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인터뷰
기노련, 노동자들의 울타리가 되고자 했다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⑴
권이민수 | 승인 2020.12.18 15:12
▲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지낸 유동우 민주인권기념관 보안관리소장. 지금은 민주인권기념관이 된 옛 남영동 대공분실 앞.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 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인물들을 찾아갔다. 민주화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 이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첫 번째로 이야기를 나눈 인물은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던 ‘유동우’ 씨다.

12월 17일 찬 기운이 감도는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을 찾았다. 민주인권기념관은 과거 ‘박종철 치사사건’으로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에 위치해 있다. 국가폭력을 상징했던 공간은 이제 수많은 민주열사들이 흘린 피와 눈물을 기억하는 공간이 됐다. 그 치열했던 현장에서 유동우 씨는 기념관추진단 및 보안관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휴관 중인 민주인권기념관 관리 사무실에서 만난 유 소장은 기노련 뿐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다양한 70~80년대의 운동사를 자세하게 풀어냈다.

▲ 독자님들께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기념관추진단’을, ‘민주인권기념관’에서 보안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유동우입니다.

▲ 기노련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선생님은 기노련 탄생과정 초기부터 함께 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활동을 하시다가 합류하게 되신 것으로 아는데요. 그 전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저는 1973년부터 노동조합(이하 노조) 활동을 했습니다. 인천 부평공단(한국수출산업 공단 제4 단지) 삼원섬유 주식회사에서 노조를 설립해서 활동했죠. 바로 ‘삼원섬유분회’였는데요. ‘분회’는 당시 한국노총 산하 노조 중 최하 단위의 노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저는 한국노총 전국섬유노동조합연맹의 경기지부, 경기지부의 삼원섬유분회의 분회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노조를 결성한지 한 8개월 만에 섬유노동조합연맹으로부터 조합원 제명을 당하고 제명 1시간 뒤에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에 대해 부당함을 이야기했더니 구속도 당했고요. 그래서 합법적인 제도권내에서 노조 활동은 8개월 밖에 못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유신시대였는데요. 수출공단 안에서는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으로 수출공단 내에서 노조를 결성한 거에요. 저희 노조가 결성되는 것을 보고 다른 회사들도 용기를 얻어서 순식간에 14개, 16개가 생겨서 퍼져 나갔어요. 그러니깐 상부조직 입장에서는 제가 공로자인 겁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렸어요. 그리고 공작에 들어갔고요. 그래서 결국 제가 한국노총에서 제명되고 해고당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 때 노동정책 기조가 ‘선 성장 후 분배’였어요. 먼저 기업을 성장시키고 노동자에게 분배하는 것은 나중에 한다는 거죠. 그러니 항상 노동자의 임금은 저임금이었어요. 먹고 살 수 있게 곡식값은 싸게 하고요. 그런 기조 속에서 노동자는 완전히 산업노예로 전락했어요. 어떤 권리 주장도 못하고, 기업주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고, 임금은 주는 대로 받고, 기업주가 때리면 맞고, 그러다가 짤리면 그냥 짤리고요. 이런 상황이 결국 전태일의 죽음으로 나타난 거죠. 그런 노동자의 참상이 일반적이었어요.

결국 노동자들이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깐 권리 주장을 하게 되죠. 그래서 저희도 노조를 설립한 것인데, 중앙정보부 입장에서는 이 기세를 꺾어야 하는 거에요. 저 같은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중앙정보부 입장에서는 노사 안정, 산업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감방을 다녀와서 다른 회사에 취직하려고 했는데 제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제대로 된 직장을 얻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제야노동운동을 했어요. 인천, 성남, 수원, 익산, 전주, 광주, 부산 등 전국 공장지대를 돌면서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노조 설립을 도왔어요. 그러다 77년에 ‘월간 개화’라고 강원용 목사님이 하시던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출간하던 잡지인데요, 거기에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코너를 맡아서 3개월간 글을 연재하게 됐어요. 어릴 때부터 기독인이었거든요. 어린 시절, 집 뒤에 있는 교회에 열심히 다녔었어요. 그 이듬해에 기도하던 글들을 묶어서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는 단행본도 나왔었고요. 그 연재가 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됐어요.

이름이 알려지자 대학교, 교회, 공장 등 여러 곳에서 불러주셔서 강의도 하게 됐고요. 덕분에 정권으로부터 계속 주목을 받았죠. 대학교 강연 요청을 받아서 가면, 경찰 몇 중대가 와서 막고 있으니까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서 절 호위해서 들어가곤 했어요. 강연 끝나면 바로 연행되고요. (웃음) 노동자의 실상을 알리려고 나름 많이 노력했어요.

그러다 79년에 유신체제가 무너졌어요. 그 지독한 유신체제가 붕괴됐으니 한국 민주주의는 대세다. 이 역사의 흐름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낙관적인 분위기가 민주화 운동가들 사이에 있었어요. 하지만 신군부가 있었죠.

그러다 YWCA위장결혼식 사건이 터졌어요. 그때 다 잡혀가고 고문을 엄청 당했죠. 계엄 상황이라 모일 수 없으니깐 결혼식으로 위장해서 민주화 운동가들이 모인건데 그만 정권에 정보가 샜어요. 저도 그 자리에 갔었는데 일이 있어 조금 늦게 갔어요. 그 바람에 잡혀가지는 않았었죠. 이 사건이 있고 전두환의 12.12반란이 터졌죠. 이런 연이은 사건들 속에서 민주화 운동가들은 다시 긴장하게 됐어요. 낙관적이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거죠. 민주화가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신군부가 목숨까지 걸고 정권을 잡는구나 목숨까지 걸었으니 유신체제보다 더 지독해질 수 있겠구나 하고 위기감이 생겼어요.

당시 노조는 한국노조 산하의 노조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우리는 노조다운 노조가 되겠다며 민주 노조를 꾸리는 곳이 몇 군데 있었어요. 많아봐야 전국적으로 20군데 정도 밖에 안 됐지만요. 그렇게 민주 노조 활동을 하면서 길러진 노동운동 지도력이 있었는데요.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으면서 공안기관 모르게 은밀히 활동했어요. 이 지도력이 모여서 ‘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이하 전민노련)을 결성했어요. 신군부 세력이 권력 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때까지 민주화 투쟁은 학생이 중심이었어요. 노동자들은 생계가 있으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고요. 그런데 학생들만으로는 정권을 뒤집어엎어도 혁명의 완성을 이루기 어렵다는 판단을 민주화 운동가들이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학생들은 선도적인 투쟁집단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노동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고 투쟁을 책임지는 집단으로 설정하게 됐어요. 여기서 노동자 세력이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일단 수가 많고, 중요한 산업을 다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한 거에요.

그래서 학생들은 전국민주학생연맹, 노동자는 전민노련, 이렇게 결성하게 된 거죠. 신군부와 싸우기 위해 전략을 그렇게 짰어요. 그런데 바로 5.18 광주 민주항쟁이 터졌죠. 서울은 계엄 상황이 되고요. 광주에 대한 소식을 계속 전해들었는데 제대로 항거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이후에 민주인사들이 붙잡혀서 고문을 많이 당했어요. 광주에서는 많은 사람이 죽었고요. 저도 붙잡혔다가 비교적 일찍 풀려났어요. 붙잡힌 24명 중에 가장 빨리 풀려났죠. 고문으로 몸이 너무 상해서 판사가 내보냈어요. 82년이었죠.

그 다음 83년에 노동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있었어요. 전두환이 (노동계) 정화조치로 노조를 다 파괴한 이후였거든요. 정화조치로 회사에서 쫓겨나고, 감옥에 가고, 삼청교육대로 끌려간 노동자들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노동자와 노동운동 지도력들이 새로운 노동운동을 하자면서 하나로 뭉친 거죠. 그게 ‘한국노동조합복지협의회’(이하 노협)이었어요. 전두환 정부는 광주민주항쟁에서 민중을 학살한 죄악이 있었다보니 그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려고 강력한 공안통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행동이 사실상 어려우니 ‘복지’라는 단어를 넣어서 유하고 부드럽게 조직을 만든 거에요.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70년대 80년대에는 노동문제가 사실 없었어요. 노동문제라고 하면 노동자와 사용자 가운데 발생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유신시대와 전두환 시대는 노사 간 문제는 공안문제로 봤어요. 노동청은 개입하지 않고 바로 공안이 끼어들었어요. 문제제기만 하면 사상검증이 들어가고 배후가 누군지 따지는 게 당시였으니까요. 그래서 노동문제가 없던 거에요.

그런 상황이라 노동자만으로는 위험하니 울타리를 만들자는 말이 나왔어요. 그래서 노협의 처음 이름은 ‘한국교회노동자복지협의회’였어요.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한 교회의 보호를 받으려고 한 거죠. 종교적 울타리가 있으면 정부가 함부로 못 건들 거든요. 그런데 사실상 저 때문에 이름이 바뀌었어요. 제가 보기에 이름에 교회가 들어가면 일반성을 가진 노동자조직이 되기 어렵거든요. 그걸 두고 김문수 전 국회의원과 당시 한창 싸웠었죠. ‘나도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다닌 신자다. 그런데 이름에 교회가 들어가면 대중조직이 되기 어렵다. 불교신자든 다른 신자든 모두가 편하게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랬더니 김문수 씨가 저보고 ‘교회로부터 가장 도움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교회를 배반한다’고 엄청 뭐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당신이 교회를 너무 얕잡아 본다’고 그랬었죠. ‘일반인들이 감히 반독재 투쟁에 나서지 못했던 70년대에 오히려 목사님과 신부님들이 투쟁에 나서고 선도했다. 그런 기독교인데 교회를 이름에 붙였다고 안 도와줄 것도 도와주고 이름에 뺏다고 도와줄 것도 안 도와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기독교를 무시하고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 의견에 동조해주는 동지가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이름이 빠지게 됐죠. 그런데 노협도 오래 가지는 못했어요.

블랙리스트 문제 때문이었는데요.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이를 두고 싸워야 한다는 의견과 조직을 보전해야 하니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피해야 한다는 의견이 맞부딪혔죠. 저는 깨지더라도 피할 수 없는 우리 문제고 전두환 정부의 부도덕성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주장했었어요. 그 과정에서 저는 노협을 나오게 됐죠.

그 이후 기노련에 합류하게 됐죠.

▲ 기노련은 어떻게 합류하시게 된 건가요?

70년대 산업선교회의 운동은 목회자, 실무자 중심이었어요. 실무자 중심의 운동을 벗어나서 노동자 중심의 운동을 만들어야 된다는 논의가 당시 있었어요. 저는 노협에서 블랙리스트 논쟁으로 그 논의에 끼지는 못했고요.(웃음) 그 논의 끝에 단체가 준비된 거죠. 그림이 그려지면서 저한테 제안이 왔어요. 기노련을 만들 건데 회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어요. 회장으로 내세울 얼굴이 필요한데 찾다보니 제가 선택됐던 거 같아요. 어차피 노협과는 갈라서게 됐고 이미 제가 70년대에 실무자 중심의 산업선교회 말고 노동자 주체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그 이야기 했다가 많이 혼나기도 했죠.(큰 웃음) 당시 가톨릭 쪽에서는 노동자 주체 운동이 이뤄지고 있었어서 가톨릭을 부러워했었거든요. 그래서 회장직을 맡게 됐죠.

▲ 회장직을 얼마나 맡으신 거죠?

85년부터 88년 상반기까지 3년 정도 맡았어요.

▲ 기노련은 현재 주요 검색 사이트에서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큼 대중에게는 아직 낯선데요, 기노련을 독자님들께 소개한다면 뭐라고 소개하시겠어요?

기독 노동자, 교회가 품고 있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독 노동자 단체입니다. 짧게 활동했지만,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성과만큼이나 이념적 혼란이 대단했던 시기에 여러 단체를 모으고 활동의 장을 열어준 단체라고도 소개하고 싶어요.

유동우 씨는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야기부터 기노련에 합류하기까지의 과정을 단순에 풀어냈다. 마스크로 표정은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빛나는 눈빛을 통해 민주화를 향한 염원이 그에게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다음 기사를 통해서는 드디어 유동우 씨가 기노련 초대회장으로 활약한 이야기들, 민주화 운동세력 내부의 갈등과 연대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의 신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유동우 씨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떻게 위로와 힘이 됐는 지를 자세히 들을 수 있을 예정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권이민수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1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