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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조사 김계안에 대한 연대별 기록20세기 초기 북간도 장로회 선교의 개척자 김계안 조사 ⑶
이이소 | 승인 2021.02.27 15:49
▲ 성진 시위 주동자들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거사 계획을 논의한 그리어슨 목사 사택. ⓒ‘성진시사’

불교의 예식과 공동생활에서 평화를 누리지 못했던 청년 구도승 김계안은 해탈을 소원하며 백두산에 올라가 백일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 백일기도에 실패를 하였다. 낙심한 그는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불렀다. “하나님”을 부르며 평화와 고요를 체험한 그는 스님의 옷을 벗어버리고 1902년에 고향 성진군 학남면 예동으로 돌아왔다. 그가 고향에 도착하였을 때 마을에는 1년 전에 세워진 예동교회가 그를 맞아 주었다.(1)

그 때 마침 선교사 구례선이 외동(예동)에서 성진의 병원과 집 건축을 위해 목재를 구입하여(2) 재목으로 다듬고 있었다. 그는 일하고 있는 목수들과 자연스럽게 만났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목수들은 그에게 친절하고 따스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하며 섬기는 일상의 기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주었다.

그는 인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하나님께 매료당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영적 갈망으로 선교사 구례선을 찾아갔다. 그는 김계안의 영적 탐구를 이해하고 그의 요리사(3)로 곁에 두며 그를 지도하였다. 그리고 1902년 또는 1903년에 요리사인 그를 그의 북간도 여행에 동반하였다. 그 후 1906년에는 그는 조사로서 구례선을 따라 용정시교회(4) 설립예배에 참여하였다. 이상으로 조사 김계안의 개종과 그의 하나님에 대한 구도와 믿음의 히스토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이제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의 조사 김계안에 대한 기록을 연대별로 찾아보고자 한다.

“1909년, 길주군 옥보동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전도인 김계안이 선교사의 파송을 특피하야 차처에 복음을 래전하니 신자 팔구인이 계흥이라 교회를 설립하니라”(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 상 387쪽)

“1909년, 명천군 아간장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전도인 김계안과 이종범이 선교사의 파송을 병피하야 차처에 복음을 래전할새 당시 용암 김하력과 기동 최종륜, 최극륜과 황곡 김용봉, 장익주 등이 병신하야 열심히 전도함에 이상 3처에 각기 교회를 설립하고 각 예배당을 건축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87쪽)

“1909년, 중국 동만주 용정시교회에 조사 김계안이 이주하야 간도지방에 순회 전도하니 교회대진이러라. 개 김군은 본시 불교인으로 아교에 투입하야 진리를 심구하고 전종에 열심하야 다년 권서로 근무하더니 도금 조사로 담임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90쪽)

1909년에 그가 전도했던 마을에 옥보동교회, 아간장교회 3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의 제자들로 인하여 3개의 교회 설립이 추가되었다. 그는 함경대리회의 파송으로 용정시교회 조사이면서 간도지방을 순회전도하는 전도인으로 파송을 받았다.

그 이전의 북간도 전도자들은 개인적인 열정으로 일시적으로 복음을 전했으나 김계안은 권서인이자 조사로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공인으로서 북간도 1호 전도사가 되었다. 얼마나 그가 열심히 전도하였는지 1917년(5)사기의 기록자가 “김계안이 이주하야 간도지방에 순회전도하니 교회대진이러라”라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마치 사도행전이 북간도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는 듯하다. 당시 함경대리회가 간도에 전담 거주 전도사를 급히 파송한 것은 조선의 불안한 정세와 관련이 있다.

헤이그밀사사건 이후 고종의 강제 퇴위와 정미7조약으로 인해서 군대가 해산되고 경찰권을 빼앗기고 나라가 주권을 잃게 되자 많은 백성들이 간도로 이주하여 1909년 연변지역의 조선인들의 숫자가 무려 19만에 육박하였기 때문이고(6) 캐나다 선교부 산하의 지교회 교우들이 북간도로 이주하면서 전도자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길동기독전도회> 또한 북간도의 이런 상황 속에서 조직되었을 것이다.

“1910년, 명천군 화태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교인 이두섭, 김문운, 김계안. 김택서, 지정화 등이 본군 각처에 편행 전도할 새 당시에 본처 신자가 점흥이라. 신자 주자명 가에서 회집이런 기후 독신자 홍재우가 차처에 이래하야 교회를 진흥케 함으로 교회가 득력하야 거액을 연보하야 10간 예배당을 신축하고 교직을 선정이러니 미기에 교내에 요사가 현출하야 신자타락어러니 유행 손용한, 이승혜의 열성안위를 득뢰하야 교회가 근보하야 광현교회와 협력하여 이영수를 조사로 연빙하고 김씨 신항을 전도로 시무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상 392쪽)

“1910년, 경흥군읍교회가 성립함. 선시에 신자 김계안이 본읍에 래도하야 복음을 전파할 새 흥명야학교장 김태훈과 교사 김문협17인이 동시결신하야 야교강당에서 예배하야 교회를 설정하니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93쪽)

1910년, 그는 북간도에서 살며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그가 과거에 뿌렸던 복음의 씨앗들이 열매를 맺어 화태교회와 경흥군읍교회가 세워졌다. 1910년은 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 뼈아픈 해였다. 조선인들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고하를 막론하고 의기소침에 빠졌으며 절망으로 허덕거렸다. 그러나 교회는 1907년의 부흥을 기억하며 국가적 위기의 돌파구를 복음 전파를 통해서 찾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910년 독노회가 선천에서 회집하여 100만 명 전도운동을 시작하고 목사 김영제를 북간도에 전도목사로 파송하기를 결의하였다.(7)

캐나다 선교부도 이에 호응하여 선교사 등이 지리를 순찰하고 구역을 획정하야 성진항 중심지를 삼고 북창, 이원, 단천, 삼수, 갑산, 길주, 명천, 경성, 부령,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 동만주, 해삼위 등지에 전력전도를 하며 <3국 전도회>를 조직하야 각처에 파송하였다.(8) 독노회가 파송한 목사 김영제는 북간도 1호 전도목사였다. 그러나 그는 김계안과 달리 이주하지는 않았다.

“1911년, 중국 동만주 적안평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전도인 김계안이 시처에 전도할 새 김봉렬이 시신하고 기후 신도가 계흥하야 40여인이 기달한지라, 목사 김영제가 래순하야 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당을 신축한지라. 후래 목사난 부두일과 김내범, 이하영, 최덕준이오 장로난 이태현, 염창화, 최봉렬 이니 상계근무하야 교회 전진이러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97)

북간도에 와서 거주를 시작한지 2년 되는 1911년에 그의 전도를 받고 결신한 교우들에 의하여 적안평교회가 세워졌다.

“1912년, 명천군 상가면 와연동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김계안, 이동휘. 김문삼, 김택서, 이종화, 이종범 등이 전도하여 근방각처에 설립하게 됨으로 와석촌에 교회가 설립되니 동시에 가장동에도 교회가 시작되어 이기재 댁에 회집하여 예배 보다가 시세에 따라 각처에 교회가 왕성하다가 고래의 제사문제로 퇴교하는 자가 다수함으로 교회가 자연 폐쇄하더니 시년에 평양 김영준 목사가 동 지방에 내임하여 순찰하게 되매 우 5동을 연합하여 교회를 조직하고 가장동 이기재 댁에 임시로 회집하게 하다. 동시에 와석동에 괴치한 예배당 재목을 운반하여 가장동에 건축하려고 하매 일동이 이가의 제목이라고 칭하고 반항함으로 성진선교부에서 성진경찰서에 고소하여 당서의 설유로 무사히 동 9월에 설립되어 헌당을 거행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56쪽)

1912년에 세워진 와연동교회는 수 년 전에 성진지역 조사들과 함께 공동으로 복음을 전했던 상가면 와연동에 세워진 교회이다. 성진지역 조사들의 헌신과 합심 기도가 결실된 것이다.

“1913년, 동년에 간도 구세동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이종식 등 십여 인이 당지에 내왕하여 중국인으로 토지를 매수하고 도명을 ‘구세’라 칭하고 합심 협력하여 예배당을 건축하고 교인이 증가됨에 교회가 성립되었고 김내범 목사와 부두일선 교사, 박걸 선교사, 김계안 조사가 교회를 연속 순시하였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58쪽)

“1913년에 간도 용정시교회에 선교사 박걸이 역 내왕하여 전도에 착수하였으며 계속하여 부두일과(W. R. Foote), 서고도(William Scott), 배례사(Edward J. O. Fraser) 등이 연접 내도하여 교회를 임무하였고 금년에 함경노회가 파견한 전도목사 김내범도 내차하여 많은 교회의 설립자가 되었으며 동시에 조사 김계안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조직 되며 강두화, 정재면, 박상룡, 김선관, 황신기, 김여용, 한덕일, 김택근, 이태준, 장석함 등이 상계하여 장로직에 임무하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59쪽)

1913년에 세워진 구세동교회는 그의 전도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사기에 기록된 대로 교우들을 격려하며 갖가지 민원을 해결하며 고충을 상담하기 위하여 자주 순회하였다. 1913년에 김내범 목사는 함경노회 파송 북간도 전도목사가 되어서 북간도 선교에 많은 책임을 졌으며 선교사 박걸은 1913년 6월6일에, 부두일과 배례사는 1914년 초에 용정으로 이주하였다. 서고도(윌리엄 스코트)는 계속 순회하며 일하였으나 1922년에 이주하여 용정은 탄탄한 인적자원을 갖추어 북간도 선교부로 손색이 없게 되었다.

김내범 목사는 교회 설립 7주년을 맞이하여 조사 김계안을 장로로 선임하여 용정시교회의 당회를 조직하였다.(9) 그 뒤를 이어서 많은 장로들이 세워졌으며 용정시교회는 북간도의 중심교회로 성장하였으며 북간도 전체교회를 지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중심에서 조사이자 장로인 김계안이 있었다.

1914년 8월 26일 함경노회 제4회 정기노회가 함흥 신창리 예배당에서 목사 회원 10인과 장로 13인으로 모였다. 당시 함경노회에는 29명의 신학교 지망생이 있었다. 장로 김계안의 이름이 그 지망생 명단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다음 해 신학생 계속 추천자 명단에 이름이 누락된 것으로 보아 신학 공부를 도중에 그만 두었거나 아니면 그에게 주어진 신학교 이수과정이 1년 과정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학생 취교자 강두화, 강두송, 채필근, 이두섭, 이정화, 김택서, 최기준, 한원칠, 김중석, 김현찬, 김광표, 이명봉, 오문근, 박명석, 김은석, 이순영, 김리현, 홍기순, 김여용, 김창현, 장례학, 김두석, 김정현, 정해룡, 강찬우, 김응길, 정기헌, 김계안 범 29인이더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49, 350쪽)

“1917년, 간도 낙타하교회가 설립되다. 선시에 김계안이 전도하므로 교회가 설립되고 집사 이기홍이 인도한 후 점점진진하다.”(조선예수교장로회하, 367쪽)

1917년 김계안의 전도로 낙타하교회가 세워졌다. 1920년 9월18일 제6회 노회가 선교사 2인, 목사 5인, 장로 9인이 모여서 회령예배당에서 열렸다. 노회는 포썻트에 파송된 조사의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김계안을 특별위원으로 선정하였다. 그는 문제 해결을 위해 연해주에 있는 포시에트를 찾아가 일처리를 할 만한 경험과 지혜와 능력이 있는 일꾼이었다.

“포썻(보써)트에 파송한 조사의 성적이 양호하지 못하다하여 특별위원 강두화, 김계안을 택하여 사실을 조사한 후, 전도국위원에게 보고하게 하여 관리할 것과 포시에트 전도비용은 부활주일 연보와 성신강림주일을 전부 쓰기로 결의하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594쪽)

 

미주

(미주 1)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145쪽.
(미주 2)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 사람들>, 122쪽.
(미주 3) 로버트 그리어슨,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37쪽.
(미주 4) 연변에서 나온 문사자료 제 8집에 용정시교회는 1906년에 홍순국과 박무림에 의해 건립되었고 용정중앙교회는 1907년에 정재면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정리되어 있다(연변문사자료8짐, 118쪽).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227쪽〉용정시교회 설립자를 구춘선과 이보연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용정중앙교회 건립자는 정재면으로 나온다. 
(미주 5)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편찬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1916년이었다.
(미주 6) 심영숙,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31쪽.
(미주 7)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243쪽.
(미주 8) 차재명 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99, 340쪽.
(미주 9)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서는 김계안이 용정시교회의 장로로 임직되는데 룡정문사자료 2집과 연변문사자료 8집인 종교사자료집에는 룡정중앙교회 장로로 나온다. 용정시교회와 용정중앙교회가 시작은 다르게 했지만 도중에 한 개의 교회로 합해진 것인지 아니면 도중에 한 개 교회가 문을 닫은 것인지 아니면 어느 한 쪽의 기술이 잘못된 것인지를 속히 찾아내야 한다.

이이소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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