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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가르침과 대결하라자기만족과 경건(디모데전서 6:3-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2.28 02:31
▲ 그리스도인은 끊임없이 가이사냐 그리스도냐 사이를 선택해야 한다. ⓒGetty Image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에 저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냈던 편지, 디모데전서를 통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서신을 통해 말씀을 전할 때 가장 어려운 부분은 각각의 서신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전후서는 고린도교회에 발생한 어떤 문제에 대한 답변을 주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의 스페인 선교를 위한 준비 과정 속에서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디모데전후서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로 보낸 자신의 동역자 디모데를 권면하기 위해서 적은 편지입니다. 그래서 서신들에 기록된 말씀들을 일반화해서 모든 교회에 적용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각 서신의 수신자인 교회들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면, 서신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우리는 서신에 나타난 여러 말씀 안에 담긴 핵심을 찾아내고, 그 핵심을 우리 신앙에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서신을 해석하여 전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디모데를 둘러싼 현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말씀도 디모데가 속해 있는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잘못된 진리를 전하며 자신의 부를 쌓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거짓 형제들’과 같은 사람들일 수도 있지만, 본문에 담긴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그리스 철학을 가르치던 이들로 보입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는 오늘 본문뿐만 아니라, 디모데전서 1장 3-4절에도 나타납니다. 사도 바울이 부유함을 쫓는 사람이라고 칭하는 이들과 잘못된 교훈을 전하는 이들은 같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비판하며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전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치며 부를 쫓는 이들에 대한 비판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핵심은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잘못된 교훈에 유혹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은 ‘바른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으면’으로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못된 교훈을 쫓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성경 원어에 대해서는 가끔씩만 말씀드리는 편인데, 오늘 본문은 원어를 함께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바른말’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기아이누신 로고이스(ὑγιαίνουσιν λόγοις)’은 직역하자면 ‘건강한 말씀들’입니다. ‘휘기아이노(ὑγιαίνω)’는 몸이 건강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육신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의미이겠지만, 반대로 잘못된 교훈은 우리의 육신까지도 망가뜨린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다음으로 ‘경건’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경건은 헬라어로 ‘유세베이아(εὐσέβεια)’입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는 보통 ‘godliness’나 ‘piety’로 번역되고, 우리말로는 ‘경건’, ‘신실함’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런데 본래 그리스 철학에서 ‘유세베이아’는 마음의 상태를 뜻하는 표현이라기보다 신을 향한 두려움과 그에 따른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어떻게 신을 경배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뜻합니다. 행동이 없는 마음가짐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런 단어가 초대 교회에서 사용되는 과정에서 행동의 의미는 사라지고 마음가짐의 의미만 남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리스 사상을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했으리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3절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은 말씀과 신앙 행위를 구분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4절과 5절의 말씀은 잘못된 교훈을 쫓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교만해져서 진리를 알지 못하고, 변론이나 언쟁을 좋아하기에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을 품게 됩니다. 이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이 채워졌기 때문에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이 말씀은 가르치는 사람, 목회자를 향한 말씀으로 한정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런 한정을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이런 교훈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악한 마음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9절에 나타난 ‘부하려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는 본래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을 향한 비판이겠지만, 이는 잘못된 교훈을 듣고 부유함에 집착하게 되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경고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유함을 쫓게 된다면, 돈을 사랑하여 잘못된 교훈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 삶은 그것을 추구하는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앞서 말한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마음, 다툼입니다.

사도 바울은 9절과 10절에서 경고합니다. 부유함을 쫓는다면,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며, 이는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파멸과 멸망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아마 이런 맥락에서 육신의 건강을 뜻하는 ‘휘기아이노’를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길에 들어서지 않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6절의 말씀을 남깁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자족하는 마음’은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는 ‘지족하는 마음’으로 번역되었었는데,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만족한다는 뜻으로 ‘자족하다’와 의미가 거의 같습니다.

이때 사용된 헬라어 ‘아우타르케이아(αὐτάρκεια)’는 분수를 지킨다는 의미는 아니고, ‘스스로 충분해진다’는 뜻에서 ‘자기만족’을 뜻합니다. 이 단어도 스토아 철학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스토아 철학에서 ‘아우타르케이아’는 모든 외부 세계로부터 독립되어 자신의 선행에 의존하여 만족하며 살아가는 단계를 뜻합니다.

세계와 대결하는 바울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 속에서 사도 바울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용어의 의미를 바꾸고 확장합니다. 이를 통해 스토아 철학자들의 가르침을 비판합니다.

이런 방식은 사도 바울이 종종 사용하는 수사법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사용되던 단어, 반대자들이 사용하는 단어의 의미를 변화시키거나 확장하면서 반대자들을 비판하고,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말씀의 본뜻을 전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가’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 이전에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처형 사건은 아니었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라는 단어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사도 바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 이후 우리는 ‘십자가’를 처형 도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구원의 징표로 이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를 처형한 로마를 우습게 만들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드러낸 사도 바울 수사법의 성과입니다.

스토아 학자들이 말했던 자기만족이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자신을 독립시키는 행위이며 자신의 선행으로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소리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외부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의 삶을 말합니다. 성도들 간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선함은 스스로 평가할 수 없으며, 스스로의 평가에 의해 만족한 삶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판단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족할 수 있게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채워주시기에 우리는 더욱 경건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의 만족이라는 말을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경건함’으로부터 채워지는 만족이라는 의미로 바꿉니다. 7-8절에 나타나듯이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셨음에 대한 만족으로 의미를 바꾸었고, 이와 함께 경건한 삶을 산다면, 오히려 더 많은 것들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경건’, ‘유세베이아’의 개념도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의미와 다릅니다. 본래 ‘유세베이아’는 예배, 기도, 금식과 같은 특정 행위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넘어 삶 전체에서 보이는 행동을 경건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최근에 들었던 생각입니다. 어느 시대건 젊은 사람과 나이가 든 사람의 생각은 다릅니다. 사고 체계도 다르고 추구하는 바도 다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딱 한 가지는 남녀노소 없이 같은 생각인 듯합니다. ‘돈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계속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를 추구하는 삶이 잘 사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돈을 추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디모데전서를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몸까지도 망치는 생각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리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소리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안에서 받으신 것으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섬기실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날마다 더 큰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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