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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은 상징일 뿐이다”성례전 ⑷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2.2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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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파와 츠빙글리파 간의 중재, 그리고 칼빈의 성만찬에 대한 논의가 등장하자 여러 전선들이 형성되었습니다. 특히 칼빈이 기표에서 기의를 제거한다고 비난한 츠빙글리파들과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정말 떡을 떼는 것이 상징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것은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한 다음에도, 우리는 상징을 보여줌으로써 실재 그 자체도 보인다고 바른 추론을 한다. … 경건한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주께서 정신 상징을 볼 때마다 참으로 거기에 상징된 실재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IV.xvii.10).

그러나 성만찬에 대한 부분에서 츠빙글리파들과의 논쟁은 상대적으로 적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훨씬 더 철저하게 칼빈은 가톨릭과 루터파의 교리들을 논박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교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현실이 성례에 의해 표명된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칼빈과 그들 사이에 있는 견해의 차이는 본질적으로 이 참여의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공통적인 것은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이 참여가 일어나는가를 확립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다 음의 구절은 전형적인 칼빈의 입장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인간의 몸에 공통된 일반적인 특색들에 의해서 제한을 받으며, (이미 하늘에 받아들여져) 그리스도께서 심판자로서 돌아오실 때까지(행3:21) 하늘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 끌어다가 썩을 요소들 밑에 둔다거나 그 몸이 어디든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합당치 못한 행위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는 그의 영으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몸과 영과 영혼이 그와 하나가 되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결의 줄은 그리스도의 영이시다(IV.xvii.12).

칼빈의 입장은 이렇게 다시 말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방식은 그것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 아닙니다. 제4권은 제3권에서 시작한 성령론의 논의의 맥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간결하게,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례의 만질 수 있는 요소들에 위치상으로 현재한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성령의 역사만이 이 참여의 현 실을 설명해준다고 주장합니다.

성만찬에서 살이 떡 속에 있지 않으면 살이 임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큰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와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 비밀히 역사하실 여지를 남겨 놓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으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우리를 자신에게로 들어 올리신다면 우리는 그의 임재를 똑같이 즐길 수 있으리란 것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임재의 방법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떡 속에 두고, 우리는 그와 반대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끌어내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IV.xvii.31).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 성례의 요소들 안에 담겨 있거나 둘러 싸여 있다는 어떠한 개념에 대해서도 반대하며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는 사람들을 비판합니다. 칼빈은 “이것은 내 몸이다”라는 제정사의 분석을 통해서 저 주장들을 논박합니다. 대명사 “이것”이 떡을 가리킨다는 것을 가정하면, 설명을 요하는 첫 번째 용어는 동사입니다. 이점에서 칼빈은 성만찬의 문구에 대한 논리적이고 문법적인 분석의 오래전에 확립된 전통과 단절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은 일반적인 규칙의 지배를 받지 않고 문법에 의해 검토되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합니다.

결국, 그는 “이다”의 문자적인 의미를 거절하고, 바울과 누가의 권위에 의지하여 “떡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해석하며, 이것은 “그의 몸으로 세우는 언약”(눅22:20; 고전11:25 참조)을 뜻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 몸이다”는 말씀은 “이것은 내 몸으로 세운 언약이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IV.xvii.20). 이렇게 칼빈은 제정사 자체가 성만찬의 요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현재를 추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중세 가톨릭과 루터파의 성만찬 이해에 관한 칼빈의 비판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칼빈은 가톨릭과 루터파의 견해들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가톨릭의 주장에 따르면, 요소들(떡과 포도주)은 다른 본질(살과 피)로 변화되기 위해 그들의 본질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루터파의 주장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몸은 떡과 함께, 안에 그리고 아래 있고, 그것의 본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변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의 화체설에 대한 이 비판은 엄중한 것이었지만, 칼빈이 로마 교회에 가한 가장 중요하고 신랄한 비판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께 제공된 가치 있는 희생으로서의 가톨릭의 미사 개념은 칼빈의 분노를 결정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까닭은 미사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의 유일성을 훼손시키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보기에, 미사의 교리는 신성모독이지만, 화체설은 단지 신학적인 오류에 불과합니다. 칼빈은 성만찬에 대한 논의를 끝내면서 한 장(18장)을 할애하여 미사를 비판하는데, 이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골고다의 희생 제물로 내어준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시므로 그의 대리자 곧 미사를 집행하는 사제가 그의 자리에 대신 등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참을 수 없는 모독과 모욕을 가하는 것입니다(IV.xviii.2). 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사제들이 희생제물을 반복하여 바치는 것은 골고다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유일회적인 희생의 죽음을 폐기시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다시 요구하는 불경한 일입니다(IV.xviii.3). 미사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주시려면 매일 희생이 되어야 한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그의 죽으심에서 우리에게 오는 유익을 빼앗음으로써 성만찬을 폐기시킵니다(IV.xviii.5-7). 이러한 견해들은 성경이나 교부적인 옹호를 받지 못하고(IV.xviii.9), 수많은 부패와 해악들을 낳았습니다(IV.xviii.14). 기본적인 오류는 저들이 화목으로서의 제사와 찬양 혹은 감사로서 의 제사를 구분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단 한번 이 화목의 제사를 드렸습니다(IV.xviii.13). 우리가 지금 예배에서 드리는 제사는 찬양과 감사의 제사입니다(IV.xviii.16).[1]

그러나 화체설의 경우에, 오류는 제정사의 암송이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본질의 전환을 동반한다고 믿는 것에 있습니다. 칼빈은 전환이 일어나지만, 가톨릭교도들이 전환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장소는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오류는 그리스도의 몸이 떡 속에 싸여 사람의 입으로부터 위로 옮겨진다는 하는 것이다. 이런 유치한 공상을 하게 된 데에는 원인이 있었는데, 즉 그들 사이에서 성별은 마법의 주문과 다름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받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떡이 성례가 된다는 원칙을 그 들은 깨닫지 못했다(IV.xvii.15).

말하자면,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에게서 전환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성만찬 동안에 일어나는 변화는 떡과 포도주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신자들이 떡과 포도주를 지각하는 방식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미 앞에서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확립시키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하였습니다(IV.xiv.3). 그리고 성만찬에 대해 말할 때, 이 성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그의 피는 참된 음료이며(요 6:55), 그것을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요6:54) 선언하신 주님의 그 약속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IV.xvii.4). 또한 주께서 당신의 살을 먹으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신 말씀(요6:26 이하)은 보다 명확하고 더 숭고한 무엇을 가르치는데, 즉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참여함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IV.xvii.5).

실로 그리스도께서는 떡을 향해서 내 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 떡을 먹으라고 명하시며 그로써 그들이 그의 몸과 살에 참여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바울도 약속이 떡과 잔과 함께 신자들에게 제공된다고 가르칩니다. 칼빈의 이러한 견해는 말씀이 없으면 성만찬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과 같은 것입니다(IV.xvii.39). 이 약속과 함께 신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는 표시와 보증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에게는 그 요소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는 인이 되기 때문입니다(IV.xvii.15).

루터의 성만찬의 입장에 대해서는, 칼빈은 특히 그리스도의 몸의 편재의 교리를 거절합니다. 이 교의는 그리스도의 본성들 가운데 하나의 특성들이 다른 본성에 옮겨진다는 생각에 기초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교의는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의 편재의 특성이 그의 몸에 옮겨졌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2권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칼빈은 속성들의 교류에 대한 “현실주의적” 이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각각의 본성은 그 고유한 특성들을 보유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몸은 모든 곳에 현재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몸이 그 특성들을 보유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은 필연적으로 유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몸은 어떤 곳에 위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승천 이후에 그 몸은 하늘에 있게 되고, 그러므로 그 몸은 성만찬에 공간적으로 현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다시 말해서 그 몸이 공간적으로 현재할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말과 같이) 자기의 부재중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성령을 대신 보내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IV.xvii.26). 이런 식으로 기독론과 성령론은 칼빈의 사상에서 연결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있다는 생각은 성령의 수단에 의한 참여의 생각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칼빈의 성만찬 실행에 관한 이해

칼빈은 성만찬의 외형적인 집행에 대해서는, 예컨대 떡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떡에 누룩을 넣을 것인가 넣지 않을 것인가? 포도주는 붉은 것을 사용해야 하는가 아니면 흰 것을 사용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는 교회의 생각대로 어느 쪽을 택해도 좋다고 말합니다(IV.xvii.43). 이는 그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할 때, “무해무익한 일들로부터의 자유”(III.xix.7)를 말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제네바 예배 규정에서 성만찬의 합당한 집행을 위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합니다:

우선 공중기도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설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떡과 포도주를 식탁에 놓은 후에 목사가 성만찬의 제정에 대한 말씀을 반복해야 한다. 다음에, 목사는 성만찬에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낭독하는 동시에 주께서 금지하신 사람들을 성만찬에서 제외해야 한다. 그 후에 목 사는 우리에게 이 거룩한 양식을 주신 자비로우신 주께서 우리가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양식을 받을 수 있도록 가르쳐주시며 원래 이런 잔치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우리를 주의 자비로 합당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하 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편들을 노래하든지 또는 무엇을 읽든지 해야 하며, 목사가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적당한 순서로 신자들이 이 가장 거룩한 잔치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성만찬이 끝난 후에는 진지 한 믿음과 신앙고백을 그리고 사랑과 그리스도인다운 행위를 권고하는 말 이 있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한다. 이 일들이 끝나면 교회는 평화롭게 산회해야 한다(IV.xvii.44).

종교개혁 당시 로마교회에서 일반 신자는 1년에 한 번, 그것도 떡만의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IV.xvii.46,47).[2] 칼빈은 이 관습이 마귀가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고(IV.xvii.46), 매주 거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IV.xvii.43,44). 그것은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신체에 영양과 생명과 기쁨을 주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IV.xvii.3,10). 그러나 그의 견해는 로마교회 전통에 여전히 영향을 받고 있던 제네바 시의회에 의해 좌절되었고, 결국 일 년에 네 번 거행하는 베른의 관습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일본 개혁교회와 한국의 일부 교회들이 한 달에 한 번 성만찬을 갖는 방식으로 성만찬의 횟수를 증가시킨 것은 다행스러운 타협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오래전에 바르트가 기포드 강좌(1937-38)에서 지적한 문제는 여전히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는 오늘날 개혁교회의 문제를 성만찬이 없는 예배가 외견상으로도 불완전한 예배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 성만찬의 결여 때문에 오늘날 개혁교회의 예전을 개혁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3] 이점에서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성만찬을 통하여 심화되기 때문에 자주 거행되어야 하며, 특히 성 만찬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경우, 적어도 매주일 행해져야 한다는 「BEM 문서」의 진술에 대하여 유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4]

미주

[미주 1] 로마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도 미사의 ‘희생제사적 본질’을 계속 강조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제사적 특성을 강조하면서도 과거에 소홀히 하던 찬양과 감사의 요소를 미사의 구조 속에 도입하고 있기도 하다. 이홍기, 『미사전례』(왜관: 분도 출판사, 2007), 217.
[미주 2] 3세기경부터 로마교회는 신자들이 성혈을 흘릴 위험성이 있다는 목회적인 문제로, 또한 주님께서 성체(떡) 안에 온전히 현존하신다는 신학을 근거로 신자들을 포도주의 성만찬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양형성찬(떡과 포도주의 성찬)의 규정을 완화하여 주교의 판단에 따라 서품미사, 수도자 서원미사, 세례미사 등 에서 성사를 받거나 서원을 한 당사자는 양형성찬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1970 년 『미사 전례서 총지침』에서는 이를 더욱 확대하여 세례, 견진, 혼인, 병자, 서품, 수도 자서원,독서직과시종직,선교사파견등의미사때에성사를받거나서원한당사자,대 부모, 부모, 교리교사 등에게 양형성찬을 허용하였다. 이밖에도 공동 집전미사, 피정미 사, 은경축이나 금경축 미사, 새 사제의 첫 미사 등에서도 당사자 또는 참석자들에게 양형성찬을 허용한다. 정의철, 『미사, 기쁨의 잔치』(서울: 생활성서, 2005), 92-93.
[미주 3] K. Barth, The Knowledge of God and the Service of God according to the Teaching of the Reformation, Recalling The Scottich Confession of 1560(London: Hodder and Stoughton Publishers, 1960), 211.
[미주 4] 세계교회협의회 엮음, 이형기 옮김, 『BEM문서: 세례.성만찬.직제』 (서울: 한국장로교 출판사, 1993),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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