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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아몬의 죽음과 암-하아레츠의 혁명성이스라엘 역사 알기 ⑿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0.12.03 16:50

므낫세, 요담 시기의 국제 정세

이후 한 명씩 살펴보게 되겠지만, 「열왕기하 21장」에 나타난 남왕국의 ‘므낫세(주전 695-641년)’와 ‘아몬(주전 641-640년)’의 통치기간은 크게 어긋나 보이지 않습니다. ‘므낫세’의 경우에는 아시리아 ‘엣살핫돈’과 ‘앗수르바니팔’의 비문에 이름이 언급됩니다.

두 사람의 남왕국 왕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당시의 국제 정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면서 이집트에 관한 문제로 골치를 썩이던 때이기도 합니다. 이집트는 제25왕조가 무너지고 제26왕조가 일어설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대략적인 내용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므낫세’가 통치할 시기 아시리아는 왕이 세 번 바뀝니다. ‘산헤립(주전 705-681년)’, ‘엣살핫돈(주전 680-669년)’, ‘앗수르바니팔(주전 668-626년)’입니다. 므낫세 재위 초기에 남왕국을 비롯한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향한 아시리아의 침공은 없었습니다. 당시 ‘산헤립’은 아나톨리아, 엘람, 바벨론 등의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을 제압하느라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 기원전 700년대 고대근동의 국가들과 아시리아 ⓒhttps://visualunit.me/

위의 지도는 Mark Barry가 제작한 지도를 한글로 바꾼 것으로 개인적인 용도로는 사용가능하지만, 출판 등의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산헤립’이 다스리는 아시리아의 국력은 주전 689년경 바벨론을 함락시키며 절정에 이릅니다. 바벨론 연대기에 따르면, ‘산헤립’의 영광은 자기 아들 중 한 명의 반란으로 인해, 아들에게 살해당하며 조금은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열왕기하 19장 35-37절」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는데, 「열왕기하」는 이 사건을 ‘히스기야’ 이야기 속에 첨가하고 있어서 시기상 혼동을 주지만, ‘산헤립’이 죽은 시기는 분명히 ‘므낫세’ 통치기에 속하는 주전 681년입니다.

「열왕기하 19장 37절」에는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산헤립’을 죽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아드람멕렉’은 ‘아르다-물리시(Arda-Mulissi)’ 또는 ‘아르다-물리수(Arda-Mulissu)’로 본래 아시리아의 왕세자였습니다. 주전 694년경 왕세자였던 ‘아수르-나딘-슈미(Ashur-nadin-shumi)’가 죽자, ‘아르다-물리시’가 왕세자로 책봉됩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주전 684년경 ‘산헤립’은 그를 왕세자에서 폐위시키고 ‘엣살핫돈’을 왕세자로 책봉합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르다-물리시’가 아버지 ‘산헤립’을 살해한 것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현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소장되어 있는 ‘아르다-물리수’의 부조입니다.

▲ 아르다 물리수 ⓒ위키피디아

‘아르다-물리시’의 반란은 주전 681년에 일어났는데, 이 반란은 ‘엣살핫돈’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기 때문에 아시리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왕자의 난을 제압하고 주전 680년경 왕위에 오른 ‘엣살핫돈’은 내부 반란으로 왕이 바뀌었어도 아시리아가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합니다. 그는 주전 679년경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넘보던 이집트의 변경을 정복합니다.

당시 이집트는 쿠쉬(Kush) 왕조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구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전 747년 이집트를 점령하고 제25왕조를 세웠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집트가 무너지고 쿠쉬 왕국이 이집트 전역을 점령한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집트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왕조가 이집트를 다스린 시기를 이집트 중간기로 구분할 뿐 전체 이집트 역사의 일부로 봅니다.

이집트 제25왕조는 아시리아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과 지중해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기 위해 지속적인 침공을 시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벨론 연대기는 대략 주전 673년경에 ‘엣살핫돈’이 이집트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펼쳤지만 패배하였다고 말합니다. 패배의 기록이기 때문인지 아시리아의 기록에는 이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비슷한 시기(주전 673/2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엣살핫돈 비문(The Esarhaddon Prism)’에는 ‘엣살핫돈’이 속국의 왕들에게 명령하여 니느웨 궁전을 건축할 재료를 조달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 엣살핫돈 프리즘 ⓒ대영박물관

위의 사진은 현재 대영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엣살핫돈 비문’입니다. 대영박물관 홈페이지(www.britishmuseum.org)에서 이를 검색하면, 비문에 담긴 전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 중 남왕국에 관련된 부분만 발췌하자면 이렇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프리차드(James B. Pritchard)’가 1950년에 편집한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이후 ANET) 291페이지를 따랐으며, 번역은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314페이지를 따른 것입니다.

“나는 하티 땅과 (유프라테스) 강저편에 있는 왕들을 소집하였다. 두로의 왕 발루, 유다의 왕 므낫세, 에돔의 왕 카우슈가브리 ... 중략 ... 하티 땅과 해안지역과 섬에서 모두 22명의 왕. 나는 이들 모두를 보내, 그들로 하여금 내가 통치하고 있는 니느웨로 나의 궁전을 지을 건축자재들을 보내도록 명령하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므낫세’가 통치하던 남왕국은 주전 670년경 아시리아의 속국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엣살핫돈’은 주전 671년 또다시 이집트를 침공합니다. 이 전투에서 ‘엣살핫돈’은 이집트 멤피스를 함락하였고, 제25왕조의 파라오인 ‘타하르가(Taharqa)’에게 승리를 쟁취합니다. 다만 ‘타하르가’를 죽이진 못합니다. 하지만 멤피스를 함락한 후 ‘엣살핫돈’은 이집트 전역에 여러 명의 왕을 세워놓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이집트 제26왕조의 시조인 ‘네가우 1세(NekauⅠ)’였습니다.

참고로 「열왕기하 19장 9절」과 「이사야 37장 9절」에 구스 왕 ‘디르하가’라는 이름이 나타나는데, ‘디르하가’가 바로 ‘타하르가’입니다. 이집트 제25왕조가 쿠쉬 왕조였기 때문에 ‘타하르가’를 바로나 이집트 왕이 아닌 구스 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어쩌면 구스 왕으로 기록한 「열왕기하」와 「이사야」가 더 정확하게 표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 제25왕조가 무너진 이후에도 쿠쉬 왕조는 주후 350년까지 존속하다가 현재 에티오피아(Ethiopia)의 기원으로 여겨지는 악숨(Aksum) 왕조에 병합됩니다. 이 때문에 쿠쉬 왕조를 ‘에티오피아 왕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에티오피아는 그리스어 ‘Αἰθιοπία’에서 나온 말로, ‘검은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2년 뒤인 주전 669년 ‘엣살핫돈’은 ‘타하르가’를 치기 위해 다시 이집트 침공을 단행하는데, 이집트를 향하던 도중에 병이 들어 죽게 됩니다. ‘앗수르바니팔 비문(Ashurbanipal Cylinder)’ 또는 발굴자의 이름을 따서 ‘라삼 비문(Rassam Cylinder)’이라 불리는 비문에는 ‘앗수르바니팔’이 즉위한 이후에서 대략 주전 664년까지 벌어진 사건들이 나타납니다.

▲ 라삼 실린더 ⓒ위키피디아

위의 사진은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 중인 ‘앗수르바니팔 비문’입니다. ‘엣살핫돈’의 침공에 패배했던 ‘타하르가’는 다시 멤피스를 탈환하여 힘을 기르고 있었는데, ‘앗수르바니팔’은 이런 ‘타하르가’를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합니다. 이때 자신의 속국이었던 나라들에 군 병력과 함선을 동원하도록 명령합니다. 위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과 번역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ANET 294-5페이지와 ‘그래비’의 『고대 이스라엘 역사』 315-6페이지를 따른 것입니다.

“그는(타하르가) 나의 부친이 이집트에 세운 왕들과 총독들을 대항하였다... 나의 행군 중에 해안지역과 섬과 본토에서 22명의 왕들이... 두로의 왕 비알, 유다의 왕 므낫세... 해안지역과 섬과 본토에서 12명의 왕들, 즉 나에게 속한 종들이 나에게 엄청난 선물을 가져왔고, 내 발에 입맞춤하였다. 나는 이 왕들로 하여금 그들의 군대 병력 및 함선을 동반하도록 명령하였다.”

“후에 내가 임명한 모든 왕들이 나에게 맹세했던 서약을 깨고, 위대한 신들 앞에서 약속한 협정을 지키지 않고, 내가 그들을 관대하게 대한 것을 잊고 사악한 계략을 꾀하였다... 지속적으로 책략을 꾸민 왕들을 니느웨로 사로잡아 왔다. 그들 중에서 오직 네카우에게만 자비를 베풀어 목숨을 살려 주었다.”

「역대하 33장 10-13절」에는 ‘므낫세’가 아시리아 왕에 의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가 풀려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때로 이 사건을 위의 비문과 연결하여 ‘므낫세’가 반아시리아 동맹에 가담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좋은 해석이 아니라고 봅니다. ‘앗수르바니팔 비문’은 반역했던 이들 중 ‘네카우 1세’만을 살려주었다고 말합니다. 또 아시리아에 등을 돌린 왕들의 연합이 시리아-팔레스타인 왕들을 가리키는지, 이집트에 세워놓은 왕들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둘이 섞여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앗수르바니팔 비문’이 전체적으로 이집트 침공에 관한 내용이고,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의 왕들은 충실한 신하들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엣살핫돈’이 이집트 전역에 세워놓았던 왕들이 ‘타하르가’의 편에 서서 아시리아에 대항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역대하 33장」에 나타난 ‘므낫세’의 기록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이며, ‘므낫세’는 재위 기간 중 아시리아에 충성을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앗수르바니팔’은 ‘타하르가’와 맞서 싸워 승리를 얻었고, 아버지 ‘엣살핫돈’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전역에 왕을 세웁니다. 그 왕 중 한 사람이 ‘네카우 1세’의 아들 ‘프삼텍 1세(PsamtekⅠ)’였습니다. ‘앗수르바니팔’은 이집트에 아시리아 주둔군을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아시리아와 ‘프삼텍 1세’ 사이의 관계가 조금 애매한데, ‘프삼텍 1세’는 ‘앗수르바니팔’이 세워놓은 왕들을 제압하고 이집트 전역을 장악하여 이집트 제26왕조를 세웁니다(주전 664년). 이후 ‘앗수르바니팔’은 이집트에서 아시리아 주둔군을 철수시키는데, 이 상황이 아시리아와 ‘프삼텍 1세’의 동맹 관계 속에서 벌어진 것인지, ‘프삼텍 1세’의 독단적 행동이었는지가 모호합니다. 다만 이후 아시리아와 이집트 제26왕조 사이의 동맹이 깨지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때, ‘프삼텍 1세’의 행동은 아시리아가 뒷받침해 주었던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관계는 당시 남왕국 역사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이집트와 전쟁을 치루기 위해 아시리아 군대가 시리아-팔레스타인 지역을 지속적으로 지나다녔다는 사실은 이 지역이 아시리아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 아시리아 비문들은 ‘므낫세’가 그들의 충실한 신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국제 상황을 기억하며 ‘아몬’과 ‘므낫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몬(주전 641-640년)

‘아몬’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짧습니다. 「열왕기하 21장」에는 아홉 절, 「역대하 33장」에는 여섯 절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에 관해서는 특별한 내용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아몬’은 아버지 ‘므낫세’의 길을 따릅니다. 「열왕기하 21장 20절」은 그가 ‘악을 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하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남왕국에서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왕은 ‘요아스’와 ‘아몬’ 두 명밖에 없습니다. ‘요아스’의 경우 그를 죽인 신하들의 명단과 죽인 상황을 기록합니다(왕하12:20-21). 하지만 ‘아몬’의 경우에는 그런 구체적인 상황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역사가가 이 사건의 내용 자체에 큰 관심이 없음을 드러냅니다.

국내 학자들의 논문에 ‘아몬’에 관한 내용을 다룬 논문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다만 해외 학자 중에 아몬이 살해당한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친아시리아 세력과 반아시리아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살해당했다고 말하거나, 왕자들 사이에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일어났다거나, 우상숭배를 지켜볼 수 없었던 제사장 집단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굳이 이들의 논문을 적지 않는 이유는 이런 가설이 대부분 상상력의 산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21장」은 아몬 시해 사건에 관해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습니다. 이에 관한 외부의 자료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상황을 유추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점은 역사가가 이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판단뿐입니다.

왕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은 남왕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열왕기」가 기록하고 있는 북왕국의 역사 속에서는 왕이 살해당하고 왕위가 교체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왕상15:28-30; 16:9-13, 16-19; 왕하10:1-31; 15:10, 14, 25, 30 참고).

이들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열왕기상」에서는 혁명의 당위성이 함께 기록됩니다.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아(왕상15:30)’, ‘바아사의 모든 죄와 그의 아들 엘라의 죄 때문에(왕상16:13)’, ‘그(시므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범죄하였기 때문이니라(왕상16:19).’

하지만 「열왕기하」에 나타난 기록들에서는 이런 당위성의 문구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합’ 집안을 몰살한 ‘예후’의 경우 「열왕기하」의 많은 본문이 ‘아합’의 악행을 고발하고 있고, 「열왕기하 9장 1-13절」에 나타난 ‘엘리사’의 말이 혁명의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열왕기하 15장」에는 네 번의 혁명 기사가 나타나는데, 너무 자주 왕위가 교체되기 때문인지 짧은 내용으로만 적혀 있습니다. 그중에서 ‘므나헴’이 ‘살룸’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같은 구조의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A가 왕이 되어 몇 년을 다스렸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 B가 반역하여 A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열왕기하 15장」은 「열왕기상」에서와 같은 개별적인 죄악과 혁명의 당위성을 제공하지 않지만, 그가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표현을 남김으로 그가 왕위를 잃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듭니다. 이는 남왕국 ‘아몬’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왕기하 21장 20-22절」은 ‘아몬’이 아버지 ‘므낫세’의 죄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섬겼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그 직후 ‘아몬’은 그의 신하들에 의해 살해당합니다(왕하21:23). 여기까지의 구조를 보면 북왕국 왕들이 살해당하는 이야기의 구조와 다르지 않습니다. 역사서의 독자는 이 구조를 보면서 다윗 왕조의 멸망을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몬의 죽음과 ‘암-하아레츠’의 역할

하지만 역사가는 북왕국 혁명 기사와는 다른 한 줄을 첨가합니다. ‘암-하아레츠(עם־הארץ)’가 ‘아몬’에게 반역한 자들을 다 죽이고 그의 아들 ‘요시야’를 왕으로 세웠다는 내용입니다(왕하21:24).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웠던 반역(왕하11:4-16)에 참여했던 ‘암-하아레츠’가 다시 등장하면서, ‘아몬’ 시해 사건을 북왕국에서 일어난 혁명과는 다르게 읽도록 요구합니다.

‘암-하아레츠’에 관한 내용은 이미 다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 역사 알기(7) ‘후기 이스라엘 남북 왕국의 왕들과 그 땅의 사람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11장」에 처음 등장하고 「열왕기하 21장」에서 다시 등장한 ‘암-하아레츠’는 마치 다윗 왕조가 무너질 위기, 다윗의 계보가 아닌 사람이 왕이 된 시기에 등장하여 다시 다윗 왕조를 일으켜 세우는 집단으로 보입니다.

‘아달랴’를 몰아냈던 ‘암-하아레츠’가 그랬고, ‘아몬’을 시해한 신하들을 죽인 ‘암-하아레츠’가 그렇습니다. 또 지난번에도 다뤘지만, ‘암-하아레츠’가 세운 왕의 어머니는 남왕국 지역 출신이었습니다. 이 집단은 남왕국 정통성, 다윗 왕조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긴 집단으로 보입니다.

역사가는 ‘아몬’을 살해한 신하들이 잘못된 사람들이고 ‘암-하아레츠’는 다윗 왕조를 지켜낸 긍정적인 집단으로 표현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자면 「열왕기하 24장 14절」에 나타난 ‘암-하아레츠’도 바벨론 포로기에 다윗 왕조와 남왕국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유다 땅에 남아있던 사람들로 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생각은 자신들의 의지와 다르게 바벨론의 결정으로 인해 수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다 땅에 남아 정통성을 지켜야 할 그 집단에서 왕이 세워진 것입니다. 바로 서기관 ‘사반’의 손자 ‘그달리야’입니다. ‘그달리야’는 ‘느부갓네살’에 의해 남왕국의 왕으로 세워집니다. 「열왕기」가 그를 왕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점에서도 이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본래 「사무엘」과 「열왕기」를 적었던 역사가들이 직접 수정을 가했는지, 바벨론 포로기를 겪으며, 시드기야의 죽음을 본 새로운 역사가들이 수정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암-하아레츠’에 대한 기록은 마지막에 수정됩니다. 「열왕기하 24장 14절」의 표현대로 ‘비천한 자들’로 수정되어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몬’의 이야기는 짧게 나타나지만, 남왕국 ‘요아스’ 시절 이후에 나타난 ‘암-하아레츠’라는 집단에 대한 역사가의 평가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어떤 부분이 본래의 글이고 어떤 부분이 바벨론 포로기 때 수정된 내용인지, 또 그 이후에 수정되었는지 판단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의 기록 속에서 ‘암-하아레츠’에 대한 평가와 같이, 좋은 이미지였다가 갑자기 안 좋은 이미지로 변해버리는 집단이 있다면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여러 외세에 의해 수탈당하던 시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신앙을 전하고자 했는지 확인할 수 있고, 그런 신앙과 생각들이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또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다양한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도 더 신앙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더 풍부한 신앙을 전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열왕기」의 평가 속에서 가장 악하다고 평가되는 왕, ‘므낫세’와 그의 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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