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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하나님으로부터(삼상 3:3-10; 고전 6:17-20; 요 1:35-42)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 승인 2021.01.18 16:30
▲ John Singleton Copley, 「Samuel Reading to Eli the Judgments of God Upon Eli’s House」 (1780) ⓒGetty Image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이 시간 우리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입니다. 보통의 개신교 교회는 예배 예전을 중시하지 않다 보니 주현절 혹은 공현절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성탄절보다도 주현절의 역사가 더 길고, 초대교회 당시에 지키던 기독교 3대 절기에 부활절, 오순절, 그리고 주현절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주현절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주현절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AD 4세기경부터 지켜오고 있는 주현절은 초대교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절기였습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스스로 나타내듯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인다는 뜻으로 주현, 혹은 현현이라 불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우리 피조물에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셨다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우리들에게 나타내셨다, 다른 말로 하면 계시하셨다 하는 것입니다. 바로 나사렛 사람이셨던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셨다는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와 전혀 구별된 저 하늘 위, 저 세상에 계시지 않으시고 가난하고 낮은 이 땅에 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그 분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장 크신 사랑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주현절의 의미라 하겠습니다.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이렇게 우리가 고백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가 보듯이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 사랑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제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럴 만도 합니다. 오늘날의 끔찍한 사건을 접할 때뿐만 아니라 코로나19 사태가 1년을 넘어가는 우리의 일상을 바라보면서, 또한 매스컴을 통해 날마다 주어지는 여러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하나님은 뭐하시나?’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지역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이제 총기 사고가 나지 않는 날이 언제일까 의구심마저 듭니다. 그렇게 날마다 쏘아대는 총 때문에 사람들이 다치고 죽는데 미국의 총기 규제는 요원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현실은 좋아지기는커녕 더욱 암담합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뭐하실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이렇게 목사는 자기 자신과 신자들에게 선포합니다. 형제자매들의 아픔과 고난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시고 그 다함없는 사랑을 멈추신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한 번도 멈추지 않으셨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했던 것을 이어받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생명을 주시는 창조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성도들에게 목사들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매순간마다 생명을 공급받아야 살 수 있는 피조물인 우리. 잠시라도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 우리. 하나님께서 팔짱 끼고 잠자코 지켜보시는 것 같지만 우리는 잠시도 주님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저는 신앙의 유산을 따라 여러분께 말씀을 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린 사무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나의 아이인 사무엘이 하나님께 바쳐져 이제 엘리 제사장의 문하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밤중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부르셨습니다. 너무나 어리기에 그 부르심을 깨닫지 못한 사무엘. 그러나, 이제 보호자이자 제사장이었던 엘리는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부르신 줄을 깨닫고 그에게 조언합니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렇게 어린 아이였던 사무엘에게 가르칩니다.

이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압니다. 엘리 제사장 가문은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그쳤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도대체 어떤 악행을 저질렀습니까? 아들들의 악행과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을 그 아버지 엘리는 들었습니다. 하여 아들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 도다.”

엘리의 아들들이 행한 일로 인하여 소문이 자자합니다. 사무엘상 2장 후반부를 읽어보니 아들들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더 중하게 여겼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중하게 여긴 나머지 나중에 엘리가 아들들에게 잘못한 악행으로 인하여 질책하니까 아들들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에 엘리의 아들들을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성하셨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엘리의 두 아들은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 나중에 죽임을 당하고, 하나님의 궤마저 빼앗기고 맙니다. 이어서, 제가 주목한 것은 사무엘상 3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어린 아이인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과 함께 있을 때의 일입니다. 3장 1절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영어 성경을 보니 “there were very few messages from the Lord, and visions from him were quite rare.”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가 거의 없었고, 비전도 없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후에 이어지는 2-3절 말씀을 마저 보겠습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성경은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했다고 표현했지만, 그래서 그가 자기 처소에 누었다고 표현했지만 이는 매우 중의적인 표현이지요. 이미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진 제사장, 그의 눈,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 비전이 그는 이제 없다는 표현이겠습니다. 앞을 볼 수 없으니, 제사장임에도 하나님으로부터 오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으니 이제 누울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당도하는 메시지가 희귀하다, 거의 없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종속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수없이 많은 것들 중에 하나로서의 말씀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에 대해 정치인들의 언변을 떠올립니다. 정치인으로서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없이 떠들어대는 공약과 정치적 처세술. 이는 진보와 보수 마찬가지입니다. 상원, 하원, 민주당, 공화당, 모든 정치인들이 자기가 속한 당에 충성을 맹세하고 여당이 되기 위해, 사람들의 표를 얻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계산이 깔린 언변을 늘어놓습니다. 정치적으로 선동하기도 하고 각종 노이즈 마케팅도 불사합니다. 쓰레기 같은 언론 플레이를 하고 매스컴을 이용해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그들의 말은 결코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정치 판도를 읽고 말을 바꿉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말”은 수사학의 재료일 뿐입니다. 어떻게 말이 그들의 정체성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말씀, 그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제사장 엘리인데, 그는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볼 수 없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이 눕는 거 밖에는 없다,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왜 그가 눈이 어두워진 겁니까? 당연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같은, 아니 자신보다 더 소중한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복과, 자신의 기쁨과, 평안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게 아닌 자기 아들들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노후의 안락함과 기력과 위로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 아들들에게서 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제사장입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장 가문, 그 가문의 혈통으로 세움 받았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엘리 가문에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 그치고, 이제 남은 것은 환난이요, 슬픔이요, 죽음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자녀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 스스로를 고백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입니까? 그러나, 어떻습니까? 엘리 제사장처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따르는 크리스챤이라고 스스로 여기면서도 늘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으로부터 질책당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이 질책은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으면, 내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면 하나님의 은총의 빛은 희미해집니다. 우리의 눈은 점점 희미해져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을 들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회개하는 자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고 용서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사무엘상 3장 3절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고 그 여지를 남겨두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가혹합니다. 전쟁과도 같은 전염병, 정치적 혼란, 경제적 낭패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담한 현실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의지해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돈일 수 있습니다. 돈과 재물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돈과 재물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돈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과 재물이 생명을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이에게는 자식일 수 있습니다. 자식이 전부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아들을 통해 나의 생명이 연장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녀들의 교육 중요합니다.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나의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자식에게서 모든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구하게 되면 자식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지옥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사라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주는 것은 너희 자신이 아니라 바로 나 하나님이다. 너희를 창조한 바로 나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Ex Deo”입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능력을 사용해 주옵소서.”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유의 드라마를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이런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충분히 강해져서 저를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똑똑해져서, 저의 지혜를 드리게 하옵소서. 주의 일을 하고 봉사하는데 그 누구보다 빼어난 역량으로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강하고 잘난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의 연약함 가운데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일방적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내가 잘나서, 내가 똑똑해서, 내가 노력해서, 내가 열심히 봉사하기 때문에 나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사무엘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어린 아이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이미 바로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 있다면 우리 영의 눈은 그 현실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공급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조금씩, 조금씩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 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뜬구름이 아닙니다. 날마다 실제적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누릴 수 있는 우리의 능력도 늘어납니다.

어린 사무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간 위대한 사무엘이 된 것처럼 우리의 모습도 커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행여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신앙을 진단하고 치유하여, 2021년 새해에는 새롭게 발돋움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크신 은총을 맘껏 가득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에 힘입어 간절히 축원합니다.

민기욱 목사(미국 트리니티 한인장로교회)  minics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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