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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문주간평화교회 <신약따라걷기>
이진경 교수(협성대) | 승인 2021.03.04 17:11
▲ 누군가에게 나를, 또 누군가가 나에게 이름을 부르는 것은 어쩌면 제한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Getty Image
이진경 교수님의 이 글은 ‘평화교회연구소’(소장 황인근 목사)가 발행하는 웹진 「주간 평화교회」 59호에 실린 것을 평화교회연구소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평화교회연구소와 이진경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문이다.” 중국 영화 <음양사: 청아집>은 이 문장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영화 자체보다 훨씬 강렬한 이 문장은 일본판 원작에 나온 말이기도 하다. 제목에 등장하는 음양사란 일본 헤이안 시대에 음양오행과 관련된 천문, 제사, 주술 등을 맡은 사람들이었다. 원작에서 음양사 세이메이와 궁정관리인 히로마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히로마사, 이 세상에서 제일 짧은 주문은 뭘까?” 대답을 못하는 히로마사에게 음양사는 말한다. “이름이야.” 그리고는 우리 이름 같은 것도 다 주문이냐는 말에 나무나 하늘 같은 이름도 다 주문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 시작한다. “저주란 곧 사물을 속박하는 거지. 그리고 사물의 근본적인 실제를 속박하는 것 또한 이름이야.”

음양사의 설명처럼 이름은 그 이름을 지닌 대상을 한정시키고 속박한다. 이러한 이름의 속성을 모티프로 사용한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마녀는 대상의 이름을 빼앗아 대상을 지배한다. 고대세계의 축사(逐邪)에서도 이름은 분명하게 이 기능을 수행했다. 사람을 사로잡은 귀신의 이름을 알면 그 귀신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귀신의 이름을 아는 것은 퇴마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많은 사람들이 거라사 귀신에게 이름을 물었던 예수의 모습에서 당시의 축사 관습을 떠올렸던 것은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자명한 일이었다.

출애굽기에 계시된 신의 이름 역시 이 속박과 구속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만난 광야의 신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이집트로부터 탈출시키라는 사명을 받고 당황한 모세는 그 신의 이름을 물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렇게 계시하셨다. “나는 곧 나다.”(출 3:14) 다소 참담한 번역의 실패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는 개역성경의 번역 역시 모호하긴 매한가지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 신의 히브리어 이름은 아마도 영어권의 언어에서 그나마 재현이 쉬울 것이다. “I am who I am.” 굳이 우리말로 직역을 해보자면 “나는 내가 그인 그다.” 또는 “나는 내가 그 누구인 그 누구다.” 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히브리어 문장은 히브리어의 특성상 현재뿐 아니라 미래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번역은 보다 더 복잡해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이름에 대한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이 이름이 지닌 의미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이름 소개는 어느 것으로도 속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A라고 소개한다면 하나님은 A라는 관념에 갇힌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A가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정의이든 사랑이든, 그 이름 아래 놓인 신은 그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나는 내가 그인 그다.”라는 선언은 바로 이름이 지닌 구속의 속성을 벗어나는 선언이다. 나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제한되고 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하나님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름이 속박이라는 부정적 의미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동양의 세계에서 이름은 매우 귀하고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심지어 우리의 조상들은 이름이 중요할 뿐 아니라 운명을 좌우한다고까지 생각하여 이름에 사용할 한자를 획수까지 고려하여 신중히 골랐다. 잘 지은 이름은 액운을 막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잘못 지은 이름은 액운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여전히 우리 주위에는 잘 풀리지 않는 운명에 이름을 탓하고 다른 운명을 기대하며 이름을 바꾸는 사람들이 흔하다. 이름은 정체성이며, 그런 의미에서 운명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이름을 그 이름을 지닌 사람과 동일시하고, 이름에 그 사람의 힘이 담겨 있다는 믿음을 발전시켰다. 이름이 지니는 신비한 힘은 점점 더 확대되었다. 이름에 이렇게나 절대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면 하물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들의 이름, 그로 인하여 창조가 일어나고 창조세계가 유지되는 예수의 이름이야 오죽할까.

마태복음은 ‘예수’라는 이름이 그의 정체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복음서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 1:21) 예수, 즉 구원은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다. 그리고 바로 잠시 후 마태복음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도 소개한다.(마 1:23) 하지만 성경에서는 단 한 번도 누군가 예수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으니 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정체성을 전달하는 기능에만 충실한 이름인 셈이다. 나아가 다른 복음서에는 이름이 그 이름을 지닌 사람과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 반영된 이야기도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파송한 70인의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을 대었더니 귀신들도 복종했다고 보고하는 장면을 전한다.(눅 10:17) 예수의 이름이 예수 자신과 동일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 이름의 능력은 단지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제자 요한은 예수에게 자신들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다고 보고한다.(막 9:38) 이 이야기들 속에서 예수의 이름은 예수의 현존과 동일한 효과를 나타낸다.

축사뿐 아니라 치유의 기적에서도 이 현상은 나타난다. 성전 문 곁에 놓인 장애인에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한다.(행 3:6) 다른 성경과 달리 사도행전은 유난히 ‘예수의 이름’을 강조한 성경이다. 오직 사도행전에서만 거의 전체 장에 걸쳐 ‘예수의 이름’이 언급된다. 심지어 ‘예수’로도 의미가 충분한 곳에서, 오히려 ‘예수의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서도 다음과 같이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 “그런데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니 남자나 여자나 다 그의 말을 믿고서 세례를 받았다.”(행 8:12)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에 대한 사도행전의 강조는 의도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왜일까?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요 매개자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다. 그는 한때 인간에게 하나님을 향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지금은 옆으로 비켜서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하여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요 14:6)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그가 우리 가운데 현존하는 방식이다. 예수의 부재 후 처음으로 예수에 대하여 전하기 시작했던 사도들의 이야기를 담은 사도행전은 그렇게 예수의 이름을 이해했던 것이리라. 그렇게 예수의 이름은 기적을 일으키고, 복음의 핵심이 된다. 그리하여 사도행전은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행 4:12)

예수의 이름이 힘을 지닌다는 사실은 분명 신비의 영역이다. 합리와 이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종교의 본질에 신비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주 망각한다. 이성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신비가 없다면 종교는 사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기독교는 부활이라는 가장 불합리한 신비를 가장 중요한 본질적 요소로 보존하고 있는 종교다. 과학과 이성으로 철저히 무장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지금 이 이름의 신비가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영화 <음양사>의 첫 문장에 대한 소감을 남긴 글에 누군가 이런 댓글을 달았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 기도를 가장 짧게 하면 ‘예수’랍니다.” 이름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주문이 될 수 있다면, ‘예수’ 역시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라는 이름만으로 기도가 된다면 이것은 또 얼마나 굉장한 신비가 될까.

이진경 교수(협성대)  peacechurch20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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