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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에 대한 소망과 부활에 대한 오해신자들의 최후의 부활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0.12.05 17:18
▲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선취한 것이다. ⓒGetty Image

사도신경 순서로는 부활의 조항, 즉 “나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는 조항은 4권의 마지막에서 다루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칼빈은 3권의 마지막 장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강요』의 마지막 4권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외적인 수단을 다루는데, 최후의 부활은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3권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혜택에 신자들이 참여하는 것을 다루기 때문에, 그 참여의 궁극적인 결과인 최후의 부활을 3권에서 다루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

『기독교강요』제3권 제25장의 첫 문장은 2권과 3권에서 자주 들었던 내용을 환기시켜줍니다. 칼빈은 “의의 태양이신(말4:2)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통하여 빛나시며 죽음을 정복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다(딤후1:10).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으며’(요5:24), ‘이제부터…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다’”(엡2:19)라고 말합니다 (III.xxv.1).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우리를 자신의 독생자와 함께 하늘의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엡2:6).

그러나 우리는 아직 “죽음에 둘러싸인 생”(I.xvii.10)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승리에서 아무 유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현세의 고통과 괴로움에 짓눌려 살아가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던 “소망의 특성”에 대해 배운 것을 굳게 잡고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권고하면서, “복된 부활을 끊임없이 명상”하는 사람만이 땅 위의 일들에서 우리의 마음을 자유롭게 하여 복음의 유익을 완전히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III.xxv.1).

예로부터 고대 철학자들은 최고의 선(summum bonum)과 참된 행복에 대해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플라톤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것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얻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고, 또한 플라톤마저도 “그 연합의 성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연합의 거룩한 유대에 대해서 배운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세의 나그네 생활 속에서도 그 “유일하고 완전한 행복”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이 행복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갈망하도록 매일매일 우리의 마음에 소망의 불을 지펴줍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행복을 완전히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칼빈은, 바울의 교훈대로, 그 목표를 우리에게 제시하며(빌 3:8), 그 목표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바울과 같이 그 목표에 이르기까지 경주해야 한다(빌3:13)고 말합니다(III.xxv.2).

칼빈은 앞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가 언젠가 영광스러운 영생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리라는 우리 자신의 부활의 보증으로 제시하였습니다(II.xvi.13). 그리고 3권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의 최후의 부활의 원형으로 제시합니다. 그로써 인생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빛에서 볼 때, 죽음은 단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썩고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간 육체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영혼 불멸을 말한 철학자들은 많아도 육신의 부활을 인정한 사람은 참으로 적었다고 말합니다. 칼빈은 성경이 바로 이 같은 장애물을 우리가 극복할 수 있도록 두 가지 도움을 준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비교하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눈앞에 그려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서 취하신 본성으로 죽을 인간의 생애를 마치시고, 지금은 영생을 얻으셔서 우리의 장차 올 부활을 보증하신다. … 그를 우리에게서 분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III.xxv.3).

칼빈은 바울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또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고전15:16)라고 말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결코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었다고 봅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그의 견해를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은 자신의 권능을 단 한 번만 보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령의 동일한 역 사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장차 올 생명의 동반자로 삼으시기 위해 부활하셨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 와 그가 분리되는 것을 아버지께서 결코 허락하시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 에 의해 다시 일으켜졌다. … 끝으로 그는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요11:25)(III.xxv.3).

둘째,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하며 부활의 소명을 갖도록 촉구합니다.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구약과 신약의 많은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26장 19절, 시편 68편 20절, 욥기 19장 25-27절, 에스겔 37장 등입니다. 칼빈은 이 말씀들 에서 드러나는 것은 “부활의 비유”라고 봅니다. 예컨대, 유대인들이 고국에 돌아가리라는 약속을 믿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리는 놀라운 환상을 보여주셨는데(겔37장), 선지자는 이 비유로 유대인들에게 고국에 돌아갈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바로 그 소망의 근거는 부활에 있었다고 주석합니다(III.xxv.4). 이와 같이 성경은 명확히 부활을 우리의 최고의 선 또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 칼빈은 이교도들이 매장 풍습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인정한 것”은 그들이 눈앞에 항상 “부활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며, 매장을 언젠가 일어날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보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에 “종교의 씨앗”(I.iii)이 심겨졌다는 교훈과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개입하여 사람들이 매장과 함께 부활의 기억을 묻어버리게 하였고, 부활의 소망마저 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바울 시대에 사탄이 이 작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고전 15:12 이하 참고). 그리고 이어서 최후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전형적인 잘못된 견해로 이른바 천년왕국론자들의 주장을 비판합니다. 그들은 계시록 20장 1-5절이 천년 동안 지속되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르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칼빈은 계시록에 나오는 ‘천’이라는 수는(계20:4) “교회의 영원한 복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지상에서 수고하는 동안에 당할 각종 곤란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의 오류가 잘못된 성서의 해석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천 년간 지속될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르친다고 해석하나,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과 악한 자들의 벌은 끝이 없으며,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도리어 성경 전체는 선택된 자들의 복이나 악한 자들의 벌이 영원하리라고 선언(마25:41, 46)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내세의 생명의 기업을 향유하는 기간을 천 년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와 그의 나라에 얼마나 큰 비난을 던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만일 그들의 복이 유한하다면… 그리스도의 나라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게 된다(III.xxv.5).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는가

칼빈은 부활의 양식에 관하여, 성경이 허락하는 것만을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그의 견해로는, 단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들만이 다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불멸성과 몸의 부활입니다. 칼빈은 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신학자들과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는 것을 언급하며 첫 번째, 영혼의 불멸성을 간략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이 논제는 본질적으로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기독교강요』 제1권에서 말한 신학적인 주장에 근거를 둡니다. 죽음 이후에, 영혼들은 그들이 약속된 영광을 누리게 될 때인 심판의 날을 고요히 기다립니다(III.xxv.6). 여기서 칼빈은 인간이 죽은 뒤에 최후의 부활의 때까지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또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사변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그 이상을 알려고 하는 것은 미련하고 경솔한 짓이라고 경고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이 위로를 얻도록 낙원으로 영접하신다고 하였고(요12:32 참고), 한편에서는 버림받은 자들이 그 마땅히 받아야 할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말씀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이 성도들의 영이 모인 복 받은 곳을 “아브라함의 품”(눅16:22)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여정을 마친 후에 믿는 자들의 공통된 조상인 아브라함의 영접을 받으며, 그의 믿음의 결실에 우리도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넉넉히 보증하는 것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의 영혼은 세상에 서 그 어려운 싸움을 마친 후에 복된 안식에 들어가며, 거기서 약속된 영광을 온전히 누릴 때를 기다린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라고 권면합니다(III.xxv.6).

그것 말고 또 다른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부활할 때, 전혀 다른 몸을 입고 부활한다는 주장입니다. 마니교가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가 마귀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는 본질상 부정하며, 따라서 불결한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죄로 더러워진 것은 하나님의 힘으로도 깨끗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 반하여 성경은 우리가 현재 입고 있는 이 몸이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무엇보다도 명확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3)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입증됩니다. “그는 전에 입으셨던 죽을 몸을 다시 입으셨다.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한다고(고전 15:12 이하) 사도가 선포한 이 연관성을 우리는 고수해야 한다”(III.xxv.7).

칼빈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하여 본질 혹은 본체(substance)와 성질(qualité) 사이에 대한 중세 철학의 차이를 받아들였습니다. 본질은 영구적입니다. 그러나 성질은 변할 수 있습니다. 부활에 의하여, 인간의 생명은 같은 것으로 남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의 성질은 변화하였습니다.

본체로 보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나, 그 성질이 다르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 우리는 우리의 몸의 본체는 보유하겠지만 변화가 생겨서(고전15:51-52), 이 나중 상태는 훨씬 더 훌륭하리라고 한다 (III.xxv.8).(박스)

우리는 마지막이 아니라 생명의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부활, 이 절대적인 변화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고린도전서 15장을 다시 읽고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감히 믿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일어났던 그 놀라운 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독특한 은혜인 부활이 불신자들과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에게도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입니다(III.xxv.9). 칼빈은 간단히 대답합니다. “한쪽은 심판의 부활로, 또 한쪽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리라는 것”입니다(요5:29). 부활은 이렇게 불신자들과 악인 들을 그리스도의 심판대로 끌고 갑니다. “그들은 심판자에게서 완악 한 죄로 벌을 받을 것이며, 끝도 한도 없는 이 벌은 그들이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주로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원래의 목적이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구원하시려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이 복된 생명에 관해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도 칼빈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말합니다(III.xxv.9).

죽음이 승리 속에 삼켜진바 될 것이라는 예언은(사25:8; 호13:14; 고전15:54-55) 그때에 비로소 성취될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영원한 행복, 즉 부활을 목표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광채와 기쁨과 행복과 영광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우리의 지각에서 멀리 있기 때문에, 지금은 마치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합니다.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할 때,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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