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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안에서 두려움이 없었던 사람루터란 아우어 이사장 주대범 장로(윤인중 목사 매형)를 떠나보내며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 승인 2021.02.04 16:13
▲ 주대범 장로

우리들 친구 주대범 장로(1955-2021)가 세상 소풍을 마치고 귀천했습니다. 조금 더 놀다 가자고 가족들, 벗들이 그리 청했지만 기어코 길을 떠났습니다. 아! 그래도 폐북에 떠 돈 부고 이후에도 며칠간 우리를 위해 이생에 머물러주어 고마웠지요. 서늘한 중환자실에서 우리에게 작별할 시간을 주느라 많이 고생 많았어요. 단 이틀이었지만 그대를 맘껏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교 동창 담벼락에는 친구와 나눴던 엄청난 기억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여러 부류의 친구들에게 정말 엄청난 삶의 흔적을 남겼더군요. 우리 ‘길동무’에게도 짧게 만났으나 어느새 그리운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을 헌신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이별하고 보니 받은 것만 기억날 뿐 해준 것이 없고 살피지 못한 안타까움만 가득 합니다.

< 1 >

67세, 짧은 생애였지만 당신은 하늘 주신 재주를 갖고 누구보다 열심히,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아직도 펼쳐야 할 능력과 열정이 소진된 것 같지 않아 그것이 아쉬울 뿐이지요. 극작가인 아버지의 피를 받아 글은 그의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적을 두면서 옆 강의실 연극과 학생들의 대본을 써주며 엄청난 술을 얻어 마셨다 했습니다. 어린 중학생 시절 친구들의 특징을 포착하여 한 페이지씩 편지 형식의 글을 써주기도 하였지요. 그가 어떤 글을 써줄까를 기대하며 조바심 하던 옛 기억이 또 오릅니다. 고등학교 때는 연대 백일장에서 수필로 큰 상을 받았고 당시 대학원 학생이던 신화 같은 고교선배, 마광수에게 큰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서 서로 많이 다르지만 같기도 한 두 사람이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네요.

아버지 친구였던 작곡가 박재훈 선생에게 음악을 배웠고 그 실력으로 수많은 곡을 만들었으며 작곡 발표회도 여러 차례 가졌습니다. 루터 중앙교회에서의 성가대 지휘를 최고의 직분으로 여겼으며 최근에는 손수 기타를 제작하여 세상에 남겼습니다. 우리 길동무의 어느 목사님이 그가 제작한 첫 번째 기타를 소유하고 있으니 이후 만날 때 마다 줄을 튕기며 주 장로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만난 여인과 함께 50여년 성상동안 가정과 일터를 함께 일궜던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합니다. 서로 부족한 점을 채우며 살았던 지난 세월동안 아내는 주 장로에게 삶의 그루터기였습니다. 이름처럼 그렇게 대범하게 살았던 주 장로의 삶 밑바닥에 아내의 신뢰와 헌신이 녹아 있었던 것이지요. 아마도 그는 하늘 길 가면서 자신을 전적으로 믿어 준 아내를 생각하며 많은 눈물을 뿌렸을 것입니다.

< 2 >

주대범 장로. 그는 예사롭지 않은 신앙인이었습니다. 바리새적 기독교인을 싫어했고 세상 아픔에 둔감한 목사들과 다퉜으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는 어디든지 갔습니다. 그와 함께 세월호 광장을 오갔으며 정부가 낙인찍은 연극인들의 블랙텐트 공연에도 함께 갔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2008년 예수살기 모임에서 그가 불렀던 ‘직녀에게’란 노래가 사람들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이현주, 최완택 목사 그리고 이들의 스승 변선환을 좋아했고 이들 신앙의 폭과 높이를 배우고자 했습니다. 이는 종로서적을 통해 맺어진 인연, 책을 통해 맺어진 관계라 할 것입니다. 그는 목회하는 여러 친구들의 교회를 여럿 손수 고쳐주기도 했습니다. 지하실에서 페인트 냄새를 맡으며 일주일 이상 교회를 꾸미면서 목회를 시작할 수 있게 도왔습니다. 이후 시시때때로 그의 목공 실력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힘든 삶을 사는 지인들에게 그는 언제나 이름 없는 후견인이 되었습니다. 종종 그가 예수의 마음을 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처남 윤인중 목사와 형제지간 이상으로 뜻을 통하며 살았던 것도 제게는 감사한 일입니다. 주 장로가 그에게 아주 친한 형이 되었습니다. 이 말속에 담긴 가족사적 배경을 가늠, 상상해 봅니다. 세상을 엄히 꾸짖는 정치적 의식과 감각을 지녔기에 정치적 현안을 달리 생각하는 벗들로 인해 속상해 한 적도 많았습니다. 어느 순간 동창들 카톡 방에서 그는 ‘좌빨’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결과였지요. 하지만 자신을 삼가며 다른 이들을 이해코자 의도적으로 침묵했던 적도 많았습니다. 이점을 알기에 동창들 카톡 방에서는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대단합니다. 아시는 대로 그는 교회를 비판하면서도 교회의 참됨을 위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일했습니다.

한국 루터교 역사 속에서 앞으로 그만한 인물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루터란 아우어’ 이사장으로 세상을 떴으나 더욱 크게 기억되어야 옳습니다. 그의 충언, 고언을 수용하여 종교개혁자 루터란 이름에 걸 맞는 교회 상을 정립하는 것이 평생 루터교회를 위해 살았던 주 장로를 추모하는 방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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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았던 주대범 장로를 기억하며 저는 로마서 8장의 말씀으로 그를 송별코자 합니다. 바울과 같은 확신이 있었기에 그는 자기 이름처럼 그렇게 용감하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편이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그의 삶과 신앙은 이 말씀과 잇대어 있습니다. 평생 하늘을 자기편이라 여겼기에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고 사회와 교회의 잘못에 호통 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을 수가 있겠습니까? 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칼, 그 어떤 것도 그를 움츠려 들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사랑을 힘입어 쓰러졌으나 언제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의 삶 속에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한 시절 깊은 우울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일이 풀리지 않아 그를 절망케 한 적도 수차례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고통과 실패도 주대범 장로를 주저앉히지 못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신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용기 있게 세상과 맞서게 했으며 교회를 위해 삶을 불사르게 했습니다. 그렇기에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죽음도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일어난 것이라 믿습니다. 죽음도 삶도, 장래일도 자신을 하느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이 그가 지닌 자신감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와의 이별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 이뤄진 것이라 믿고 이후로도 더욱 곤고하게 그와 하나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살아생전 그가 품었던 꿈과 가치를 실현시킴으로 그리 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이렇듯 우리 길동무가 존재할 이유를 명백히 했습니다.

50년 지기 그의 아내와 장성한 두 자녀들 모두가 살아생전 그처럼 하느님 사랑 속에서 강건해 질 것을 기도하며 길동무의 어느 누구도 그의 삶을 잊지 않겠습니다. 친구의 ‘친(親)’자가 높은 나무(木)에 올라(立) 멀리 바라보는(見) 형상을 하고 있다지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우리를 바라 본 친구였듯이 당신도 그렇게 높은 곳에 올라 지금 우리를 살피고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우리들 친구 되었듯이 당신도 그렇게 우리를 살펴주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살아서 뿐 아니라 죽어서도 말이지요. 지난 세월 우리들 친구로 살아주어 고마웠습니다.

이정배 교수(顯藏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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