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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信學(fideology)’의 연재를 시작하며사유와 信學 1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 승인 2021.02.07 16:37
▲ 세종대를 은퇴하고 손녀, 손주들을 돌보며 사유에 정진하고 있는 이은선 교수

사유와 信學

오랫동안 생각해 온 주제이다. 이 주제 아래 성찰하며 여기서 얻어진 생각들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 가졌다. 2021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더는 이 일을 미루지 말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시 손녀가 태어났고, 그 아기의 이름을 ‘이서(理恕)’라고 하면서 더욱 그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현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고, 산모가 산후조리를 하러 가고, 남편과 나는 위의 아이들을 돌보아주어야 했으므로 3주나 뒤에나 처음으로 실질적인 글을 위해서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먼저 무슨 제목으로 이 글을 이어나갈까를 다시 한번 여러 가지로 생각했다. 이미 2018년 대학을 조기 은퇴하면서 그 퇴직의 변에 ‘사유하는 집사람’이라는 언어를 썼고, 작년 <한국信연구소>를 공적으로 개소하면서는 이제 우리의 신학(神學)은 ‘신학(信學)’, 즉 ‘믿음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언술했다. 다시 말하면 오늘 우리에게 제일 관건이 되는 것은 어떤 초월(神)의 모습에 대한 탐색보다는 도대체 우리에게 여전히 초월과 관계 맺고 싶어 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는지, 그렇다면 왜 오늘의 정황은 그렇게 믿음에 대한 말이 난무하고 종교가 넘치면서도 진정한 신뢰와 신앙을 찾아보기 힘들고, 그래서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삶의 실제를 들여다보면 매우 무신론적으로, 물질주의적으로, 이세상주의로, 자아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가 라는 질문이 컸기 때문이다. 이 믿음의 어려움과 오늘 우리 주변에 전반적으로 퍼져있는 불만과 불행, 두려움과 염려, 몹시 분주하고 욕심꾸러기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전전긍긍하면서 사이비 신앙에 쉽게 빠져들며 우리 공동체 삶의 전반에서 다툼과 갈등이 비등하는 것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좀 더 밝히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관한 서술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빠져있지 않고 그 이유와 원인을 알고 싶다는 것이고, 그래서 여러 가지로, 좀 더 학적으로 말해보면, ‘통합학문적으로’ 그 가능한 답을 찾아 나서려는 것이고, 그런 탐색의 과정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것이다. 왜 나누려고 하는가? 먼저 서구 언어로 말해보면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아모르 문디(amor mundi)’, 즉 ‘세계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의 사유 여정에서 많은 가르침을 준 20세기 여성사고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도 그녀 삶의 추구를 ‘이해(understanding)’라고 하면서 그 기본적인 추동력을 ‘세계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했다. 즉 그녀는 20세기 우주탐사의 시대에서도 이 작고 푸른 별 ‘지구(the earth)’가 우리 집이 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창했으며, 그래서 이 지구별 집의 살림을 이어갈 다음 세대의 교육은 바로 세계사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이적(不二的) 관계이고, 그러한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우리 삶의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지키는 정치를 매우 중시했다. 나는 이러한 사고에 깊이 공감하면서, 그러나 나의 세계사랑을 좀 더 신학적(神學的)으로, 동아시아적으로, 또한 여성주의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한다.

한국적 여성신학의 信學

나의 세계사랑의 첫 번째는, 우리가 추구하는 초월과 신앙과 믿음이란 결코 이 세상과 관계없는 저세상의 일이라든가, 우리 몸이나 감정, 마음과 상관없는 정신이나 영(靈)만의 일이라거나, 혹은 오늘 심각한 생태 위기의 상황에서 여러 차원에서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주의가 비판을 받더라도 지금까지 이루어온 인간 의식을 無나 惡으로 돌리는 시도와는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세계사랑은 궁극과 초월의 현현과 신적인 것의 현실과 하늘나라의 성취가 바로 ‘지금 여기’의 실제와 무관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라는 말이다.

동아시아 문명 속에서 배태된 우주관의 표현인 《易經》은 궁극(神/聖)과 초월의 모습을 ‘易(the Change)’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易을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으로 설명한 것이 있다. 즉 하늘(하느님 또는 하나님)의 일이란 낳고, 살리고, 살림하는 일이라는 것이고, 우리 인간성의 기본적인 속성이 바로 이러한 낳고 살리는 힘이며, 천지의 기초적 기운이란 죽이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능력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의 세계사랑의 일이란 바로 이 속성을 더욱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며, 오늘 우리가 온갖 죽임의 세력 앞에 떨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이처럼 우리 자신과 우주 속의 살리는 힘(生理)으로 편재해 있는 하느님을 더욱 현실성 있게 느끼게 하고, 믿게 할 수 있을까를 탐구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 ‘살리는 원리’, 즉 ‘생리(生理)’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하곡 정제두(鄭齊斗, 1649-1736)가 당시 점점 더 강고해지고 강포한 이데올로기로 화해가는 조선의 학문과 정치, 삶의 정황을 구해내기 위해서 발췌한 언어이다. 타다 남은 재나 고목처럼 죽어있고, 죽이는 이데올로기(理)가 아니라 생생하게 활기 있고, 살리고, 창조하는 정신의 원리(生理)야말로 우리와 우주의 참된 본질(性)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나는 이 언어를 매우 좋게 여기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 오늘날 이 언어(생리)가 여성들 몸의 매달의 달거리(月經, menstruation)를 표현하는 말로도 쓰이는 것에 주목하면서 나의 세계사랑이 한편으로 여성주의적(feminist)이라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이번 ‘사유와 信學’이라는 연재를 통해서 내가 드러낼 생각이란 동아시아적이고, 한국적이며, 여성주의적이라는 특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 내용의 하나로, 본인이 이번 연재의 글에서 반복해서 언급할 한국적 사고의 아주 오래된 기록인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마음속 끓고 있는 물 같은 착한 마음(沸湯同善心中)”이나 “실성(失性)”이나 “해명(害命)”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우리 마음속에는 끓는 물 같은 살리는 원천과 원리가 있어서 그것이 우리의 본성(性)이고, 그것을 잃게 만드는 것이 사람을 ‘실성’하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마음속의 온천을 가지고 각자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살라는 하늘로부터 받은 명령(命)을 해하는 것(해명)이 바로 사람의 목숨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등이다. 이렇게 이번 ‘사유와 信學’이라는 제목의 성찰 속에서 가능한 한 여러 차원에서 한국적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살펴볼 것인데, 이것은 지금까지 본인이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라는 관점에서 주로 행해오던 좁은 의미의 유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그 고기의 기록이 한편에서는 여전히 위서(僞書) 논란에 처해있고, 거기서의 기록 문자가 오늘날 일반적으로 서구 근대적 분류의 의미에서 ‘국민국가(nation)’ 이해의 차원에서 ‘중국’의 것으로 이해되는 한자(漢字)이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이 있음에도 그러하다.

▲ 한나 아렌트(사진 왼쪽)와 니콜라이 베르댜예프(사진 오른쪽)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의  『노예냐 자유냐 Slavery and Freedom, 1939』 와 더불어

20세기 인류의 삶은 보편적으로 서구 유대기독교 문명에 의해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진행되는 인류의 삶에서 가장 관건이 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물질주의’와 ‘자아주의’라고 생각한다. 즉 사람들의 관점이 온통 여기 이곳의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에 한정되어서 다른 차원을 보지 못하고, 또한 그러한 철저한 감각적 주객 이분의 도식 속에서 점점 더 좁은 차원의 자아 폐쇄에 빠져들고 있다. 거기서 오늘 우리의 많은 불행이 파생된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차원의 병적 외로움과 뿌리뽑힘, 사회적 차원에서의 극심한 빈곤과 자본주의적 타락, 노동의 소외와 자연생태위기, 온갖 공동체의 해체와 경쟁주의, 폭력과 전쟁, 사이비 신앙의 창궐 등, 오늘 많은 사상가가 이구동성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말하는 인류 문명의 위기, ‘인간세(Anthropecene)’의 등극에 대한 말이 그 물질주의와 자아주의의 악을 지시하고 있다고 여긴다. 어디에서 돌파구를 찾을 것인가? 서구 기독교 문명의 세계관이 오늘의 정황 도래와 가장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면 그 자체 내에서 지금까지의 물질주의와 자아 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한 사고에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그러한 서구 기독교 문명과는 다르게 사유하는 다른 문명적 관점을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지를 찾아왔다.

그 탐색의 과정에서 20세기 러시아의 사상가 니콜라이 베르댜예프(N. Berdyaev, 1874-1948)의 『노예냐 자유냐 Slavery and Freedom, 1939』를 다시 주목한다. 저자 베르댜예프는 젊은 시절 볼셰비키즘과 마르크시즘에 심취했지만, 곧 그 과격한 물질주의에 등을 돌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 러시아 정교회의 깊은 신비 영성과 야콥 뵈메,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으로 이어지는 유럽 관념론과 씨름하였고, 특히 플라톤과 칸트,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을 자신의 정신적 샘물로 들면서 20세기 가장 고매한 종교영성가와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베르댜예프는 러시아가 동서 인류 문명의 교차점으로서 러시아 대혁명도 겪으면서 그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 영성을 제시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의 원숙한 후기 인간론과 사회론, 우주관이 통전적으로 녹아있는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이 처해온 다양한 육체적, 심리적, 사회정치적이고 문화·종교적이며 우주적인 ‘노예’ 상태를 분석하면서 어떻게 하면 다시 참된 ‘자유’의 삶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탐색한다.

여기서 그가 이 모든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핵심적으로 가져온 단어가 ‘인격(personality)’이라는 단어이다. 그것은 마치 앞서 동아시아 사상이 ‘易’이나 ‘(生)理’ 또는 ‘性’이라는 단어로써 우주와 인간의 궁극성의 차원을 매우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이고, 현실적이지만 신비로써 불이적(不二的)이고, 중층적이고, 통합적으로 표현해내려고 한 것처럼 그렇게 이 ‘인격’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우주와 인간 삶의 심층과 고저, 과거와 현재, 미래와 종말을 그려낸다. 그의 이 그림은 기독교적이지만 결코 기독교적이지만 않고, 거기에 서유럽보다 東이라고 여겨지는 러시아의 것이 들어가 있고, 헤겔적인 융합(融合, the great synthesis)을 알지만, 오히려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이원론과 비관론이 “더 진리에 가깝다”라고 언술한다. 베르댜예프의 이러한 관점과 언어가 나는 오늘 우리 시대 인류 문명의 정황과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희구를 매우 잘 표현해 주고 있다고 여겨서 이번 나의 ‘사유와 信學’의 서술을 위해서 그 체계로부터 많이 가져오고자 한다. 기독교 신학적이면서도 그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理) 언어를 쓰고, 서양적이면서도 동양적인 요소(生理)를 충실히 담지하고 있으며, 매우 역동적이고(易), 생명 친화적인(性) 세계 탐색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한국적 여성信學이 추구하는 것

사실 이미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지만 이러한 베르댜예프의 저술을 1970년대 말(1979년) 한국에 번역 소개한 사람은 선친 이신(李信, 1927-1981) 목사님이다. 올해 그의 소천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준비 중인데, 그 일 중의 하나로도 생각하지만, 그러나 2014년 늘봄 출판사의 종교철학 시리즈로 다시 출간된 이 책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은 더 오래전부터 했다. 지난해 7월에 <한국信연구소>를 공적으로 출범하면서 밝힌 대로 일찍이 선친 이신 목사님이 자신의 신앙적 전회를 표현하기 위해서 가져온 ‘信’이라는 언어는 이후 나에게도 많은 것을 포괄하고 있는 중층의 언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이신의 신학을 “슐리얼리즘과 영의 신학” 또는 “환상과 저항의 신학”으로 표현한 대로 信은 특히 ‘상상력’(imagination)을 지시하는 언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한국적 여성신학(信學)의 사유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은 앞으로의 우리 삶이 우리의 상상의 힘과 많이 연결된 것을 드러내고, 그 상상력의 부패를 막고 대신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와 힘이 될 수 있는지를 여러 차원에서 밝혀보고자 한다. ‘믿음(信)’을 한편으로 상상의 힘을 보는 일을 말한다.

다음으로 우리의 선한 상상력은 지금 여기에서는 ‘착한 말’로써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요사이 출판인들에 의해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홍은전 작가의  『그냥, 사람』이라는 책 제목도 잘 지시하는 대로, ‘믿음(信)’은 그냥 ‘사람(人)의 말(言)’을 하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즉 내가 하는 말이 ‘믿음의 말’이라는 것은 그저 사람의 말로서 폭력과 죽임, 배타의 언어가 아니라 인간(仁)의 말로써 발설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설이 되었으면 그 말을 지키고, 약속을 실천하고, 그래서 그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믿음과 신앙의 사람이라면, 그리고 오늘 한국 기독교가 믿음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 언어가 타인을 혐오하고, 소외시키고, 차별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 반대가 되어야 함을 살펴보는 일이다. 그러나 왜 현실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는지를 알아보고 싶다. 그렇게 나의 信學의 사유는 다시 말과 언어, 친절과 환대, 배려와 이심전심, 역지사지의 공감 문제라는 것을 밝힌다.

그런데 선한 상상력과 좋은 언어는 우리의 과거와 그 과거의 몸의 경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 자체가 과거 우리 의식 경험의 농축이듯이 우리 信學의 물음은 미래와 현재의 물음만이 아니라 과거에 대해서 그 마땅한 권리를 돌려주려는 시도이고, 그 과거에는 우리의 부모님뿐 아니라 역사, 전통, 민족과 무의식, 자연, 우주가 모두 포괄되는 것을 인정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함께 神이나 초월(聖), 자연(性)이나 우주(理)라고도 하고, 또 無나 空이라고도 한다. 그 전체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우리 삶이 우리의 단순한 감각과 의식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지만, 거기서의 시작 또는 토대로서의 과거가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매우 통합적이고 중층적인 작업이다. 진정으로 여러 차원과 층의 ‘불이적(不二的)’ 작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Korean Feminist Intergral Studies for Faith). 그런데도 그 모든 인식을 ‘사유와 信學’이라는 두 마디 말로 정리해 보면서 매일(日步), 지금 여기서, 우연히, 또는 은총과 계시로써, 또는 업으로 만나게 되는 객체와 말과 글을 텍스트(經)로 삼아서 어떤 사유와 생각들이 나를 믿음으로 이끄는지를 발설해 보고자 한다. 그 발설과 드러냄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가 좀 더 인간다운 세계, 착하고 선한 세계, 갈등과 싸움을 넘어서 하나로 되는 세계, 평화가 있고, 기쁨과 편안함이 있는 세계, 신인(神人 Homodeus/Posthuman)의 세계로 나가기를 희구한다.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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