표 홍인식 목사)이 주최한 ‘KSCF 창립 51주년 역대 총무 초청 간담회’(이하 간담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참석한 역대 총무들은 활동했던 시기별로 박상증 목사(1964-65), 차선각 목사(1974-75), 안재웅 목사(1976-1980), 정상복 목사(1980-1983), 박종렬 목사(1996-1999), 이광일 목사(1999-2004), 장병기 목사(2012-2020) 등이었다. 이들 외에도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역대 총무들 중 갑작스런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참석하지 못해 아쉬움을 전했다는 후문도 전해들었다.

에큐메니안 초청 간담회에 앞서 KSCF 최종덕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초청식을 시작하며 역대 총무에 대한 소개와 현재 KSCF의 상황을 가볍게 나누었다. 이어 박상증 전 총무의 대표 기도가 이어졌다. 점심식사 후, 2시부터 본격적으로 한국기독교회관 1층 회의실에서 에큐메니안이 주최한 ‘에큐메니컬 기독학생운동의 역사와 미래’를 주제로 간담회가 진행되었다.

간담회는 에큐메니안 고상균 사무총장이 사회를 맡았고, 간담회를 주최한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가 이번 간담회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며 시작되었다. 간담회를 통해 역대 총무들은 저마다 KSCF 총무로 재임하던 당시의 치열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민중이 민주화를 부르짖던 60~70년대, KSCF는 역사 속에서 민중과 함께 해왔다는 사실이 역대 총무들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났다. 역대 총무들이 전해주는 생생한 역사를 들으며 참석자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또한 재미있는 에피소드에서는 다함께 왁자지껄 웃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시대 기독학생운동에 대한 의견에는 역대 총무들의 날 선 비판이 있기도 했다. 그만큼 따뜻한 격려도 이어졌다.

KSCF는 6개 교단(예장 통합, 기장, 감리교, 성공회, 구세군, 복음교회)의 학원선교를 위임받은 에큐메니컬 학원선교단체로서 2020년 올해 창립 51년을 맞았다.

간담회 내용의 분량상 세 번에 걸쳐 연재된다. 오늘은 그 첫 번째로 기독학생운동의 맹아기를 다룬 이야기를 정리했다.

고상균: 먼저 간단한 소개와 함께 역대 총무님들께서 활동하셨던 시대의 학생 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박상증 총무: 제가 학생운동에 가담했던 시기는 1940년대 당시 학생 운동이 활발한 분위기였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게 된 세대가 저희 세대죠. 저는 서울대학교 예과에 입학했었습니다. 서울대 예과는 현재 사라졌어요. 그 시기 서울대학교 분위기는 남로당계열 학생이 지배하고 있었죠. 공부는 별로 안하고 (웃음) 매일 투쟁, 동맹 휴학을 했어요. 진보적인 운동을 하려면 남로당에 가입해야 하는데,

저는 목사 아들이어서... 특히 남로당 가입조건이 삐라를 뿌려서 경찰서에 5번은 잡혀가야 가능했어요. 그러니 저는 (진보적인 운동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학생운동에 끼고 싶은데 끼기 어려워 학교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어요. 왕따처럼요.

그래서 49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때 신학을 공부했어요. 58년 한국에 돌아와서는 여러 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강의를 다녔죠. 하지만 제가 에큐메니컬을 지지하는 것이 문제였어요. 그 이유로 신학교에서 파면 당했거든요. 그래서 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가 되고 에큐메니컬 청년 운동을 하게 됐어요. 4.19 이후에 새로운 뜻을 가지고 동료와 함께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어요. 64년에 KSCM(한국기독학생회) 총무 대행도 했었어요. 이후에 KSCM의 활동을 돕기 위해 WCC(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에 위원회를 만들어 KSCM이 모금을 받도록 길도 열었고요.

장병기 총무: 저는 86년에 KSCF 학생회장을 맡았었습니다. 93년도에는 간사로 활동했고요. 2012년에는 KSCF총무가 돼서 이후 2020년 2월까지 8년간 일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13년입니다. 10월에 WCC(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10차 부산 총회가 있었죠. 그 전에 WSCF(세계기독학생회총연맹) 실행위원회가 한국에 왔었어요. 임진강 평화공원에 모여서 WCC 글로벌 리더들과 WSCF 리더, 한국 청소년들, 대학부 학생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평화와 화해를 위한 콘서트를 열었죠. 특히 그때 장기수 할아버지들도 함께 했었습니다.

그 콘서트에 참여하면서 한국 교회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이런 운동을 잘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세계의 리더들과 한국의 청소년, 청년이 같이 장기수 할아버님의 삶과 이념 다툼에 대해 알아갈 수 있어 좋았어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당시 통역이 필요해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학생을 통역인으로 세웠는데요. 그 학생이 장기수라는 단어를 몰라서 장기수를 이름으로 인식했었어요. ‘기수 장’이라고 불렀었죠. (웃음)

안재웅 총무: 1960년에 4.19를 맞이했었어요. 저는 숭실대에 입학했었습니다. 좋은 선생님들을 숭실대에서 많이 만났었어요. 덕분에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죠. 그때 저는 종로 2가의 KSCM 사무실을 열심히 들락거렸어요. 그래서 KSCM 외에도 에큐메니컬 단체 대표들을 많이 만날 기회를 얻었죠.

오재식 목사, 박상증 목사, 손명걸 목사, 강문규 목사 등, 이 네 분이 특히 제가 학생 때 기라성 같은 지도자들이었어요. 이분들이 국제 캠프도 주선하시고 해외 인사들도 만나시고 학생들을 운동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해주셨어요.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67년에 전 유학준비 중이었어요. 그런데 다음해인 68년에 수원에서 학생들이 모이는 큰 대회가 개최됐어요. 당시 유학 준비하느라 일을 안 했기 때문에 KSCC(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 인턴으로 들어갔어요. 대회를 끝내고 여러 단체는 학생 운동을 하나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게 됐어요. 그 노력의 결실로 69년 11월 23일 종로 3가에서 통합대회를 열게 됐죠.

제가 KSCC 간사가 된 것은 1968년 가을이었어요. 간사가 돼서 단체를 통합하는 실무를 했습니다. 그렇게 KSCF가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나름대로 엄청난 역사였습니다.

70년대는 KSCF로 학생운동이 통합되고 KSCF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성장한 때입니다. 70년에 한국기독교회관 건물이 생기고 KSCF는 처음으로 입주했어요. 이 건물에 대한 지분이 있어서 ‘주주’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버텨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만약 KSCF가 기독교회관이 아니라 다른 건물에 사무실을 잡았다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종로 지역 특성상 근처에 대학이 많아 좋은 친구들이 수시로 사무실에 드나들었습니다. 덕분에 좋은 지도력이 생기고 운동이 잘 굴려가는 동력이 됐죠.

독재로 인해 3선 개헌, 유신 헌법, 학도호국단이 생기고 학교 써클도 금지됐어요. 학교가 폐쇄되면 어떻게 하냐는 말이 나오게 됐죠. 그래서 학생운동은 교회 청년회 중심으로 연대하자는 흐름이 생겼어요. 그래서 학생운동이 꾸준히 될 수 있었습니다.

‘부활과 4월 혁명’이 가장 의미가 컸던 프로그램입니다. 4.19를 기념하는 모임을 KSCF가 주최했습니다. 매회 대회 때마다 훌륭한 강사들을 모셨죠. 당시 정부 당국의 방해도 거셌어요. 그 바람에 가톨릭 학생회, YWCA 등 함께 했던 단체들이 떨어져 나가게 됐죠. 나중엔 KSCF만 남았어요. 그래도 KSCF가 계속 이 대회를 열 수 있던 것은 한국기독교회관 건물의 지분이 있어 공간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던 덕분이죠.

인권강좌도 손꼽을만한 프로그램이에요. 여성과 인권, 법학과 인권, 성서와 인권 등 다양한 인권 강좌를 진행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죠. 후엔 기독교사상에 강연 내용을 담기도 했어요.

KSCF의 학사단이 빈민지역이나 공장지대에서 활동하기도 했어요. 학사단은 실제로 현장에 들어가 민중의 고뇌와 어려움을 경험하고 돌아오던 학생들이에요. KSCF의 주요 동력이 됐습니다. 또 그로 인해 한국의 기독학생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자선이 아닌 사회변혁으로 변한 것이죠. 학생운동의 통합을 계기로 마련할 수 있었어요. 사회변혁을 위해서는 참여가 필요하고, 참여를 위해서는 현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졌어요. 미국에서 사울 알린스키 목사가 와서 사람들을 훈련시켜줬습니다.

민청학련 사건에 개입되기도 했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기독학생 운동이 점점 급진적으로 변했습니다. 사회 전반에서 인정도 받고 호평도 받았어요.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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