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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기장 고백교회 한얼야학, 광주기노련의 근간김상집 광주기노련의 산증인 ⑵
권이민수 | 승인 2021.02.08 15:47
▲ 김상집 선생은 광주기노련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고백교회 한얼야학이 근간이 되었다고 한다. 야학을 통해 배움을 얻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조직하고 노동운동의 최선두에 섰다고 증언했다.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먼저 만난 인물들은 전국 기노련 창립에 큰 역할을 했던 3인방 유동우 소장(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신철영 선생(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 한명희 선생(관련 기사: 「한명희 기노련 초대 사무총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 두 번째 기사)이었다. 이들은 기노련 탄생의 역사와 기노련 활동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난 기사에서 김상집 선생은 야학을 중심으로 진행된 광주 노동운동의 역사와 전개 과정, 광주기노련의 탄생과 활동에 얽힌 이야기 등을 독자에게 들려줬다. 이번 기사에서 김상집 선생은 서울권과 다른 광주기노련만의 활동과 그 특징, 이에 대한 의견을 풀어냈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김상집 선생의 확고한 생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 광주기노련의 활동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활동한 기노련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요?

광주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은 공간이고 5.18 진상규명은 광주 시민의 공통된 마음입니다. 이런 부분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84~85년 기노련이 만들어져서 활동하던 초기에 광주기노련은 회사마다 노조를 만드는 작업에 중점을 두고 활동했습니다. 당시 저는 고백교회라는 교회를 다니면서 한얼 야학을 교회에 만들었습니다. 그 야학의 졸업생들이 자연스럽게 기노련에 합류했었죠. 그 외에도 와이야학과 같은 다른 야학도 몇 개 더 있었습니다. 그 졸업생들도 자연스럽게 기노련으로 합류하게 됐습니다. 이로써 기노련 조직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학은 노동 동지들이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교육하던 공간인데 이 졸업생들이 회사에 들어가니 그 안에서 소모임이 만들어지고 후에는 노조를 만들고 파업 투쟁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곳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즈음에 장명구라는 선배가 광주에 와서 밤새 이야기하곤 했어요. 그 선배는 노동자조직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었죠. 저도 그 자리에 합류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날마다 소모임 인도하느라 바쁜데 그 자리는 기초적인 이야기만 해서 피곤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밤새 이야기하고 그 선배는 아침에 떠나버렸죠. 남이 보기엔 그 선배가 멋있어 보였겠죠. 그 자리에 함께한 이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들이 후에 내일신문, YTN도 만들고 내일연구원이라는 단체도 만들었는데요. 그렇게 다른 모임이 성장해 갔죠. 그 출신들과 기노련이 노동현장에서 얽히게 됐죠. 그렇게 주도권 다툼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 광주에서는 기노련이 수가 많아 주도권 다툼에서 압도적이었죠. 제 입장에서는 거기서 조직 만들어 봤자 다 후배들이고 제가 노동문제에 있어서 더 잘 알고, 더 영향력이 있고 하니깐 큰 자극은 안됐어요. 그럼에도 활동하다보면 우리 모르게 이상한 활동가들이 있더라고요. 다 그 쪽 인물들이었죠. 그래서 결국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기노련 만들기 전까지는 합법적인 조직은 한국노총과 가톨릭노동청년회만 있었습니다. 특히 가톨릭노동청년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전에 큰 활약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주 활동가들이 현장을 떠나면서 영향력이 이후에 약해졌어요. 그 즈음 제가 본격 활동하면서 기노련도 조직하게 되고 그렇게 기노련 세력이 압도적으로 커지게 됐죠. 서울도 물론 마찬가지일 겁니다. 노동 투쟁 현장에는 기노련 깃발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기노련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서울이 대중 집회 중심이라면 광주는 여러 노조의 중심적 역할을 했어요. 저는 후배를 학습시킬 때 조직운동가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그렇게 함께 학습한 이들은 어느 공장을 가던지 근로기준법이나 노동조합법을 알고 현장의 문제를 금방 이해했어요. 그 곳에 소모임을 만들었고요. 그들은 투쟁의 시기를 파악해서 파업도 하고 농성 시에 프로그램 운영도 했습니다. 87년 6월 항쟁 이후 50개 넘는 노조를 만들어내기도 했죠. 이는 교육과 훈련을 중심으로 했던 기노련의 열매였습니다.

서울은 교회를 거점으로 해서 집회를 여니깐 사람들이 모였죠. 어마어마했습니다. 거기엔 영등포 산업선교회도 존재하고 다양한 활동가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광주는 운동 밭이 틀렸습니다. 철저하게 한명 한명이 조직운동가가 돼야 했어요. 당시 현장준비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장에서 잘난체하다 결국 해고당하고 끝나는 것은 노동운동이 아니다 공장 내에 물처럼 스며들어가야 한다. 절대 티를 내지 말고 있다가 때가 됐을 때 노동 현장에 노조도 만들고 활동해야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죠.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요. 기본적으로 소모임을 운영하면서 배운 사람이 다시 다른 소모임에 가서 가르치면서 현장을 장악하고 그럴 때 새로운 양상의 운동을 전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천하지 않고 준비에만 머무르는 것을 그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그렇게 머무르기만 하면 그 현장만 알게 되고 다른 현장에 연대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깥의 상황과 함께 해야 해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노동자들이 학생과 연대하고 농민운동이 농학운동과 연대했듯이요. 그렇게 연결될 때 각 운동은 거대한 민중항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자세가 필요한데 현장준비론자들은 밖이 어떻게 되든 내가 현장에서 준비되고 지도자로 크기까지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자는 주장을 했어요. 이들의 주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그 논리가 깨지게 됐죠.

결론적으로 서울은 현장의 문제를 큰 교회에서 여는 집회를 통해 그 현실을 알리고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물론 우리도 그런 걸 하기는 했지만 더 큰 중점을 학습 체계를 치밀하게 만들어 개개인을 조직운동가로 만드는 데 뒀습니다.

▲ 광주기노련에서 활동하시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으실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수난을 당하는 것을 기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보기에 월급도 쥐꼬리만큼 받고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 현장에서 깨지고 안 좋은 일만 당한다고 짠하게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힘들고 말고 할 것이 없어요. 삶 자체가 그런 것이니까요.

▲ 기노련은 다른 기독교운동단체와 달리 노동자 주체적인 단체였는데요. 그래서 어려웠던 점은 없나요?

제가 고백교회에 있을 때 한얼 야학을 운영하다가 무등교회로 옮기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가 기노련을 컨트롤을 못해서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무등교회로 오게 됐습니다. 목회자와 기노련 간에 이런 소통의 어려운 지점이 힘들었던 거 같습니다.

▲ 기독교는 노동운동에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데요.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교회 가서 복을 많이 받고 싶었다면 교회를 나갈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복은 받고 싶지 않으니까요. 제가 고등학교 때 다녔던 교회의 목사님이 기독교에 대한 신앙 고백과 세례를 강조했었습니다. “세례를 무슨 선물 받듯이 그냥 받는 게 아니고 내 마음이 제대로 잡혔을 때 받아야 한다. 고등학생이 무슨 세례냐? 네가 성인이 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때 그 마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따르는 무리인데 네가 십자가를 질 수 있냐? 아무런 결단 없는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냐? 세례 받아서 교회에서 복을 받는 그런 개념은 신앙고백이 아니다”라고 목사님은 평소에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컸어요. 복을 받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교회를 다니는 것이라면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 기독교 신앙이 선생님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데요. 선생님께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저희 집안은 유학자 집안이었습니다. 논어에 학위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말이 있습니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인데요. 여기서 학(學)은 성인의 말씀을 받들고 본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본받는다는 것은 한번 본받는 것으로 땡 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실천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쁘다는 것이죠. 동양에서 이렇듯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맘 편하자고 다른 사람의 것을 뺏는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거예요. 우리 삶 속에 항상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줄 안다는 것. 여기서 이웃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죠. 이런 실천이, 이렇게 함께하는 것이 가장 기쁜 것이라는 겁니다. 나 혼자 돈 많이 가지고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기쁨이면 안 됩니다. 나의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해 나가야 해요.

기독교 신앙은 고난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각오를 마음 깊이 다지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 이웃은 누군가요? 바로 힘없고, 병들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죠. 그런 사람과 항상 함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그 안에서 종교적 영성과 신앙을 찾는 것이 필요해요. 물론 그 것이 말처럼 실천하기 쉬운 것이 아니지만, 현재 생활에서 과욕을 부리지 말고 실천해 가야 합니다. 이 것이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 신앙이에요.

▲ 오늘날도 기독인 정체성을 가지고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선생님께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우리가 활동했던 예전과 지금은 시대적으로 다릅니다. 그렇기에 70~80년대의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할 수 없는 거 같아요. 우리나라는 워낙 기복신앙이 강하죠. 마치 신천지가 하는 모략포교처럼 특정 교단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교회의 신자까지 빼앗겠다는 식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도 많고요. 이런 현실과 상황에서 젊은이들에게 옛날의 무언가를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음, 그냥 스스로가 청빈하게 살도록 노력하라고 해주고 싶어요. 물론 사회 봉사하는 삶을 계속 살 수 도 있겠지만 내가 가진 여건 하에서 청빈하게 살고 할 수 있는 만큼 운동을 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요즘 586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죠. 과거에 운동했던 사람들인데요. 그 과거를 훈장처럼 달고 다니면서 소신을 잃고 옳지 않은 방법으로 정치가가 되고 좋은 자리를 차지해서 권력과 금욕을 향유하려고 하는 사람들이죠. 그 과정에서 나쁜 짓도 많이 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저는 그런 것들처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옛말에 ‘십년공덕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10년간 공덕을 쌓아도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의미인데요. 자기 자신을 지킨다는 맘으로 중심을 잘 잡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 않죠. 그러니 과거 운동했다고 하면서 그걸 훈장 삼아 먹고 살려는 사람들이 많은 거겠죠. 그런데 그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교에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줬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말고, 누구에게 준지도 모르고, 내가 주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한 곳에 머무르지 말고 습관처럼 계속해서 보시할 수 있는 것을 말해요. 대가를 바라고 누구를 도와주는 그 순간 그 마음은 다 알고 있습니다. 남이 알건 모르건 봉사하는 삶. 다른 사람은 그 삶을 몰라도 나 스스로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삶을 남에게 자랑하는 순간에 건방지고, 뻐기고 싶고, 잘난 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죠. 그게 마음의 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부디 일상 속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 앞으로 선생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처음에는 운동권에만 있으면서 활동에 전념하다가 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후에 시작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도예예요. 나중에 거기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고 싶어서 그림과 서예도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화를 그리게 됐죠. 건강을 위해 국궁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취미라기보다는 마음공부에요. 날마다 그렇게 마음공부하면서 살아가고 싶습니다. 또 단체 ‘광주전남 6월 항쟁’에서 이사장으로 일하는데 이와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도 준비하려고 합니다.

노동운동 가운데 겪는 고난과 어려움조차 기쁨이었다고 단호히 말하는 김상집 선생의 말은 인터뷰가 끝나고도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큰 울림을 줬다. 사회운동을 하다 정치•경제계로 넘어가 또 다른 부정의를 낳고 있는 과거 운동권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말 또한 감명 깊었다. 김상집 선생의 진심어린 말 한마디 한마디는 치열했던 과거의 광주에서도 중심을 지키며 열심히 투쟁하게 만든 열정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비록 광주기노련은 해체되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담기게 됐지만, 김상집 선생의 열정만은 아직도 현장에 남아 또 다른 기독활동가를 통해 이어지고 있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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