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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주의화 된 기독교 넘어서기탈진실 시대의 기독교의 역할
이도영 객원기자 | 승인 2021.01.26 15:31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소셜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가족들과 함께 보았다. 감시 자본주의의 문제를 다룬 영화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학자들만이 아니다. 주로 페이스북, 구글, 트위터, 유튜브 등 기라성 같은 IT업체의 중역이었던 사람들이다. 인터넷 플랫폼의 알고리즘을 만들거나 좋아요 버튼을 만드는 등 사람들이 사용시간을 늘리고 더 많이 친구를 초대하고 최대한 광고에 많이 노출되도록 하는 기술을 만든 사람들이다. 이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 영화에 직접 출연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은 이것이다. “상품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네가 바로 상품이다.” 어떤 사회학자는 인터넷 플랫폼이 인정투쟁의 장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인정투쟁을 넘어 관심투쟁을 벌이고 있다. 바로 이 관심이 상품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 지금 엄청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포노사피엔스’라고 하는 신인류인 지금의 10대들이 우울증과 불안에 사로잡혀 있고 자살률이 급상승하였다는 것이다. 관심 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존감이 무너지고 극단적인 경우는 자살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터넷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의하여 진영의 양극화가 심해진다는 데 있다. 알고리즘에 의하여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게 되며, 비슷한 생각과 정보와 사람들만이 편향적으로 모이게 된다. 서로의 생각과 목소리들 외면하며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현상이 발생한다. 서로 고립되어 “우리와 그들”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비난하고 싸우고 서로를 혐오한다.

최근 『정치적 부족주의』(부제: 집단본능은 어떻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가)라는 책을 읽었는데, 위기감을 느끼는 집단은 집단본능 때문에 ‘부족주의’로 후퇴하여 자기들끼리 똘똘 뭉치고 더 폐쇄적이고 방어적이며 징벌적이고 공격적이 되며, 모든 것을 “우리 대 그들”의 관점에서 본다고 한다. 인터넷 플랫폼이야말로 이러한 정치적 부족주의를 부추기는 강력한 도구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치적 부족주의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미 대선을 보면 알 수 있다. 선거운동 중에도 상대를 악마화 하며 충돌이 일어나고 대선이 끝났는데도 선거결과에 불복하고 심지어 선거결과를 승인하려는 의회에 난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미 의사당이 외부의 침입을 받은 것은 미국이 영국과 벌였던 ‘1812년 전쟁’ 당시인 1814년 워싱턴이 함락돼 백악관과 의사당이 불탄 지 207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취임식을 하는 날에 전직 대통령이 참석 하지 않은 것도 초유의 일이고 폭동이 일어날 걸 염려하여 2만 명의 군인을 배치하는 것도 황당한 일이다. 제3 세계도 아니고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가짜 민주주의가 온다』에서 경고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가짜 민주주의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왔다.

진영의 양극화 문제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2016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탈진실(post-truth)’을 선정했다. 그 정도로 ‘탈진실’은 시대를 읽는 핵심 키워드가 됐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통과시킬 때 이를 지지하는 진영이 수백 대의 버스에 영국이 유럽연합에 매주 3억 5,000만 유로를 지급한다는 허위 사실을 전시하며 다녔다. 허위사실이라도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으면 개의치 않았다. 한국에서는 2019년에 본격적으로 이슈가 됐다. 그래서 작년에 ‘탈-진실’ 혹은 ‘포스트-트루스’ 관련 책들을 여러 권 읽었다.

그 중 리 매킨타이어의 『포스트-트루스』라는 책이 유명한데 그 책에 의하면 진영의 양극화는 인지편향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집단정체성과 분노와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다고 한다. 사실은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믿는 것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시대가 되다니 놀랍다. 특히 매킨타이어는 소셜 미디어야말로 ‘가짜 뉴스’를 범람하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이 가짜 뉴스를 6배 빠르게 유통시킨다.

한 마디로 미치코 가쿠타니의 책 제목처럼 지금 이 시대에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키코 가쿠타니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책에서 탈진실의 시대가 된 배경을 다각도로 분석하는데 탈진실의 원인 중 하나가 지금의 문화가 ‘자아’와 주관성의 문화이기 때문이란다. ‘나르시시즘 문화’이기 때문에 오직 자기 보호와 생존의 윤리만이 중요해졌고 각 개인들은 자기 몰두, 자기만족, 관심에 대한 갈망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기적 욕망들이 정당화되고 조장되자 주관성에 반대되는 객관성이 약화되었고 사실보다는 느낌이 중요하고 진실보다는 개인적 욕망 충족이 중요해졌다. 욕망을 만족시켜준다면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기와 다툼을 서슴지 않으며 다툼에서 이기기 위해 가짜 뉴스를 생산하기도 하고 유통시키기도 한다.

‘거짓말’을 연구한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가 『거짓말 읽는 법』이라는 책에서 말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닐 때 거짓이 가능하다. 예전 같으면 거짓말을 거르거나 의심하는 것이 정상인데, 탈진실의 시대에는 자신의 감정과 신념을 강화해주고,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만족시켜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미심쩍더라도 괘의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들의 공통의 이해관계는 뭘까? 아마도 정치적 사상을 통해 정당화하고 있는 부족적 탐욕일 것이다. 개인적인 무한욕망 추구가 부족적으로 집단화되면서 극단적인 대립과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이 되었다. 참으로 지금 이 시대야말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인 것 같다.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탈진실의 시대일수록 진실과 진리의 증언자가 되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위로부터 난 지혜’로 무장해야 한다. 요즘 교회에서 야고보서 강해를 하고 있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닌 지혜의 특징을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세상적’이란 ‘구조적인 악’을 의미한다.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통제하고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구조악이다. ‘정욕적’이란 ‘내면적인 악’을 의미한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제하고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육의 힘’이다. ‘마귀적’이란 ‘영적인 힘’을 말한다. 우리 ‘위에서’ 우리를 통제하고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이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연합하여 우리를 죄에 굴복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차원을 제대로 분별하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통전적으로 사고하며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 그동안 진보적인 교회는 ‘구조적인 악’에 대한 싸움에,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내면적인 죄’에 대한 싸움에, 오순절적인 교회는 ‘영적인 악한 힘과 세력’과의 싸움에 특화되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대의 교회는 세 가지 차원 모두에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실존과 가장 밀접한 정욕의 문제를 다루고 이 시대의 구조악을 떠받치고 있는 탈진실(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과 싸워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위에서 논하였다. 기독교는 그 동안 보여 왔던 ‘종교적으로는 경건하지만 세상적으로는 탐욕스러운’ 모습을 버려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될 뿐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가치와 질서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질서를 실현하는 ‘대조사회’가 되어야 한다. 먼저 초기 교회와 같은 거룩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또한 부족주의에 사로잡힌 세상에서 어느 한 쪽 편이 되어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고 혐오와 분노를 발하는 모습을 버려야 한다. 그동안 주류 기독교는 기득권화되어 어느 한 쪽 편만 드는 부족주의의 모습을 보여 왔다. 그것을 더 유지하기 어려운 세상이 되자 반대급부로 더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심지어 탈진실의 전위대가 되어가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레트로토피아』에서 문제제기 하고 있는 것처럼 과거의 향수에 빠져 과거를 이상화하고 새로운 변화를 거부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이제는 막힌 담을 헐고 둘을 한 새사람으로 만드신 십자가의 능력으로 서로 대립하고 혐오하는 세력들을 중재하고 하나 되도록 하는 평화의 사도들이 되어야 한다. 평화로 가는 길은 따로 없다. 평화가 길이다. 생태와 정의의 세상은 오직 평화를 통해 온다. 또한 평화의 세상은 생태와 정의를 이루는 것을 통해 온다. 아무쪼록 기독교가 탈진실의 시대에 진실과 진리의 증언자가 되고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고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와 청년 세대를 아우르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이도영 객원기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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