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학술 칼럼
성경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교회법은 악이다교회의 권위 ⑵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1.16 15:28
▲ 교회가 만든 법은 늘 성경을 통해 점검되어야 한다. ⓒGetty Image

교회의 권위의 두 번째 부분은 법을 제정하는 권한, 즉 입법권입니다. 칼빈이 여기서 관심하는 것은 교회가 법을 제정하여 양심을 속박할 합법적 권리를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로마교회가 입법권을 행사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무수한 인간 적 전통들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워놓고 자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바탕 하지 않는 교회법은 양심의 짐일 뿐이다

물론 칼빈은 여기서 모든 교회법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교회의 질서와 권징, 그리고 화합과 일치를 위해서 교회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IV.x.1, x.27). 따라서 여기서 그가 반대하는 것은 성경 말씀과는 별도로 사람들이 제정하고 발표한 모든 명령을 “인간적 전통들”이라고 부르며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로마교회의 관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법도 성경과의 일치여부가 관건입니다. “주께서는 선한 생활을 위한 완전한 표준에 필요한 것은 모두 그의 율법에 포함시키시고, 아무것도 그 골자에 첨가하지 못하게 하셨다”(IV.x.7). 따라서 교회법은 단지 신자들의 양심에 대한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 맡길 때만 합법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는 자기들이 만든 법을 “영적”이고 영혼에 관한 것이라 말하며,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하다고 선언합니다. 또한 자기들의 법을 지킴으로써 죄의 용서와 의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서 침해를 당하고, 그가 신자들의 양심에 주신 자유는 완전히 억압과 유린을 당하게 됩니다(IV.x.1).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19장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논할 때, “양심은 인간의 모든 법에 대하여 자유롭다”(III.xix.14)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값비싼 희생을 통해서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부터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해방시켜 주신 양심을 다시 예속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양심은 자유를 얻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 없다. 양심은 한 왕이시며 해방자이신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하나의 자유의 법 즉 복음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은혜를 유지할 수 있다. 양심은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아야 하며 아무 속박도 받지 않아야 한다(IV.x.1).

그런데 가톨릭의 교회법은 양심을 노예로 만들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법을 “자유의 법, 부드러운 멍에, 가벼운 짐”이라 여기며, 자기들의 법을 결코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그 이유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만든 법과 하나님의 법을 태연히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자기의 구원의 문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이 올가미에 걸려 있는 한 도저히 그들처럼 자유를 느낄 수 없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신중히 다루었고, 어떤 경우에도 사람들을 제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고전7:35). 그것은 바울이 주께서 자유에 맡긴 문제들에 대해서 의무를 지운다면 그것이 양심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히게 될 것인가를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신자의 양심을 인간의 노예로 만드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갈5:1). 그러나 가톨릭의 입법자들은 억압적 태도로 이루다 셀 수 없는 법을 공포하고는, 이것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법이며 어기는 사람은 영원한 죽음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겁박하며 극도로 엄격하게 실시합니다(IV.x.2).

칼빈은 이 같은 잘못이 저들이 ‘외면적인 법정’과 ‘양심의 법정’을 구별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양심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지적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을 가리켜 ‘안다’(scire)라고 말합니다. scire에서 scientia(지식)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그리고 scientia에서, 분명하게, 함께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양심(conscientia)이 유래했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함께 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함께” 안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의식,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죄를 감추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죄를 고발하는 증인으로 마음에 붙어 있는 의식을 가리켜 ‘양심’이라고 한다. 양심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의 일정한 매개체이다. 왜냐하면 양심은 사람이 아는 것을 마음속에서 덮어두지 못하게 하며 그의 죄를 인정할 때까지 추궁하기 때문이다. … 이 양심은 사람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끌어가며, 사람에게 붙여 놓은 감시인과 같이 그의 모든 비밀을 감시하고 하나도 어둠 속에 숨기지 못하게 한다. 양심은 일천 명의 증인이라는 격언은 여기서 생긴 것이다(IV.x.3).

이 양심은 하나님만을 상대로 합니다. 주변에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도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을 의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무절제한 처신을 하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은 그가 그의 형제들에게 나쁜 예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 서 죄책감에 매이기 때문입니다(IV.x.4).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에 짐을 지우기 위해 정한 법이라면, 그것은 불법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면적인 법정’과 관련하여 바울의 가르침이(롬13:5)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벌을 피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위해서도 위정자들에게 복종해야 한 다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교회법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히 개개의 법률은 우리의 양심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법이나 위정자가 만든 사회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위정자의 권위를 우리에게 추천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계명은 여전히 우리에게 구속력이 있습니다.

바울이 논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임명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롬13:1). 그러나 그는 위정자들이 제정한 법이 영혼의 내면적 통치에 적용된다고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이 만든 어떤 법보다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바른 삶의 영적 규율을 도처에서 찬양합니다(IV.x.5).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선한 생활의 완전한 규정에 적합한 모든 것을 그의 율법에 포함시키시고, 아무것도 그 골자에 첨가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은 인간이 만든 법 가운데서 허용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첫째, 모든 의와 거룩함에 대한 완전한 기준은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앎으로써 선한 생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에 대하여 권위를 가지셨다는 사실이며,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만을 기다리며, 하나님께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IV.x.8). 칼빈은 바울이 새로운 짐으로 교회를 억압하려는 자들에 맞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골2:8) 첫째 논거에 의지했고, 비슷한 문제로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갈5:1-12) 둘째 논거를 더 많이 의지했다고 봅니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면, 교황제도의 교회법은 하나님의 율법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들은 그들의 교회법이 거룩하며 구원에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을 예로 들어 반박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람들의 전통을 위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파기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15:3). 요컨대, 교회가 하나님의 율법의 교훈을 인간들이 만들어낸 교회법으로 보충할 때,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양심에 대한 권한을 횡령하는 것이 됩니다. 칼빈의 견해로는, 가톨릭교회는 고해성사, 금식, 축일, 순례와 그와 같은 것들을 강제적이고 가치 있는 것들로 나타냄으로써 자주 정확히 그러한 권력의 남용을 저질렀습니다(IV.x.10).

칼빈은 사람이 정한 법에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복종하는 이 같은 법들을 하나님에게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울이 사람들의 전통에 속지 말라고(골2:4 이하) 강경하게 경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의적 숭배”(골2:22,23), 곧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사람이 고안한 종교라고 부릅니다(IV.x.24).

그런데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백성에게 지운 무거운 짐을 견디라고 하신 말씀(마23:3)을 거론하며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칼빈은 가톨릭의 교회법에 있는 유대교적 요소라고 말합니다(IV.x.13). 그리고 칼빈은 그들의 주장에 맞서 그리스도께서 다른 곳에서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신 것을 (마16:12) 언급하며 반박합니다.

마태의 설명에 의하면 ‘누룩’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에 섞어 넣는 사람들의 “교훈”입니다(IV.x.26).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교훈을 일체 멀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구절에서도(마23: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이 만든 법으로 사람의 양심에 무거운 짐을 부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교회법

우리는 앞에서 칼빈이 모든 교회법의 필요성을 부인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른 교회법을 정의합니다. 품위와 관련된 것은 예배의식에 대한 것이며, 질서에 대한 것은 권징에 대한 것입니다. 권징에 대해서는 좀 뒤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만, 여기서 이 두 가지에 관해 칼빈이 내리는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이 천거한 예절과 질서의 뜻을 더 분명히 정의하는 것이 유익하겠다. 예절의 목적은 일부분은 거룩한 것들을 향한 존경심을 증진하는 의식 들이 행해질 때, 우리가 그러한 도움들에 의해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고, 또한 일부분은 모든 존경할 만한 행위들에서 나타나야 하는 겸손과 엄숙함이 거기서 크게 빛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질서에 관해서 첫 번째 요점 은, 책임을 맡은 자들은 바르게 다스리는 규칙과 법을 아는 것이며,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권징에 순종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일이다. 둘째 점은, 질서 있게 교회를 세운 후에는 교회의 평화와 평온을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IV.x.28).

그가 여기서 말하는 예배의식에 관한 규정들은 하나님의 권위를 근거로 성경에서 이끌어낸 법들, 다시 말하면 인간이 만들기는 했으나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나왔다고 생각되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기도할 때 무릎을 꿇거나 모자를 벗는 것, 그리고 주의 성례가 집행될 때 엄숙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 합당한 예를 갖추는 것 등등입니다(IV.x.2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의의 핵심 전체와 그의 위엄 앞에 드리는 예배의 모든 국면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거룩한 말씀에 충실히 포함시키며 분명히 표현하셨지만, 예배의식에 관한 상세한 규정들은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사항들은 시대의 형편에 의존하며, 따라서 한 형식이 모든 시대에 적합하다고 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주께서 주신 일반적 규정, 즉 교회의 질서와 예절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두 가지 표준에 따라 결정하라는 것에서 우리는 피난처를 구해야 한다 고 주장합니다(IV.x.30).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이 표준에 따라 제정된 규정들에 대해서 자유로운 양심으로 순종하는 일입니다(IV.x.31).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1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