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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아버지께로 돌아감(호 14:1-9; 요일 1:8-2:6; 눅15:11-32)사순절 셋째 주일(3월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3.05 14:55

1.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나누자!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또 그 고난의 길로 저와 여러분들을 이끌고 계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길이지만,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 때, 그 길은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행복과 기쁨의 길이 된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잃어버린 한 사람을 아버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우리들의 영원한 본향인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본문 말씀은 아버지께 돌아가는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귀향으로, 영원한 본향인 고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누가복음 15장 말씀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3가지 비유의 말씀입니다. 잃은 양의 비유(눅 15:3-7),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8-10),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인 잃은 아들의 비유(11-32)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고 수근거릴 때 하셨던 비유입니다. 곧 말씀의 핵심은 죄인을 영접하고 함께 음식을 나누라는 것이죠? 말씀을 볼까요?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눅 15:11-14)

▲ 돼지 치는 둘째 아들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아버지의 품을, 또한 교회를 떠나갑니다. 그런데 떠나가면 뭔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아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됩니까?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눅 15:15)” 붙여 산다고 하죠? 구걸한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 재산을 낭비하고 이제 먹고살기 위해,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동물인 돼지를 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눅 15:16)”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후회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늦은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이 둘째 아들은 늦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죠?

2.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 15:17-20a)

▲ 조반니 파르마, <돌아온 탕자> (1596-1600)

회개합니다. 뭐라고 하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해가 되는데, 하늘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회개의 본질, 후회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인도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우리의 강팍한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둘째 아들의 후회는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그 마음을 감동 시켜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하는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b)” 그렇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또한 어머니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달려와 반기자 몸 둘 바를 모른 둘째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고백합니다. 집 나가 고생을 한 후, 뭔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것입니다. 꼭 고생을 해봐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말합니까?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둘째 아들에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종들에게 잔치를 베풀라고 합니다. 안 물어 봐도 다 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귀향의 길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 맏아들의 이야기가 나오죠? 말씀을 볼까요?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눅 15:25-28a)

▲ 시기하는 첫째 아들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그리고 아버지가 동생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소리에 화를 냅니다. 앞서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기 전에,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왔다고 했었죠? 그때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지식인인 서기관들이 수근거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왜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느냐?”고 따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첫째 아들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가 나와 권면하자, 첫째 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8b-30)
 
아버지는 어떻게 말씀하나요?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1-32).” 진정 아버지께로 돌아갈 사람은 아버지를 떠났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둘째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곁에서 열심히 아버지를 섬겼던 사람, 아버지의 명을 어김없이 지켰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롭게 신앙에 입문한 둘째 아들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내쫓으려고 하는 첫째 아들이 많습니다. 모두 자신의 공덕(功德), 곧 공과 덕을 주장하죠? 그러나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잃었던 동생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니,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공동체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첫째 아들처럼, 샘내거나 시기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첫째 아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다음 첫째 아들의 반응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만약 들을 귀가 있다면 깨달을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 고멜을 다시 데리고 오는 호세아

오늘 구약 말씀 호세아서도 이러한 아버지께 돌아가는 귀향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호 14:1).” 무슨 말씀인가요?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통해 그에게 깨우침을 준 것입니다. 사실 호세아는 아모스와 같은 시대, 같은 북이스라엘에서 예언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아모스와는 성품이나 분위기가 다릅니다.

정의를 외치는 아모스와는 달리, 호세아는 사랑으로 호소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음란한 자기 아내 고멜의 이야기를 백성들에게 전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던 사랑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하나님께 돌아갈 때 제대로 각오하고 오라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하늘과 아버지께 회개하고 후회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몇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호 14:2-3)

각오가 몇 가지인가요? 세 가지죠? 먼저 ‘선을 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수송아지가 아니라, 우리 ‘입술의 열매’를 제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손으로 만든 우상’을 숭배하지 않겠다는 각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치면, 아파트나 건물, 돈이나 기술 등 인간의 의식주를 뜻하는 것이겠죠? 다 손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말씀을 가지고”라는 말에 묶여 있죠? 즉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각오를 새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말씀을 볼까요?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그의 가지는 퍼지며 그의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의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그들은 곡식 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 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 같이 되리라.”(호 14:4-7)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곧 에브라임은 다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떠나, 거짓 우상을 섬기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호 14:8-9)

이 모든 복은 정직한 하나님의 도(道), 즉 그 길을 갈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요한은 그 길에 필요한 회개를 이렇게 반복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4.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

요한은 가급적 하나님의 자녀들이 범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여린 심정인지라,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흔들립니다. 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갈 때까지 그 흔들림은 변하지 않죠?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렇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또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없는 것처럼 강풍에 흔들리지 않는 인생, 폭우에 젖지 않는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이렇게 위로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Παράκλητον)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1-2)
 
대언자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대언자, 곧 ‘파라클레톤’이라는 말은 ‘곁에서 도와주도록 부름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보혜사’ 성령이라고 번역합니다. 아무튼 의로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곧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자신 스스로가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바쳐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함입니다(이 말씀은 다음 주 사순절 넷째주 말씀에 ‘피조물의 해방’이라는 주제로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과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 앞에서 대언해 주시고 또한 도와주신다고 우리가 자꾸 죄를 범하고, 종종 집을 떠나고, 또한 서로 의미 없이 싸우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3-6)

후회하고 회개했으면 이제는 변해야 합니다. 구체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누가복음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반성하고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과, 늘 아버지를 떠나지 않았지만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않고 시기하고 질투했던 첫째 아들 중, 누가 진정 계명을 지킨 사람이며, 그 속에 진리가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하나님 뜻대로 산다고 하는 이는 이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때로는 잘못을 범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후회하고, 회개하고 다시는 그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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