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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거주 조선인 최초의 전도자20세기 초기 북간도 장로회 선교의 개척자 김계안 조사 ⑴
이이소 | 승인 2021.02.12 23:55
▲ 북간도 3대 민족주의 명문학교 길동학당 터: 중국지린성 연길현 국자가 소영자 소재. 학교 터는 밭으로 변해 있고(삼각형), 인근에 민가가 들어서 있다. ⓒ독립기념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중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북간도 기독교 하면 머릿속이 하애지며 명동교회와 김약연 목사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그러나 연길에 거주하며 많은 교회와 목사들의 독립운동을 접하면서 명동교회에 대한 선입관과 편견의 허상이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20세기 초 20여 년에 걸쳐 연변 각지에 세워진 120여 개에 가까운 교회들과 조우하게 되었던 까닭이다.

이름 석 자 남지는 않은 이들, 역사가 지워버린 이들

1920년 일본군의 대학살에 소실당한 산골짜기와 오지에 세워진 교회마다 다 대한독립에 목 말라했던 애국애족의 교회들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중국의 관원과 토비들과 일제의 눈길을 피해 외딴 마을, 외딴 곳에 지어진 작은 교회들은 전도자들, 권서인들, 목회자들의 나라를 잃은 동포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기도, 희생과 헌신의 열매였다. 수만 리의 고난과 고독을 마다하지 않고 낯선 세계로 복음을 들고 찾아온 캐나다 선교사들의 자비와 관심의 손길이었다.

지금 비록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할지라도 그 시대에 나라 잃은 겨레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며 희망을 노래하고 독립을 꿈꾼 교회는 다 위대하다. 비록 역사에 이름 석 자 하나 남기지 못했다 할지라도 허술한 초가건물 속에 모여 하나님께 대한독립과 자유, 구원과 해방을 간구하며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바친 분들은 다 위대하다. 역사에 묻혀버린 위대한 작은 교회의 이름, 독립운동의 숨은 실체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전율했던가! 독립운동의 그늘 속에서 고난과 고통을 감내해준 작은 교우들을 만나면서 얼마나 울었던가!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나라와 민족의 핵이요, 본질인 민초, 작은 사람들은 무시하고 영웅, 거인, 지도자들만 이야기 한다. 민초는 항상 거인과 영웅들의 보조하는 장식품에 불과하며 그들을 찬양하고 우러러 보며 그들에 의해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하는 계몽의 대상일 뿐이다. 특별히 중국의 책들은 기독교와 교회에 대하여 참으로 야박하다. 종교사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마지못해서 교회 이름과 교회 창립자 몇 명을 적어 놓고 그것도 연도 분별이 안 되며 연도가 빠지는 등 참으로 무성의하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북간도 초기 전도자 혹은 교회 창립자들인 홍순국, 안순영, 김련보, 한학렬, 리응현, 최봉렬, 한수현 등의 이름을 다른 글이나 책에서 뒤져보았으나 허사였다.

그러나 이동휘와 김약연에 대한 기독교 관련 글들은 편수가 많았으며 분량도 적지 않았다. 마치 그들이 20세기 초기 20여 년 동안 북간도 기독교 전파와 교회형성에 지대한 공헌과 수고를 한 것처럼 기술되어 있어서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북간도 초창기 기독교 관련 활동과 복음전파에 대한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을 삼고 대조할 만한 책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다.

몇 년에 걸쳐서 일본의 경신년 대학살에 소실된 교회를 찾으며 고난의 시대에 민족의 십자가를 짊어진 북간도교회와 교우님들에 대한 감사와 추모하는 마음으로 북간도교회에 세워졌던 교회이름을 찾아서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찾듯이 이름 하나하나를 찾으면서 덤으로 창립자들과 전도자들의 이름도 함께 찾았다. 뜻밖의 기회에 만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하>와 몇 권의 책이 나를 1900년대 초기 20여 년의 북간도교회로 데리고 갔다. 나는 그 책들 속에서 무명의 전도자를 만났다. <룡정문사자료 2집>과 <연변문사자료 8집>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장로 김계안으로 기록된 그는 1909년에 선교사 구례선에 의해 공식적인 파송을 받고 북간도에서 거주하며 활동한 최초의 조선인 전도자였다.

이동휘에 대한 과장

역사서와 역사소설은 다르다. 그러나 역사서가 역사소설처럼 기술자의 확신과 <카더라 통신>에 근거해서 써진 부분이 많아서 해방 이후 남과 북, 중국에서 동시에 독립운동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과소평가나 과장과 왜곡이 발생하였다. 이념과 분단 상황 속에서 자기 체제에 맞는 사건과 인물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던 각국의 정치적인 상황과 자료의 빈곤으로 <카더라 통신>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이 이해가 된다. 중국에서 나온 책 중에 내용 전부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료 부족으로 <카더라 통신>에 나오는 기사처럼 기술 되는 인물들이 있다.

이동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그가 의도했던 것은 전혀 아니고 단지 후세 사가들이  조선인 제1호 사회주의자인 그를 더 미화시키고 더 영웅화시키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기술한 것일 뿐이다. 사실 그대로도 그의 독립운동의 수고와 공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데 후학들이 자기들의 시조인 그를 더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싶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캐나다장로회 최고의 부흥 사경회 인도자였던 그가 기독교에서 사회주의자로 개종한 것은 사회주의가 기독교보다 우월하다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많은 기독교 관련 학교와 교회, 독립운동에 있어서 무조건 최초의 것과 좋은 것은 다 그의 공로로 돌린다.

초창기에 세워진 길동기독학교를 위시하여 많은 학교들, 라자구 무관학교, 북일학교, 하마탕의 학교 등, 간민교육회, 간민회 창립을 그의 공로로 돌린다. 뿐만 아니라 1910년 성진교회 교우들과 구례선 선교사가 만든 <삼국전도회>도 그가 만든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연변의 숱한 교회와 학교는 그의 영향으로 세워졌으며 그것들을 민족 교육과 독립운동의 장으로 만든 것도 다 그의 노력과 수고이다.

그는 1911년 2월에 처음으로 북간도에 나와서 한 달 동안 부흥 사경회를 인도하였는데 중국 책들에는 그가 1909년에도 연길과 용정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월에 대무의도에 유배되어 1912년 6월경에 유배에서 풀려 나왔는데 그 기간에도 연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한 책들도 있다. 그는 유배지에서 풀려나온 뒤에 계속해서 구례선의 조사로서 활동을 하다가 1913년 2월 또는 3월경에 북간도로 망명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는 간민회 창립과 조직에 깊게 관여를 한 위대한 지도자로 부각된다.

구례선이 쓴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에 의하면 그는 1910년에 그의 조사로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에 보면 그가 1909년부터 전도자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나온 책들은 그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서 북간도와 함경도 교회들을 다 세운 것처럼 느끼게 만들지만 장로회사기는 사실이 아님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세운 전도해서 세워진 교회는 이원군 송당리교회(1909년), 이원군 은용덕교회(1909년),  이원군 포항리교회(1911년)로 세 개다. 단천군 여해진교회는 그의 전도로 수십 명이 믿기로 작정하였지만 교회 설립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그 후 신자 강봉호의 헌신과 권면으로 여해진교회가 세워졌다.

이원군 신흥리교회(1908년)와 이원군 문평리교회(1909년)는 권서인 한진소, 교원 이종헌, 선교사 구례선과 함께 전도집회를 열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곳이지 그가 전도해서 세운 교회들이 아니다. 또한 1912년에 세워진 명천군 와연동교회는 김계안, 김문삼, 김택서, 이종화, 이종범 등의 전도자들이 오랜 시일에 걸쳐 전도하여 함께 세운 교회이며 그가 그 기간에 유배를 당한 것을 감안할 때 전도의 공을 그에게만 돌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의 전도로 3개의 교회가 창립된 일은 놀라운 일이고 그의 복음 전파의 호소력이 크고 감동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책들이 그에게 돌리는 찬사는 과장이 너무 심하다. 3개의 교회가 적은 것은 결코 아니지만 1911년 당시 함경노회, 함북노회에 속해 있던 캐나다 선교부 산하에 310개[1]의 교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며 또한 그 보다 더 많은 교회를 세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북간도 초창기 복음전파와 교회들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을 싸잡아서 그의 공로로 돌리는 것이 지나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위대한 전도자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1912년 함경노회에 신학생 취교자로 등록하고 면접하였지만 신학교 유학의 길로 가지 않고 북간도로 망명의 길을 택하였다. 그 뒤로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는다.

김약연 목사에 대한 미화

중국에서 이동휘처럼 신격화 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 북간도 기독교 민족주의 독립 운동의 최고의 지도자요 대부로 인식되고 있는 목사 김약연에 대한 평가와 공로 또한 알려지지 않은 주변의 작은 사람들의 공로를 싸잡아서 그에게 바친 느낌이 든다.[2] 맹자와 도덕경에 통달한 그는 후학들이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고 미화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1923연도까지 장로회 사기에 나오는 그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1909년 신민회에서 파송되어 온 정재면의 전도로 김하규, 김정규, 문정호, 문치정, 최봉기 등과 함께 믿기로 작정하고 명동교회를 창립하였다. 그 후 1911년에 심성문, 엄방진에게 전도하여 은포교회를 세웠다. 1915년에 명동교회 장로로 선임되었으며 1917년에는 북간도 용정예배당에서 열린 함북노회 조직 모임에서 부회계로 선임되었다.[3] 이것이 1923년까지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나오는 그에 관한 기록의 전부이다.

그에 대한 기록에 빠지지 않는 <길동기독전도회>는 장로회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가 1909년 명동교회를 설립함과 동시에 같은 해에 정재면, 박태환 중심이 되어 만든 전도에 목적을 둔 단체였다. <길동기독전도회>는 1911년 2월 이동휘의 명동 사경회 기간에 이름을 <삼국전도회>로 바뀌었다. 서굉일 교수의 글에 의하면[4] 삼국전도회가 3년 간 열심히 노력하여 교회와 학교를 병립하여 세운 곳이 36개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의하면 1911년에 12개 교회, 1912년에 3개 교회, 1913년에 4개 교회로 그 기간에 설립된 교회는 총 19개에 불과하다. 물론 명동교회 여전도회가 세웠다고 하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러 개의 교회가 나오는데 이것이 공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최소한 교회 이름만큼은 밝혀져야 한다. 그리고 교회 이름과 전도자 또는 창립 멤버들이 알려진 19개 교회를 <삼국전도회>의 노력으로 보려면 19개 교회와 <삼국전도회>의 관계, 김약연이 실제적으로 <삼국전도회>에서 참여하여 실천한 관계가 밝혀져야 하는데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19개 교회의 창립의 공로를 막연히 <삼국전도회>와 김약연에게 돌리기 어렵다. 오히려 19개 교회의 창립의 공로를 1909년에 북간도에 거주 전도자로 온 조사 김계안과 1910년, 경성에서 일어난 100만명 전도의 일환으로 북간도에 전도목사로 파송되어 온 목사 김영제에게 돌려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5]

장로회사기는 <삼국전도회>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10년, 경술에 100만명 전도대가 경성으로부터 각처에 편행전도하야 교회대진하니라. 선교사 등이 지리를 순찰하고 구역을 획정하야 성진항을 중심지로 삼고 북청, 이원, 단천, 삼수, 갑산, 길주, 명천, 경성,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동만주, 해삼위 등지에 전력전도할새 3국전도회를 조직하야 각처에 파송하니라.”

1922년 간도노회 전도부 보고에 <삼국전도회> 재산 처리 문제가 나온다.

“용정에 있는 삼국전도회 가옥을 용정교회에 기부할 것과 금추(今秋)부터 무산, 회령, 간도에 전도인을 파송할 사와 전도회 연보는 매년 부활주일로 하되 편리한대로 교회마다 사경회시에 하기로 결정하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대로 <삼국전도회>가 개교회 소속이 아니며 처음에는 본부가 명동에 있었을지 모르지만 1922년에는 위치가 용정에 있음을 말해준다. 작은 사람들의 헌신과 공로를 싸잡아서 유명 인사에게 덧씌워 주는 후학들의 기술로 말미암아 역사가 조금씩 왜곡되고 과장되고 축소된다. 또한 이념에 휘둘리게 되며 기득권자들의 구미를 따라가게 된다. 동일한 인물에 대하여 한국과 중국의 기술이 다른 것을 보면서 우리가 날조된 역사와 인물에 대하여 배울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역사 날조를 국가와 이익단체들, 이념집단들이 자행하는 현실 속에서 무명의 사람들의 헌신과 공로에 대한 진솔한 기록을 발견하였다. 윌리엄 스코트가 기록한 조사 김계안에 대한 기록이다.

미주

[미주 1]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56쪽.
[미주 2] 본 글은 1923년까지의 기록만 다루므로 그 이후에 그가 복음 전파에 크게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북간도에서 교회의 양적 증가는 1925년을 정점으로 해서 두드러지게 쇠퇴하였다. 1930년, 한국의 캐나다선교부 지역에서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사람의 수는 1919년에 13,602명에서 1925년에 22,721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그때를 절정으로 부흥의 열기는 식었고 여러 번에 걸쳐서 두드러지게 쇠퇴하였다. 1930년에 그리스도교인은 17,524명으로 줄어들었다.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236쪽 참고.
[미주 3] 양전백 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580쪽.
[미주 4] 서굉일,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238쪽.
[미주 5]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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