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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길온유하고 겸손한 메시아(마태복음 21:1~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0.12.02 15:38

오늘은 대림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을 기다리며 예비하는 절기입니다. 그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을 전하는 말씀을 함께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장면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이 사건은 모든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마가 11:1~11; 누가 19:28~38; 요한 12:12~19). 복음서들은 동일한 사건을 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기 미묘한 차이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기 고유한 신학적 입장에 따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크게 보면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요한복음서 사이에 그 맥락의 차이가 두드러집니다. 공관복음서는 이 사건을 곧바로 이어지는 성전정화 사건과 연결시키는 반면 요한복음서는 바로 직전에 일어난 나사로를 살린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 밖의 미묘한 차이들이 또 있지만, 오늘은 마태복음의 본문을 따라가며 그 뜻을 새기고자 합니다.

이 사건을 전하는 모든 복음서에서 공통되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마침내 구약시대부터 전해져 온 예언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서 스가랴가 전하는 예언입니다(스가 9:9). 마태복음은 그 예언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말하여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온유하시어, 나귀를 타셨으니, 어린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다.”(마태 21:5)

마태는 바로 앞의 상황 묘사에서 약간의 오해를 하기는 했습니다. 나귀를 두 마리로 묘사한 것입니다.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고, 그 곁에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이다.”(21:2) 이것은 구약의 원문인 히브리어의 동의적 병행법, 그러니까 의미의 강조를 위하여 동일한 의미를 지닌 개념을 반복하는 수사법을 오해한 것입니다.

‘나귀, 곧 어린 나귀’를 ‘나귀와 어린 나귀’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말씀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21:9)

‘호산나’ 곧 ‘구하여 주십시오!’를 외치며 예수님을 반깁니다. 그렇게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반겼다는 것은,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본문말씀의 전반부에 나와 있는 상황 묘사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됩니다.

나귀는 미리 예비되어 있었고,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다는 말에 다른 설명 없이도 사람들은 공감합니다. 예비되어 있는 나귀를 끌고 올 때 누가 묻거든 “주님께서 쓰려고 하십니다.”라고 하면 내어 줄 것이라 했고,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겉옷을 펼쳐 길에 까는가 하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며 환영합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 거기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요?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면 일종의 퍼포먼스와 같은데, 어떤 뜻을 지닐까요? 성서에 그와 같이 예언되었고, 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전하고 있기에 너무나 당연한 풍경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에 어떤 위엄이 있었을까요? 어린 나귀를 탄 예수님의 모습은 위엄 있는 존재의 모습이 아닙니다. 결코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너무나 소박한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먼 옛날 한 때 나귀가 지체 높은 사람들이 타는 짐승으로 간주된 적이 있습니다(사사 5:10; 10:4; 12:14; 삼하 19:26).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왕이 타는 짐승은 말로 바뀌고 나귀는 보통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으로서 몫을 하였습니다(열상 10:28; 예레 17:25; 잠언 21:31). 나귀는 그 어떤 권위를 나타내거나 또는 전쟁을 수행하는 것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엄을 나타내거나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의 삶을 거드는 몫을 담당하는 짐승이었을 뿐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진정한 구원자를 상징합니다. 그 구원자는 결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결코 힘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지배하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구원을 열망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존재, 그들의 필요와 희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분입니다. 이 모습을 예언한 스가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에 쓰는 활도 꺾으려 한다. 그 왕은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할 것이며, 그의 다스림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를 것이다”(스가 9:10)

평화의 왕을 노래하는 이사야의 예언(11:1 이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만 재판하지 않으며, 귀에 들리는 대로만 판결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공의로 재판하고, 세상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바르게 논죄한다. 그가 하는 말은 몽둥이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가 내리는 선고는 사악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여매고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는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이사 11:3~9)

평화를 말하지만 사실상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는 이들은 더 많은 병거와 더 많은 군마와 더 많은 활을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병거와 군마와 활은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절망에 빠지게 할 뿐입니다. 서로를 해치고 파괴할 뿐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시고 사람들의 일상의 삶 한복판에 오시는 구원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전하고 있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Getty Image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온갖 허황된 환상으로 사람들을 기만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소망이 무엇인지 알고 그 소망을 이루어주시고자 할 뿐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람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함께 하시려고 할 뿐입니다.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체감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곧 구원을 맛보는 삶이요 천국을 사는 삶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호산나!” 외치며 환영하는 것은,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접이요 동시에 그 누구에 의해서도 짓밟히거나 뭉개질 수 없는 우리들 스스로의 삶에 대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긍정입니다. 그 누구를 부정하거나 배제해야만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는 삶을 거부하고, 모두를 감싸 안고 인정함으로써 오히려 각자 존재의 소중함을 실감하고 기쁨을 누리는 삶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환호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행보는 바로 그 뜻을 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전하는 이야기에는 두 가지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충돌의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것을 보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탄식합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요한 12:19) 결국 낡은 질서와 세계관을 대변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예수의 삶,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을 막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은 표면의 진술로만 볼 것 같으면 그와 같이 상황을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의 평범한 사람들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뜨겁게 환영하였다고 함으로써 그 대립되는 세계관의 충돌을 충분히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존의 질서와 대립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의 성격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더 많은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부와 권력에 흥미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마땅한 삶, 인간으로서 삶을 소중히 여기고 어떻게 하면 그 삶을 누릴 수 있을까 애쓰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사실 이 길은 어떤 면에서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과거의 훌륭한 성현들이 끊임없이 일깨워 준 진실입니다. 특별한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그 깨달음을 일깨워 준 데 그치지 않고, 몸소 철저하게 그 삶을 스스로 구현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성현도 그와 같이 철저하게 그 뜻을 이룬 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완전하게 그 뜻을 이뤘습니다. 놀랍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렇게 완전하게 그 길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을 보고 만나는 것을 요체로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그 길을 따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길을 보여주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저 마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조건을 바꾸는 것을 뜻하고, 그에 걸맞게 정말 새로운 각오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코로나19 시대를 맞이하여, 한편으로 우리는 그로 인한 급격한 생활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지만, 어쩌면 아직도 그 사태가 주는 의미를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백신이 빨리 개발ㆍ보급되어 위기를 돌파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절실하지만, 이 위기를 빚어낸 근본 원인과 대안은 머리로는 인식할지언정 삶 자체로는 과연 그에 따라 대응하고 있는지 새삼 스스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위기로 드러난 중요한 진실 가운데 하나는 인간사회가 존속하는 데 꼭 필요한 필수노동의 중요성, 그리고 그 핵심으로서 돌봄노동의 중요성입니다. 인간사회, 아니 더 나아가 생명의 질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돕지 않으면 존속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사회적으로 특화된 활동이 바로 돌봄노동입니다. 그것은 단지 시장가치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활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안타깝습니다.

코로나19로 국가의 행정력이 강화되고 전반적으로 그 권한이 확대되고 있지만, 그 정당성도 사실은 생명의 안전을 보장하는 한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상의 삶을 파괴하는 데까지 허용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를 든 것이지만,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른다고 고백할 때, 정말 복잡한 세계 안에서 그 뜻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오늘 우리 사회가, 오늘 세계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생명의 안위를 위하여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적 기풍과 제도를 이루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 시대에 로마사회에서 전염병이 확산될 때 그리스도인들의 감염율은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이 좋아서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돌보는 데 헌신한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고 서로 건강을 지킬 수 있도록 협력한 것이 비결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서로 충족시켜주는 삶, 그것이 믿음의 실체였습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필요에 응하는 구원자로서 가장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구현하는 것입니다. 대림절 첫 주일을 맞이하여 그 삶으로 진정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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