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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 진화론의 담론전쟁성서는 창조적 진화의 역사를 수용할 수 있는가?
이호재 원장(자하원) | 승인 2021.03.02 16:00

인간은 광대한 우주 속에 지구라는 혹성에 살고 있다. 과학은 우주 공간과 입자 세계의 거리 확장과 시간의 가속화를 실증함에 따라 인간의 인식체계는 폭발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인식공간의 확장과 체감시간의 가속은 의식의 흐름이 분절적 세계관에서 통합적 세계관으로, 배타적인 사고에서 회통적인 융합사고로 귀결을 지향하게 마련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평행선 담론도 새로운 인식체계를 가진 통합적 사고로 해결점을 모색해야 한다.

‘육을 영으로 거두는’ 창조적 진화의 역사

한밝우주역사관은 과거의 영원에서 미래의 영원으로 ‘창조적 진화’를 하는 나선형 역사관을 바탕으로 영성(靈聖)우주와 시공우주를 아우르는 통합우주를 상정한다. 우주의 역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한한 영원회귀의 동심원의 역사로 보이지만, 시공우주인 지구의 역사는 “선사시대, 역사시대, 영의 시대”로 발전하는 ‘창조적 진화’의 역사를 한다.(미주 1) 나선형 역사관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통합우주는 수직으로 보면 발전과 변화가 없는 동심원의 역사로 보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열린 미래를 향한 벡터형의 역사를 나타낸다.(아래 그림 참조)

통합우주는 물질과 식물, 동물, 인간, 신성 등 만물을 총망라한 관계 속에서 개체이자 전체인 거대한 존재의 관계망인 우주 유기체로 형성되어 있다. 이런 사고의 유형은 신플라톤 학파인 플로티노스(Plotinos, 205-270)가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가 상위의 존재는 하위의 존재 속성을 포함하여 초월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존재의 대사슬(great chain of being)’을 말하는 데서 유래한다. 현대에는 통합 영성가인 켄 윌버(Ken Wilber, 1949- 생존)가 하위의 존재는 상위 존재 속성이 잠재되어 있기에 잠재성이 구현되면서 진화한다는 개념을 도입하여 ‘존재의 대둥지(great nest of being)’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최민자는 ‘초연결세계와 신인류의 연금술적 공생’란 부제로 『호모케넥투스』(2020), 그리고 『빅 히스토리: 생명의 거대사, 빅뱅에서 현재까지』(2018)라는 우주 관계망 속의 인간 존재를 그려내고 있다. 이런 인류의 공감의식은 분절적 세계관에서 통합적인 구심력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존재의 유기체적 호응 관계로 형성된 통합우주에서 ‘창조적 진화’의 역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적 목적에 의해 탄생한 필연적 존재인가? 아니면 인간 자체에 내장된 생의 약동(élan vital)과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생존기계인가? 더 단순하게 말하면 인간은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는가? 혹은 자연 진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우연의 산물인가? 혹시 독자들은 케케묵은 정보라고 식상할지 모르지만,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은 오늘날에도 생물학자와 신학자를 포함한 인문학자 간에 접점을 찾기 힘든 논쟁의 최전선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구 담론이지만 이로 촉발된 진화론적 사고는 미래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바탕 사고의 유형이다.

『종의 기원』(1859)에서 촉발된 진화론은 토마스 헉슬리와 올더스 헉슬리의 진화사상의 대중화로 창조론과 대립 관계에 있다. 1860년 옥스퍼드대에서 열린 토마스 헨리 헉슬리와 윌버포스 주교와의 ‘원숭이 논쟁’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기적 에피소드이다. 최근에도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선풍적 열기와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통섭: 統攝)’이란 용어의 적합성과 생물학이 주도하는 일방적인 환원적 통섭에 다양한 분야의 학자가 사회논쟁으로까지 전개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생명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로봇공학과 결합한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이론상 영생의 존재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전통신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타락한 인간이 ‘영생의 존재’를 창조하며, 그 창조물로서 인간 자신이 영생을 추구한다는 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즉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인간의 후예가 과학적 무기로 생명과의 과실을 인류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과학적 유토피아의 세계에 우리는 진입하고 있다. 현대학문이 넓혀준 사유공간에서 우주, 신, 인간, 생명에 대한 전면적인 재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인간의 지성이 밝혀낸 과학적 발견과 발명에 대해 해석되지 못한 채 ‘떠도는 유령’들이 오죽하면 지적설계론에 기반한 창조과학이라는 ‘사이비과학’의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을까를 곰곰이 성찰해 보아야 한다. 창조과학은 인간 이성의 패배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창조와 진화, 진화와 창조는 과연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가? 변찬린은 이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창조적 진화’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개념의 제시뿐만 아니라 이를 성서해석에 직접 적용한다. 잘 알다시피 ‘창조적 진화’는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주저인 『창조적 진화(L'Evolution Creatrice)』의 책명이다.(2) 그는 물질과 생명의 간격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또한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이자 고고학자이며 고생물학자였던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은 지질권(geosphere), 생명권(biosphere), 정신권(neesphere)이라는 ‘인간의 현상’을 진화론적 개념을 가지고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해 신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 가톨릭 사상가이기도 하다.

변찬린은 앙리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라는 용어를 차용하고,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고생물학적 발견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그의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3) 그러나 그가 말하는 ‘창조적 진화’는 기계론적이거나 유물론적 진화론과 사회진화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창조과학식 발상을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거대한 우주 유기체의 순환 고리 속에 물질과 생명과 영성의 ‘비약’에는 창조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02)가 주장한 “종은 오랜 기간 안정된 형태를 유지하는 평형 기간이 갑자기 단속되면서 다른 종으로 변한다”라는 단속 평형설은 창조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가설 가운데 하나이다. 이처럼 고생물학자가 아직도 찾지 못하는 화석의 ‘잃어버린 고리’는 창조성이 발현한 흔적이다. 변찬린이 말하는 ‘창조적 진화’에는 물질, 생명, 신성의 유기체적 순환고리에서 상태의 변화, 생물계의 종(種)과 종(種)사이의 존재론적 비약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합목적성을 가진 창조성이 개입한다고 말한다.

제가 진화라는 말을 쓰는 것은 보통 과학자들이 쓰는 그런 진화하고는 다릅니다. 찰스 다윈이나 라마르크 같은 유물론적인 진화론이라는 것은 물질이 어떤 우연한 기회에 생명으로 진화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우연 속에서 무슨 생명이 탄생했다. (생명)은 우연으로 탄생할 수 없는 거에요.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아메바를 짓고, 그 다음에는 아메바를 기초로 해 가지고, 그 다음 단계의 생물을 지을 때는 반드시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가해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도약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의 단계에서 우연히 진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이 속에 가해질 때, 그 다음 단계의 동물로 진화하고, 그 다음에 또 하나님의 능력이 가해지면서 다시 이렇게 나아가고, 마지막에 인간에게까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그래서 이것을 저는 창조적인 진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가해지지 않는 진화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4)

변찬린의 우주생명체의 ‘창조적 진화’에 대한 사색은 정밀하고 진지하고 웅장하다. 특히,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의 제4장과 적지 않은 부분에서 수성권, 광물계, 식물계, 동물계, 인간계 등의 생명권, 하늘에 있는 별, 성운 등에 대해 사색을 하며 존재의 유기체적 사슬이 ‘영차원(靈次元), 성공간(聖空間)’인 ‘하나님 권(圈)’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 하나의 예이다.

모든 존재들은 곤히 잠자며
현상의 밭에 나란히 누워
열린 미래를 향해 큰 꿈을 꾼다.

바위의 원(願). 나무를 꿈꾸고
나무의 아지(兒支). 학을 꿈꾸고
원숭이의 몸짓. 사람을 꿈꾸고
사람의 사고, 초인을 꿈꾼다.

이승 잠 저승 잠 엇바꿔 자며
화사(花蛇)에 휘감겨 가위눌려도
진수렁 어수선한 잠자리에서
환한 화서(華胥)(5)씨의 길몽을 깨면
드디어 나는 초인이 되어 눈을 뜨리.

바위의 잠에서 사람의 잠까지
사람의 일몰에서 초인의 아침까지
나는 꿈을 먹고 살아온 꿈꾸는 존재.
무덤 속 마지막 한잠을
하나님이 흔들어 깨우리니.

- 변찬린, 『선,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85-86

물질에서 신성으로 발전하는 ‘존재의 대 사슬’의 도식은 생명의 다양한 형태인 ‘에너지 불변의 법칙’에 바탕을 둔 영성(靈性, spirituality)담론(6)의 연장선상이다. 종교에 따라 다양한 표현을 하는 ‘에너지’는 온도와 압력 등에 따른 에너지의 응축 정도, 물질과 인간 등 다양한 담지체의 종류, 생명체 자체의 에너지에 대한 통제와 조절기술 등은 에너지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존재 양태를 가진다.

인간은 죽은 후에 ‘영혼’이 혼백으로 기의 응축과 분산에 소멸한다는 유교적 세계관, 열반에 들기 전까지는 ‘영혼불멸’한다는 윤회적 세계관, 죽은 후에 ‘영혼’이 하늘나라에 간다는 그리스도교의 피안적 세계관의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거시적인 ‘존재의 대 사슬’ 혹은 ‘존재의 대 둥지’라는 존재론적 사유에서 물질, 생명, 신성으로 발전한다는 벡터적 발전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변찬린은 종교적 인간은 생명권과 영성(靈聖)권을 교류하는 ‘존재탈바꿈(존재변형)’의 양태로 현현(顯顯)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문제는 인류의 생사담론 혹은 영생담론에서 중차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에 다음 회에서 별도로 살펴보기로 한다.

변찬린은 ‘육으로 심고 영으로 거둔다’는 담론을 창조적 진화의 역사로 이해하지만, 역으로 “영 곧 육, 육 곧 영”이라고 하면 “순수한 물질도 없고 순수한 정신도 없네 (중략) 실상의 다리, 고요한 난간에 기대서서, 나는 조망하리, 정신과 물질이 합류하는 생명의 강을…(후략)”이라면서 생명의 찬가를 부른다. 존재가 존재 자체로 발현하는 통합우주는 생명의 우주이다.

분절적 인간은 이분법적이고 배타적인 사고를 가지고 ‘소실된 존재 고리’를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통합적 인간은 풍류적 심성으로 유기체적 관계망인 우주의 ‘존재론적 신비’를 해석한다.

변찬린이 ‘창조적 진화’를 성서해석에 적용한 사례

‘창조적 진화’를 성서해석에 적용은 가능한 것일까? 변찬린은 “성경은 성경으로 풀이해야 한다”는 성서해석의 원칙을 바탕삼아 성서에 담긴 맥락을 발굴한다. 그는 성서적 의미의 아담을 해석하는데 고생물학과 문화인류학의 진화론을 결코 배격하지 않는다. 첫 인간(류)인 아담의 존재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창조와 진화’의 모순을 해결하는 단서이다. 수백 만 년 전부터 있던 원시인류와 “지금부터” 성서연대로 육천 년 전 아담의 시간적 괴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을 한다. 이어서 성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구도의 문서이기에 성서에 인간으로 처음 등장하는 아담은 생물학적 의미의 원시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한 최초의 인간이라고 정의한다.(7) 즉 하나님을 인식하고 찾아가는 인간이 바로 ‘사람’이라고 해석한다. 원시광야의 수많은 원시인은 생물학적인 인간이지 성서적 의미의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아담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94.

원시광야에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생물학적 인간과 하나님을 인식한 구도자 아담은 동일 지평의 인간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언어를 빌리면 신약시대인 지금도 예수가 가르쳐 주었다는 ‘주기도문’과 산상수훈 등을 신앙하고 실천하는 신약적 인간이 있고, 아직도 구약의 십계명을 율법으로 고수하는 구약적 인간도 있고,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고 신행하는 새 시대의 인간이 공존하고 있다. 이처럼 제도종교의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하더라도 동일 지평과 차원의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변찬린은 6,000년 전의 아담은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가르는 창조적 진화의 첫 인간(인류)이며, 역사시대와 영성시대를 가르는 첫 사람을 ‘예수’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를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라고 하지만, 아담과 예수를 동일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거짓 예수’와 재림 예수를 ‘제3의 아담’이라는 잘못된 아담관으로 오해할 수 있음을 비판한다. 아담은 여섯째 날에 흙으로 창조된 피조물(창 2:7), ‘흙으로 빚음 받은 존재이며 땅에서 난 자(고전 15:47, 요 3:31), 죄로 죽은 자(롬 5:12)이며,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 요 1:14, 잠 8;22-39), 하늘에서 난 존재요 위에서 난 존재이므로 만물 위에 계시는 분(요 8:23), 죄도 흠도 점도 없는 청정무구한 분(벧전 1:19)라고 비교분석하고 있다.(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213-216)

성서적 언어에서 ’아담과 예수, 그리고 인류‘는 창조적 진화의 역사인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와 영성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종교적 인물이다. 아담은 역사시대의 시조로서 구도를 완성하지 못하고 타락한 역사적 인간이며, 예수는 인간의 자리에서 구도를 완성한 신인(神人)으로 영성시대의 첫 ’인간‘이다. 변찬린은 장대한 인류의 창조적 진화의 역사적 파노라마를 변찬린은 다음과 같이 성서해석을 한다. 다소 길지만, 그의 맥락을 곡해하지 않기 위하여 원문을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기로 한다.

창조적 진화의 계통수(系統樹)를 보아라. 아메바로부터 영장류로 창조적 진화를 하기 까지 수십만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영장류의 가지에서 인간이 발생하기까지 또 수백만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원인(原人)의 맨 윗가지에서 호모사피엔스가 발아되기까지 또 수만 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호모사피엔스의 연한 가지에서 아담이 돌현(突現)하기까지 또 얼마나 세월이 흘러갔던가?

이 생명의 계통수를 보면 모든 생물의 존재는 그 뿌리를 흙에 내리고 있다. 모든 생명은 흙에서 발생한 존재들이다. 또 이 생명의 계통수는 연쇄된 유기체의 고리(環)들이다. 아담은 아메바로부터 발아된 생명의 계통수의 맨 윗가지에 꽃핀 존재였다. 

*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이 성구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짓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했다. 이 말씀은 아담 이전의 인간은 생령의 존재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아담은 생명의 계통수 맨 윗가지에 핀 단순한 생물학적 의미의 존재가 아니고 그 속에 생령이 주입된 자였다. 생령이 된 존재는 그 뿌리는 흙에 박혀 있지만 그 열매는 물질의 차원을 떠나 영의 차원에 수렴됨을 의미하고 있다.

생물이 창조적 진화한 상향(上向)의 끝이 아담의 생령이고 생령이 하향(下向)한 밑바닥 근저는 물질이다. 곧 흙이며 육신이다. 그러므로 육신과 영혼은 두 가지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한 실체의 두 끝(極)인 것이다. 흙(물질)인 육신의 상향한 끝이 생령이며 생령이 발생한 뿌리는 육신인 것이다.

인간이 죽음의 존재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육신은 생령의 열매로 변화받아 신령한 몸으로 돌변할 수 있었는데 타락으로 말미암아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비 본래적 고통을 잠정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육신과 영혼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이 분리되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아담의 의식 속에는 전 생물계의 의식이 농축되어 있다. 아메바로부터 원인에 이르는 모든 의식이 무의식 속에 녹아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볼 때도 아메바로부터 원인에 이르는 창조적 진화의 전 과정이 세포 속에 응결되어 있다. 아담은 이 세계 내에 있는 전 생명의 결정체이며 전 의식의 총화이며 전 물질의 열매로 지음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물질을 근거로 생물계를 전개시킨 이유는 이것들을 근거로 하여 영으로 사람을 수렴하기 위함이었다.

*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전 15:44.

이 성구가 암시하듯 육으로 심고 영으로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농사하는 방법이었다. 아담이 흙으로 지음 받은 뜻은 그가 곧 땅 차원의 존재임을 나타낸다.

* 첫 사람(아담)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고전 15:47.

땅 차원의 흙으로 짓고 하늘 차원의 영으로 수렴하는 것, 이것이 인간 창조의 원리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96-98.

또한 창조적 진화의 계통수에서 생명나무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에 접합을 받는 인간들은 소위 우리가 말하는 ‘초인류’로서 탄생이 된다고 변찬린은 말하고 있다. 초인류는 “멜기세덱과 예수의 도맥(道脈)을 이은 산 자들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가지에서 분화되어 부활한 초인(超人)으로 회귀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현인류(現人類)의 가지에서 새 움이 터 초인(超人)이 탄생될 시운(時運)이 도래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나무 가지에 성령의 열매로 익은 첫 열매였다. 잠시 후 예수의 아지(兒枝)에서 부활한 성도들이 열매 맺을 것이다. 선악나무 가지의 열매인 죽은 인간들을 꺾어 산 자로 생명나무에 접붙일 때가 올 것이다. 우리는 돌 감람나무였다. 이것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을 때 새로운 인간이 탄생될 것이다. 참사람이 탄생 될 것이다. 하나님이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실 때 새 날 초인류는 탄생될 것이다.
- 변찬린, 『성경의 원리 上』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2019), 392-393.

‘만물의 영장’으로의 존재 탈바꿈이 인류의 마지막 소망

창조적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우주사적 가치는 무엇인가? 역사시대에 있어 인간의 의미는 호모사피엔스의 가지에서 능력의 초인으로 변화할 가능태의 실존이다. 창조적 진화의 역사에서 창조된 피조물이 특이점에서 창조성의 발현으로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 즉 존재변형이 발생하여 새로운 존재로 탈바꿈한다. 이 새로운 존재, 즉 온전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며 세계 경전이 예고하는 초인과 초인류로 대변되는 온전한 인간이다.

창조적 진화와 진화적 창조의 나선형적 역사관에서 과거의 영원과 미래의 영원 속에 한 점인 ‘지금, 여기’에 ‘인간으로서 나’로 존재한다는 우주의 무게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으로서 ‘진인사(盡人事)를 하지 않으면 기다리는 천명(天命), 즉, 창조성은 인간에게 발현할 터전이 없다.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존재가 의미가 없듯이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은 ’인간이 없는 하나님의 존재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할 만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성구와 “하늘과 같이 군자는 쉬지 않고 자신을 갈고 닦는다(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 乾卦)”라는 종교적 황금율을 지켜야 하며, 뛰어난 이가 도를 들으면 힘써 행하는 것처럼(도덕경 41장) 용맹정진하여야 한다. 또한 중생이 모두 깨닫기 전까지 나는 깨닫지 않겠다는 보살행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불퇴전의 정신으로 창조적 진화의 역사의 최전선에서 구도하여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가 그동안 종교적 언어에서 신화적 사건 혹은 문학적 상상력 혹은 미분화된 미개인의 의식이라고 치부했던 선가의 이상적 인간형인 ‘신선’이라는 존재, 불교의 생명관에서 습생, 난생, 태생, 화생이라는 ‘화생’이라는 존재, 바울이 말하는 ‘신령한 몸’, 토착화된 근대의 종교관에서 이구동성으로 제기하는 완전한 인간 등은 ‘신비주의’라는 영역의 범주에 서 불러내어 담론의 중심자리에 세워 활발히 토론되어야 한다.

미주

(미주 1) 변찬린, 『禪, 그 밭에서 주운 이삭들』, 가나안출판사, 110-111.
(미주 2) 앙리 베르그송의 주요 저작에는 《물질과 기억》(1896), 《창조적 진화》(1907) 등이 있다. 생물의 진화는 기계론적도 아니고 목적론적도 아니다. 이 진화의 도식은 동적이며 예측이 불가능한 생명의 비약에 의하여 창조적 진화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미주 3) 변찬린의 서가에는 『샤르댕(전집)』(1973)이 있었다. 향후 변찬린의 ‘창조적 진화론’에 대한 심도 있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지면관계상 소개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다.
(미주 4) 변찬린, 「에덴의 위치」 (날짜 미상). 변찬린의 『요한계시록 신해』, 89쪽에서 요한계시록 4장 5절의 해석을 참고할 것.
(미주 5) 화서씨(華胥氏)의 古夢: 옛날 중국의 黃帝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화서(華胥)라는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善政을 보고 꺠어나 깊이 깨달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 좋은 꿈을 이르는 말.
(미주 6) 많은 학자들이 영성(靈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과연 영성(靈性)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다시 물어져야 한다. 대표적으로 조던 오먼, 이홍금 옮김, 『靈性神學』, 분도출판사, 1987; 김경재, 『灵性神學序說』, 대한기독교출판사, 1985; 길희성, 『종교에서 영성으로』, 북스코프, 2018. 영성(靈性)은 서구 종교계의 피안신앙을 연장하는 개념이라면 영성(靈聖)은 죽어서 영혼이 천당 간다는 피안신앙이 아닌 차안신앙으로서 종교적 황금율을 수행하며 궁극적으로 우화등선하는 선맥의 사상을 염두에 둔 종교적 언어이다. 연재 글에서 특별한 표시가 없으면 영성은 ‘靈聖’을 의미한다.
(미주 7) 독자들은 한정된 지면으로 상세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한계에 대해 양해를 구하며, 구체적인 것은 변찬린의 『성경의 원리 上』의 「타락론」, 「예수론」, 「성령론」을 정독하기를 바란다.

이호재 원장(자하원)  injiche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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