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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진정 인격(人格, personality)인가?사유와 信學 2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 승인 2021.02.20 22:41
▲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격이란 무엇일까. 동서양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Getty Image

수수께끼로서의 인간의 인격

오랫동안 함께 해온 여성신학 그룹에서 분쟁이 생겼다. 이 분쟁에 접근하는 방식도 매우 다르고, 그 원인을 찾고 그러한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시도에도 큰 차이가 드러난다. 우리가 여전히 신학(神學)을 말하고, 화해와 협력, 하나 됨과 사랑의 이상(理想)을 말하지만, 우리 매일의 삶은 사그라지지 않는 갈등과 분쟁, 자기중심주의와 먹고 사는 일과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대한 염려와 관심으로 주를 이룬다.

베르댜예프는 이 모순과 갈등의 현실을 ‘인격(personality)’이라는 말을 화두로 삼아서 이해하고, 그것을 변혁시키기를 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바로 ‘인격’의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는 神과 같기도 하면서 짐승 같고, 숭고하면서도 비열하고,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할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몹시도 잔악하고 무한 이기주의일 수 있다. 특히 서구 근대에서 파스칼에 이어서 도스토옙스키, 키르케고르, 니체 등이 이 인간의 모순과 양면성을 잘 드러냈다고 지적하는데, 인간이 아무리 타락하고 저열해져도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거기서 벗어나기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인격 때문이라는 것이다(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지음, 이신 옮김, 『노예냐 자유냐』, 늘봄, 2015, 24쪽 이하).

그렇게 인간에게는 이 세계가 자족적일 수 없고, 그래서 이 세계를 넘고,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벗어나고자 하고, 끊임없이 여기와 지금을 초극하고자 한다. 인간이 자신 속의 온갖 모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갈등, 자신을 한없이 희생하면서도 동시에 절대 악처럼 극단적으로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것도 그가 동물이라거나 자연이나 사회의 일부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격’이라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인간은 인격으로서 하나의 “수수께끼(a riddle)”인 것이다.

자연과 사회의 일부가 아닌 세상 밖에서 침노해 오는 인격

이렇게 오늘 우리 사회에서 여러 차원으로 갈등과 분쟁이 비등하다 보니 그에 상응하여 사회뿐 아니라 교회와 신학에서도 ‘치유’라는 말, ‘상담’이나 심리치유 등의 언어가 대단히 유행한다. 물론 이러한 말이 오늘처럼 유행하게 된 데는 그 이유가 있고, 거기서의 이점이나 긍정의 측면이 있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도 오랜 기간 인간과 그 함께 모여 사는 일에서의 갈등과 모순을 더욱 세세한 개인 내면의 문제나 각자의 특수성의 차원에서 고려하지 못하고, 죄라든가 법, 기성적인 외형의 거대 담론으로만 처리해 온 것에 대한 반동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유행하는 그러한 처리 방식은 자칫 인간의 도덕과 윤리, 책임과 신앙적 결단의 문제나 사회적 관계의 물음 등을 온통 심리와 병리의 물음으로 환원시키고, 거기서 인간 고유의 책임성 있는 행위력과 수행능력은 한없이 축소되고 간과될 수 있다. 베르댜예프가 20세기 인류 삶의 중반에서 온갖 제국주의 전쟁과 비참,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뿐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의 폐해를 겪고서 대안으로 제시한 ‘인격’과 ‘인격주의’는 가장 먼저 바로 이러한 인간 이해에서의 자연주의와 심리주의를 반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에 따르면 인간에게서의 인격이라는 의식은 결코 어떤 세상의 산물이 아니다. 인간 자체가 그대로 인격이 아니므로 인격의 의식이 하나의 가능성이거나 불완전하게 발현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전혀 그 기원이 다른,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자연이나 사회의 소산이 아닌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not by nature but by spirit”)이라는 말로 먼저 밝힌다.

그는 그래서 이 인격을 세계에 들어온 “돌입(a break through)”이나 “침노(a breaking in upon this world)”라는 말을 써서 구술한다. 한 인간을 수수께끼로 만드는 인간의 인격성은 결코 자연이 아니고, 객관적인 계층체에 속해 있는 하나의 종속적인 일부분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계층적 인격주의(hierarchy)는 잘못된 것임을 강조한다. 대신에 인격이라는 것은 “단절(interruption)”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인격은 세계가 진화하는 가운데 생겨난 하나의 계기라거나 하나의 요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단한 연속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침입’이며 ‘돌파’이고, 진화에 대해서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의 인격성이 세상에 들어올 때 세상의 과정은 비록 외면적으로는 그 징후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혀 독특하고 반복 불가능한 것에 의해서 침노 당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무엇인가가 시작되고, 세상은 그로 인해 자신의 노선을 변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격을 “하나의 소우주, 완벽한 우주(a microcosm, a complete universe)”라고 칭하고, 그것은 결코 라이프니츠 등이 이야기한 단자들(monads)의 집합과 계층에 들어가 있는 하나의 종속된 단자가 아니다. 유사한 의미로 한나 아렌트가 어거스틴을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전체주의적 파국에도 불구하고, 바로 한 아기와 한 인간의 탄생이 지금까지 이 세상이 알 수 없었고 경험하지 못한 전적 새로움의 시작이고, 그렇게 새로움이 탄생했다는 의미에서 “기적”이라고 본 것과 유사하다(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역, 한길사, 2001).

인격주의(personalism)와 리기(理氣), 리일분수(理一分殊) 그리고 만물의 본성(性理)

이상과 같이 서구 기독교 전통의 사상가로서 베르댜예프가 인간의 인격을 이와 같은 정도로 높이는 것을 들으면 그것은 비록 그 초월과 神의 임재를 인간과 인격이라는 이 세상과 지금 여기로 내면화시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서구 기독교 문명의 초월과 내재의 이분법, 인간과 자연, 객체와 주체 등의 이원론(二元論)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양으로 보인다. ‘인격적’이라는 것, ‘주체’의 의식이 강조된 것, 자연이나 사회적 요소와 어떤 질적 연결도 먼저 부인한다는 것, 그런 것들이 모두 서구 전통적인 신학에서 주창되어온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다시 더 읽어내려가면 베르댜예프가 인간 인격의 초월성을 설명해가는 방식이 예를 들어 동아시아 신유교에서의 우주적 역(易)이나 태극(太極), 천리(天理)나 존재에서의 본체와 그 드러남(理氣), 특히 인간의 본성(性理)을 그려내는 언술과 매우 유사함을 볼 수 있다. 베르댜예프는 인격만이 우주의 내용을 종합하고, 우주가 그 개체적인 형태로서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임을 언술했다. 인격은 부분이 아니고 어떤 종류 전체에 대해서든 심지어는 무한한 전체이거나 전 세계에 대해서도 하나의 부분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인격의 본질적인 원리이고, ‘인격의 신비(mystery)’라고 하는데, 한 인간이 자연이나 사회라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 그 일원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종속되는 경우에도 인격은 거기서 제외되고, 그 종속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동아시아 신유교의 주자(朱子, 1130-1200)나 그 충실한 제자 퇴계 선생도 이와 유사한 구조로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그려냈다. 그 명징한 표현이 ‘리일분수(理一分殊, The Principle is one but its manifestations are many)’이다. 그것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은 하나이지만 밤에 이 땅의 호수와 물 위에 비추인 달은 무수한 것처럼 인간 본성에 새겨진 하늘의 달을 지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호수나 강, 바다에 떠 있는 달과 함께 선험적인 인간 본성뿐 아니라 그 미래성인 인간 상상에 뜨는 달이 강조되고, 또한 그에 의해서 창조된 AI(artificial intelligence)의 마음에도 달이 뜨니 전체와 부분, 보편과 특수, 하나(一)와 多의 관계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간다. 아니 그 본래의 ‘일(一)’이라는 것도 고정의 실체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理(원리)’라고 했을 것이고, 여기서 리의 다른 이름인 ‘태극(the great Ultimate)’을 넘어서 ‘무극(無極, No-Ultimate)’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의 처음은 어디이고, 시작이란 무엇이며, 왜 없는 것이 아니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우리의 답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 유학보다도 조선의 사고가들이 리기론(理氣論)으로써 인간 고유의 선험적 도덕성을 강조한 것과 연결해 보면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의 특성이 더욱 드러난다. 베르댜예프도 인격이라는 언어를 화두로 삼아서 먼저 인간 인격의 우주성과 궁극성을 한없이 드높였지만, 동시에 그 인격은 형식(form)과 제한(limit)을 상정한다고 밝혔다. 즉 인격은 개체적으로 반복 불가능한 형태를 가진 ‘보편(理)’이지만, 그 보편의 무한성은 개체적인 ‘특수성(氣)’을 가진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도 베르댜예프는 이 둘 사이의 관계를 편안하기보다는 서로 “모순”이라고 보면서 인간의 인격이 그 안에 형식과 개체적인 특수성의 한계를 지니지만, 그것이 결코 소우주로서 “유기적인 계층적” 사고 안에서 대우주에 종속된 하나의 일반성이나 보편성으로 보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 그래서 “인격은 우주의 일부가 아니고 오히려 우주가 인격의 일부이며 그 질(quality)이다”라고 발설한다. 이것이 “인격주의의 역설(the paradox of personalism)”이라는 것이다(같은 책, 28쪽).

조선 신유교 논의에서 인간 선함과 그 가능성을 내세우고자 어떤 경우에도 理의 독자성과 초월성에 대한 강조를 감하려 하지 않았던 퇴계 선생의 이기론을 생각나게 하는 이러한 입장에서 베르댜예프는 20세기에 들어서 점점 더 왕성해지는 인간에 대한 제반 과학 관념의 자연주의적 이해를 비판한다. 예를 들어 생물학, 심리학, 또는 사회학 등은 인간의 인격을 세계의 실존적 중심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객체와 동일한 계열의 한 객체와 실체로서 파악하는데, 그럼으로써 인격의 신비는 사라지고, 인격의 무한한 주체성 속에 감추어져 있는 실존의 비밀이 무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베르댜예프 시대보다도 제반 과학적으로 더욱 전개된 오늘날에는 더 세차게 반박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오늘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이 범람하는 시대에 인간 고유성과 존재의 반복 불가능성(realism)이 크게 문제시되고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퇴계 선생이나 베르댜예프의 주창이 더욱 경청된다. 인간의 존재를 철저히 자연과 사회의 소산으로 환원시킬 때 ‘인권’이나 ‘자유’, ‘미래’ 등은 온통 잿빛이고, 궁극적으로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격과 역(易), 그리고 창조적 행위력(性)

베르댜예프는 인격을 ‘易’으로도 말한다. 그것은 “변화하는 가운데 무변화요, 다양성 속의 통일(the unchanging in change, unity in the manifold)”이라고 밝힌다. 동아시아의 오랜 易의 세계관에서 그 易을 ‘변역(變易)’과 ‘불역(不易)’, ‘간이(簡易)’의 세 측면(三義)에서 밝히듯이 베르댜예프는 인격을 이와 매우 유사하게 변화 속의 변화하지 않는 것, 그러나 다시 변하지 않고 영속하려는 것을 해체하고, 저항하도록 하며, 초월하고 풍부하게 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인격은 하나의 동일한 영속적 주체의 전개로서 변화 그 자체가 바로 무변화의 영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같은 책, 29쪽). 즉, 변화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무변화라는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간단하고 평이한 원리를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찾는 현대 분석생물학의 언어는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이라는 말로도 표현했다(후쿠오카 신이치, 『생물과 무생물 사이』, 은행나무, 2008). 마치 바닷가 모래성의 존재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파도가 끝없이 오가면서 이미 있던 모래성의 일부를 덜어내고 다시 새로운 알갱이로 덧붙이는 변화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원리와 같다고 하겠다. 우리 눈에는 그 모래성이 항상 같은 모양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안다.

그 우주적 易의 원리를 ‘인격’, ‘인간적 원리’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여러 차원에서 베르댜예프의 독특성과 유의미성을 말할 수 있겠다. 그것으로써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서구 문명에서 과학(자연)과는 구별되는 인간과 실존’ 원리를 강조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고, 서구 세계관보다 더욱 자연주의적인 동아시아의 일반적 세계관에 대해서도 기독교 문명의 특수성을 담지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러한 베르댜예프를 동아시아 문명 중에서 특히 중화 역학과는 구별되는 한국 역학과 관계시켜 보면 또 다른 말을 할 수 있다. 즉, 퇴계 등에서 보이는 것처럼 易이나 태극(太極)을 만물 중의 理나 天理와 연결시키는 것보다는 인간 내면의 ‘성(性)’이나 ‘인극(人極)’ 등과 연결하면서 인간 마음속의 가치의식을 더욱 강조한 한국적 관점과 잘 통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댜예프가 神을 말하기보다는 세계 내적인 인격을 먼저 말하는 것이 한국의 초월과 하느님 의식이 ‘인(人/仁)’이나 ‘성(性)’, 또는 ‘효(孝)’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발전한 것과 잘 상응한다는 의미이다(류승국, “한국 역학 사상의 특질과 문화적 영향”,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 유교문화연구총서10, 유교문화연구소, 2008).

베르댜예프는 인격이라는 것은 어떤 경우이든지 이미 완결된 것이 아니고, 대신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인격의 완성된 통일과 전일성은 인간의 이상(ideal)이지만, 그러나 인격은 결코 부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인격은 어떤 부분에서 만들어진 집성체(composition)라든가 조성체(aggregate)가 아니라 처음부터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고, 모든 인격의 행위에서 전체로서 실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인격은 예외이지 법칙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동아시아의 신유교적 사고에서 만물의 理가 개별적인 존재의 차원에서 ‘형태(Gestalt)’를 가지는 고유성(性)으로 이해되듯이 인격이 바로 그러한 각 존재자에게서의 반복 불가능한 독특한 형식과 형태를 구성하며, 그를 통해서 각 인간 인격의 대체될 수 없는 일회성과 유일성, 어떤 다른 타자에 의해서 대신 될 수 없는 절대적 대체 불가능성이 바로 인격 존재의 비밀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 외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유전적인 것, 즉 역사, 전통, 사회, 계급, 가족에 속하는 일반적인 것은 인격이 구성되는 재료일 뿐이고, 진정한 인격적인 것은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하나의 ‘행위(an act)’, 곧 “창조적인 행위(a creative act)”로 드러나는 것임을 베르댜예프는 가장 힘주어서 선포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 『노예냐 자유냐』를 “나(자신)를 말하지 말고 나(자신)를 행하라, 너희는 창조적이어라(Sagt nicht Ich, aber that Ich, Sollt Ihr schaffende sein.)”라는 니체 『차라투스트라』의 한 문장을 표제어로 삼아 그 첫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인격 장을 연다. 말보다는 행위, 죽음과 사멸성 대신에 생(生)과 창조를 강조한 것이다.

마무리 성찰 

서구 기독교는 궁극을 초월적 神의 모습으로 그려주었다. 러시아 사상가 베르댜예프는 그 神을 급진적으로 내면화시켜 인간 내면의 ‘인격’으로 그려줌으로써 동아시아의 여러 사고와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훨씬 더 열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 인격의 핵심을 다시 ‘돌파’나 ‘침노’ 등의 언어를 써서 그 예외성과 질적 차이, 초월과 내면, 신과 인간 사이의 이원성(二元性)을 어떻게든지 놓치 않으려 하면서 인간 능력의 창조성과 행위력이야말로 인격의 진정한 현현인 것을 강조했다.

최근 귀천한 백기완(1932-2021) 선생의 시 ‘묏비나리’를 접하면서 그 첫 구절 “맨 첫발 딱 한발 띠기에 목숨을 걸어라”의 그 한발 띠기가 지금까지 살펴본 베르댜예프의 인격의 침노를 참으로 잘 표현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돌파의 새로운 시작, 새로운 창조의 행위로 지금까지의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들어 올리고, 돌리고, 엎어서 전혀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힘, 이것이 바로 인격의 힘이고, 인간 누구나가, “그냥 사람”이면 모두 그와 같은 창조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깊은 인간(人極) 신뢰(信)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도 “진짜 진보는 주어진 판을 깨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두 알듯이 그 시로부터 오늘은 한반도를 넘어서 전 아시아로 퍼져나가 온갖 세계의 노예성을 극복하고 자유의 항쟁을 이끄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나왔고, 그 노랫말의 구절에서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라는 말로 모두의 인격의 결단과 창조의 행위를 역설하고 있다. 나는 우리가 오늘도 이러한 부름에 답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지, 그것이 인격의 힘이라고 했다면, 그 인격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도 작동할 것이며, 그 모습이 어떠할지를 더 알고 싶다.

동아시아의 신유교적 언어와 함께 보면 베르댜예프는 ‘인간’의 ‘인격’에서 초월과 궁극을 보았고, 그러한 방식으로 神과 하느님에 대해서 언술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까지의 서구적 인습적 신학 언어를 답습하지 않고 이 세계 내의, 인간 내의 창조력을 말함으로써 그는 더 이상 神學의 언어가 아닌 信學의 언어를 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요사이 많이 회자되고 있는 다석 유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 선생의 언어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고 보는데, 그 역시도 無와 有, 없음과 있음, 영원과 시간, 궁극과 탄생의 긴장성 속에서 참으로 뛰어난 창조적 행위자의 언어를 남겼다. 그러한 모든 인격의 언어가 어떻게 가능해졌으며, 거기서 어떻게 전복과 창조, 새로운 자유와 정의의 공동체가 이루어졌는지를 계속 찾아보고자 한다.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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