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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종교’빛을 비추는 교회(이사야 58:6-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1.03 16:10
▲ 종교 중 가자 해악이 되는 종교로 전락한 개신교. 사람들은 개신교라는 말도 사용하기 싫어 ‘그 종교’라는 말을 사용한다. 세상의 빛은커녕 해악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Getty Image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이제 2020년도 끝내고 2021년을 맞이했습니다. 보통 새해 첫 주일에는 저희 교회 표어에 관한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편집장님과 이야기해서 설교문을 안 올리곤 했습니다. 지금 확인해보니 2019년에는 저희 교회에서 전했던 말씀과 별개의 설교문을 작성해서 올렸었습니다.

올해는 저희 교회 표어이기도 하지만,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싶어서 송구영신예배 때 전했던 말씀과 새해 첫 주일에 전하는 말씀을 간추려서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2020년을 되돌아보면 역시 ‘코로나 사태’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으며, 수도권에 있는 많은 교회는 여전히 모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에서 2020년을 표현해 달라는 설문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 설문에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응모했고, 베버리힐스에 사는 9살 아이의 글이 최고의 요약문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좌우를 잘 살피고 건넜는데, 잠수함에 치인 것과 같았다.”
(Like looking both ways before crossing the street and then getting hit by a submarine.)

조심해야 할 일을 다 했음에도 말도 안 되는,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코로나 사태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급격한 시대의 변화를 만들어냈습니다.

2020년은 우리 개신교에 있어서도 충격을 안겨준 한 해였습니다. 2월 대구에서 발생한 신천지의 집단감염으로 인해 개신교계는 속으로 기뻐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참에 신천지를 뿌리 뽑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보인 개신교의 모습은 신천지와 다를 바가 없거나 오히려 그보다 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감염 예방을 위해 예배를 멈추고 공동식사를 멈춰달라는 정부와 지자체의 방침이 내려왔음에도 몰래 공동식사를 하기도 하고, 교회의 모임 예배를 지금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나마 신천지는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코로나 방역에 써달라며 100억을 내놓기도 했지만, 교회는 집합금지 명령을 어겨서 나온 벌금조차도 내지 않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초기 우리 개신교는 교회와 예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정리된 내용이 없고, 기조도 없습니다. 여전히 교회는 개교회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각자 알아서 하라는 방침을 취하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인터넷상에서 개신교는 ‘개독교’라고 욕을 먹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개독교’라는 표현도 잘 안 보입니다. 그냥 ‘그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 종교의 만행’, ‘그 종교 사고쳤다’라는 말이 있으면 전부 개신교입니다. 이젠 ‘그 종교’라고만 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쁜 종교 집단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시기에 우리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솔직히 저 역시도 저희 교회가 제일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가 어떻게 되던 저희 성도님들이 잘 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나아가다가 교회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래부터 지켜왔어야 할 중요한 말씀을 이제는 바라보고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에서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 아니라, 감춰진 등불이 아니라 세상을 짜게 만들고 세상에 빛을 비추는 성도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일을 행해야만 합니다. 개신교의 이미지가 땅바닥에 떨어진 이 시기에 우리는 제대로 빛을 비추는 성도, 제대로 맛을 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느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8장은 우리에게 선한 일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그때 우리의 빛이 새벽처럼 비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착하게 살아가는 일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우리가 행하지 못할 것을 알아서인지 이사야는 그 뒤에 이런 말씀을 덧붙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며 빛을 비추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해주실 일을 말합니다. 우리의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공의가 앞장서고 하나님께서 뒤에서 호위하신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부를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옆에 있다고 대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실천할 용기가 없는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복을 제시하고 있기에, 우리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보다 더 큰 신앙이 요구됩니다. 예수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셨던 그 삶의 자세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3장 20-21절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1장부터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자 ‘생명의 빛’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요한복음의 논리는 당시의 그리스 철학과 닮아있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추상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책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읽어갈수록 그 말씀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인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형광등 1,0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를 발산하시면서 공생애를 마치셨기에 ‘빛’이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이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빛은 어둠을 비추어 사라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어떤 사람이라도 어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둠을 갖고 있다고 하면, 어둠 자체가 뭔가 안 좋은 것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말하는 어둠은 자기 안에 있는 욕심, 악한 생각, 더러운 생각들을 감추는 장소라는 공간의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을 감추기 위해 실제 어두운 장소로 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는 ‘우리 안에 어둠을 가지고 있으며, 그곳에 악함을 감춘다’라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어둠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우리의 악함을 감추며 살아갑니다.

빛은 이런 어둠을, 어둠의 공간을 사라지게 만듭니다. 어둠의 공간이 사라져버리면 우리의 악한 마음과 생각과 잘못했던 모습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빛을 거부합니다. 빛이 자신에게 비취기를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만약 빛이신 예수님의 역할이 여기에서 끝난다면 예수님은 그저 ‘사회 고발자’일 뿐입니다. 악함을 드러내고 이 악함을 고발하는 분으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악함이 드러나게 하신 후에 그것을 회개하도록 이끄셨습니다. 회개를 촉구했다는 점까지 본다면, 예언자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예언자와 예수님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마음이 드러났다고 우리를 정죄하시며 질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안아주시고 감싸주시며 하나님의 길로 이끄셨습니다.

지금까지 감추기에 급급했던 마음을 버릴 수 있도록 도우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며 살아가도록 이끄셨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거듭남’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지난 모습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다시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아가는, 회개할 수 있는 용기가 거듭남입니다.

우리는 예언자들의 외침을 들었기 때문에 사회의 잘못된 모습을 고발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행동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고발은 고발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은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고발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를 치유하시며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 행동은 바꿔 말하면 그 사람에게 죄가 있었음을 드러내시는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가 죄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안아주셨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은 사회 고발에서 끝나는 일로 끝나지 않기에 누군가에게 죄가 있다고 다그치거나 정죄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은 인정하고 감싸주고 함께 나아가는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지만, 나 역시도 그런 마음이 있었고, 내 안에 어둠의 공간을 만들어 이런 악함을 감춰왔던 사람이기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이 악한 죄를 씻음 받고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기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항상 이런 빛을 비추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기에 당당하게 빛을 비출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내 안에 어둠이 없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에 그 빛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둠을 없애고 빛 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 어둠이 없기에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종교, 그리스도교를 다시 바라봅니다. 우리는 세상에 맛을 낼 수 있는 종교입니까?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는 종교입니까? 빛을 비추기보다 어둠을 더 키워가며 우리 자신마저도 어둠으로 가리고 있던 종교는 아닙니까?

이제 맛을 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우리를 통해서 세상살 맛난다고 말할 수 있도록 이끄는 성도가 됩시다. 이게 잘못인지도 몰랐다고 말하는 세상 사람들이 잘못을 잘못으로 깨닫게 하고, 조금이라도 모두가 함께 즐겁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성도가 됩시다.

우리가 세상의 어둠을 거두고 오직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우리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힘을 얻고 이 일을 해나가시길 기도하며 바랍니다. 이 땅에 참된 개신교가 서 나가길, 그리스도교가 서 나가길 기도합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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