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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재판권에 대한 이해와 그 한계교회의 권위 ⑶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1.23 17:31
▲ 성서의 가르침으로부터 어긋난 길을 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교회가 권징을 행하는 것은 그를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세움으로 교회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다. ⓒGetty Image

교회 권위의 셋째 부분은 질서정연한 교회의 상태를 유지, 확립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재판권’, 즉 ‘권징’에 대한 것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이 권한은 마태복음 18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열쇠의 권한에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사적인 경고를 무시하는 사람을 신자들의 이름으로 엄격하게 경고하며, 그래도 고집을 부리면서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고 신자의 공동체에서 끊어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마18:15-17). 그리고 곧바로 18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산헤드린의 재판권이 장차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이관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누가 매고 푸는가

그러나 신약성경에 매고 푸는 것에 대해 말하는 구절이 다른 두 곳에 더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16장 19절인데, 거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시고, 곧바로 그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거나 풀면 하늘에서도 승인되리라고(마16:19) 덧붙이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사도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쉰 후에(요20:2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20:23).

마태복음 16장 19절은 가톨릭교회가 로마교황의 지배권의 토대로 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이미 앞에서 매고 푼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신 요한복음 20장 23절의 말씀을 주석하며 매고 푼다는 것은 단순히 죄를 그대로 두거나 또는 용서한다는 뜻임을 해명한 바 있습니다(IV.vi.3). 여기서 그는 다시 이 말씀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렵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으며 왜곡 되지 않은 해석 즉 자연스럽고 순조롭고 명료한 해석”을 하겠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죄를 용서하거나 또는 그대로 두는데 관한 이 명령과 매고 푸는 일에 관하여 베드로에게 하신 약속은 전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만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사도들에게 복음 선포를 맡기실 때에 매고 푸는 직책도 주셨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의 노예였던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에 의해서 풀려 자유를 얻으며(롬3:24 참조), 그리스도를 해 방자와 구속자로 인정하지 않고 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영원한 사슬에(유6 참조) 매이리라는 것이 복음의 전체가 아닌가?(IV.xi.1).

그러므로 이 두 구절들에서 열쇠의 권한은 단순히 복음의 선포이며, 사람들에 관하여 그것은 권한이라기보다는 교역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권한을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주셨으며 사람들을 그 말씀의 교역자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IV.xi.1).

그러나 마태복음 18장 17-18절은 마찬가지로 매고 푸는 권한에 대해 말하지만, 16장 19절과는 약간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맡겨진 ‘출교규정’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는 출교시킨 사람에 대하여 구속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를 영원한 멸망과 절망에 던져 넣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생활과 품행을 책망하며 회개하지 않으면 유죄판결을 받으리라고 미리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풀어서, 교회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갖는 연합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판단을 완고하게 경멸하거나 신자들의 투표에 의해서 유죄판결된 것을 하찮게 여 기는 사람이 없도록, 주께서는 신자들에 의한 그러한 판단이 주님 자신의 선고를 발표하는 것에 불과하며 신자들이 지상에서 판결한 것 은 무엇이든지 하늘에서도 그대로 인정된다고 확언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패악한 사람들을 유죄판결 하며, 같은 말씀으로 회개하는 자들은 다시 성도의 교제에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IV.xi.2).

칼빈은 이렇게 이 두 구절들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이 열쇠의 권한을 남용하는 가톨릭교회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자기도취에 빠진 이 미친 사람들은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삼아서 혹은 고 해를, 혹은 출교를, 혹은 재판권을, 혹은 입법권을, 혹은 사면을 무분별하게 확립하려고 애쓴다. 참으로 첫째 구절을(마16:9) 인용해서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확립하려 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열쇠를 어느 자물쇠나 문에 마음대로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일평생 자물쇠 제조업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IV.xi.2).

교회 재판권과 권징

이어서 칼빈은 교회의 재판권의 한계를 명확히 설정합니다. 교회의 재판권은 국가와 달리 벌을 주며 강요하는 칼의 권한 즉 강제력이 없는 “영적 재판권”(IV.xi.4)입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고후10:4) 영적인 것입니다(IV.xi.10). 따라서 교회의 재판권을 행사할 때 두 가지 점을 유의해야 하는데, 이것은 고대교회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IV.xi.5). 첫째, 칼의 권리에서 완전히 분리시켜야 하며, 둘째, 한 사람의 결정이 아닌 합법적인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고전 5:4-5).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권력의 관계에 대하여 4권의 마지막 장에서 별도로 자세히 다루기 때문에, 교회의 재판권을 다루는 여기서는 세속 군주가 그 권위 로 교회의 질서를 혼란케 하는 것이 아니라 유지하고 확립하고자 한 다면, 고대교회의 감독들은 그 권위를 인정했고 그러한 개입을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말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IV.xi.16).

그리고 그는 교황 제도 하에서 교회 재판권의 남용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거론합니다. 우선 무엇보다도 단 한 사람, 감독에게 법집행의 권한을 집중시킨 것을 지적합니다. 고대 교회에서 재판권은 “한 사람 이 잡고 마음대로 행사한 것이 아니라 장로회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 제도 하에서 “공동체의 권한을 한 사람이 자기에게 옮기고 전횡의 길을 열며 교회에 속한 것을 강탈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제정하신 회의를 억압하고 해산”하는 심히 악한 비행이 저질러졌다고 비난합니다(IV.xi.6).

이어서 그는 세속적인 영역에로 확장된 교회의 권력에 대하여, 특히 교황주의자들이 교황의 지상의 권세를 주장하는 주된 근거로 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헌서가 후대에 조작된 위조문서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세속 영역에 대한 교황의 지배권이 터무니없고 사실무근한 것임을 밝힙니다(IV.xi.12). 또한 그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개인적인 문제로 국가의 재판관 앞에 서는 것을 면제해주는 특권을 교회의 재판권에 첨부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합니다. 고대의 감독들은 교회의 권리를 아주 엄격하게 선언하면서도 국가의 법에 복종하는 것을 자신들이나 교회에 손상을 입힌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IV.xi.15).

여기서 칼빈은 교회 재판권의 한계를 말하기 때문에, 군주 들이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권징을 확립하려는 목적에서 개입하는 것에 대하여 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언제나 어떠한 경우에도 군주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제시하는 분명한 원칙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5:29)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루는 4권 마지막 장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IV.xx.32).

칼빈은 이와 같이 교회 재판권의 취지, 한계 등을 명확히 하고 본격적으로 교회의 권징에 대해 논합니다. 그는 마태복음 18장 15-17절 말씀이 권징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권징의 방식들을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잘못’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야 하지만, 악행을 저지른 자는 장로회의 앞에 즉각 소환되어 다뤄져야 합니다. 형벌은 잘못의 무게에 비례합니다. 사소한 죄들은 단순한 견책을 수반하지만, 반면에 “비행으로 교회에 중대한 손상을 입힌 사람은 … 얼마 동안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금지시켜 회개의 확증을 보일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IV.xii.6). 출교 또는 성만찬에서 일시적인 배제는 부과할 수 있는 가장 엄한 제재였습니다.

이 쟁점에 관하여, 네 가지 정도를 언급할 수 있습니다. 첫째, 출교는 일시적인 조치이며, 그것의 주된 목표는 범죄자의 회개를 얻는데 있었습니다(IV.xii.8). 칼빈은 이점에서 고대의 과도한 엄격주의를 비판합니다. 둘째, 출교는 잘못을 징계하는 것이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출교당한 사람들을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살후3:15)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사적 견책과 공적 견책에서 이 온유한 태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권징은 도살행위로 타락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합니다(IV.xii.10).

셋째, 이것은 두 번째와 연결되는데, 출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저주의 ‘증거’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IV.xii.9). 네 번째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교가 교회가 부과할 수 있는 가장 엄한 제재라는 사실은 교회의 일치에 대한 칼빈의 개념에서 유래합니다. 권징은 교회의 “몸”을 함께 묶는 “근육”을 구성합니다. 그것의 주된 목적은 일치에 있습니다(IV.xii.1).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한 몸에 구성원들이 참여하는 보이는 상징이기에, 죄인을 교회의 일시적인 이방인으로 다루는 것은 교회가 부과할 수 있는 가 장 엄한 징계입니다.

그는 권징을 교회의 세 번째 표지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존립은 교회의 권징의 적용 없이는 어렵다고 판단합니다. “권징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반대해서 날뛰는 사람들을 억제하며 길들이는 굴레와 같고, 나태한 사람을 고무하는 박차와 같고, 더 중한 타락에 빠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의 유화함으로써 부드럽게 징벌하는 아버지의 매와 같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교회의 생명이라면, 권징은 몸의 구성원들을 서로 결합하고 각각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게 하는 “근육”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IV.xxii.1). 그리고 같은 곳에서 그는 권징을 시행하지 않거나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결국 교회를 해체시키는데 이바지 하게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이 말이 얼마나 예언자적이었는지는 오늘의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역자의 독신은 성경적인가

이것이 칼빈이 권징에 관해서 가르치는 주요 내용입니다. 나머지 부분에서는 금식과 사제들의 권징에 관해 가르치는데, 사제의 권징에 대한 그의 반대는 사제의 독신제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여기서는 금식에 대한 칼빈의 정의와 사제의 독신제를 반대하는 그의 입장만을 간략히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금식을 단순히 음식을 억제하며 절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여기서 일평생 지속되어야 하는 금식과 임시적인 성격의 금식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경건한 사람은 일평생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해서 될 수 있는 대로 금식에 가깝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 외에도 다른 종류의 금식이 있는데, 성격상 임시적인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루 또는 일정 기간 동안 보통 때보다 식사를 더 엄격하게 제한한다. 이런 금식은 때와 음식의 질과 적은 양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한다. 때라는 것은 금식하는 목적에 적당한 때에 금식한다는 뜻이다. 예컨대 엄숙한 기도를 위해서 금식한다면, 음식을 먹지 않고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음식의 질은, 훌륭한 것을 제거하고 소박한 보통 것으로 만족하며 맛있는 것을 입에 넣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에 대해서는, 보통 때보다 적고 가볍게 먹으라는 것이다. 필요해서 먹는 것이지 음식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IV.xii.18).

그리고 사제의 독신제에 대해서는, 그것이 명백히 성경에 위배되는 “불경건한 폭압”에 불과하다고 비판합니다(IV.xii.23). 성경은 명약관화하게 감독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딤전3:2), 결혼을 금하는 것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딤전4:1, 3)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백하게 상충되는 사제의 결혼금지 규정을 변호할 근거를 성경에서 끌어냅니다. 그들은 레위족 제사장들이 의식을 거행할 차례가 되었을 때마다 순결한 몸으로 성물을 다루기 위해 아내와 따로 자야 했다(삼상21:5 이하 참조)는 것을 예로 들면서, 그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매일 집행하는 신성한 의식 을 결혼한 사람이 집행한다는 것은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 선포와 레위족의 제사장직이 똑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보자로서 그의 완전한 순결함으로 아버지와 우리를 화해시키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예표였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모습을 죄인들은 결코 나타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윤곽이라도 드러낼 수 있도록 그들은 성소에 접근할 때 인간의 관습 이상으로 몸을 정결케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를 적절하게 상징했는데, 이는 그들이 하늘 심판대의 모형인 장막에 나타나서 백성과 하나님을 화해시키는 조정자의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목사들이 지금 이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사와 제사장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도의 말씀을 따라서 결혼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귀히 여겨야 하며 음행하는 자와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담대하게 선언합니다(히13:4). 그리고 사도들 자신들이 결혼함으로써 결혼은 아무리 훌륭하고 거룩한 직책을 맡은 사람이라도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했으며(IV.xii.25), 또한 이 사실은 자신들에게 아내들이 있고 또 데리고 다니기까지 한다는 바울의 말로도 입증이 된다(고전9:5)고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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