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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 장로회 선교의 개척자 조사 김계안20세기 초기 북간도 장로회 선교의 개척자 김계안 조사 ⑷
이이소 | 승인 2021.03.06 15:08
▲ 1937년 노회 창립 30주년 기념으로 한자리에 모인 북간도 용정중앙교회 성도들. 앞줄 오른쪽 안경 쓴 이가 문재린(문익환 목사 부친) 목사, 두 명 건너 중절모를 손에 든 이가 김재준 목사, 김 목사 왼쪽에 흰색 두루마리를 입은 이가 김약연 선생.

1921년 간도노회가 조직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편찬자들은 조선민족이 간도지방에서 거류한지 40여년 만에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셨다고 찬미하며 간도 복음전파는 선교사 구례선으로 시작되었다고 하며 북간도 선교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술한다.

“영국 카나다장로회에서 파송한 구례선(R. G. Grierson)이 1902년 함경도를 경유하여 간도와 해삼위에 전도함과 1906년 중국교인 싼진 선생의 동양리와 양무정자에서 전도함을 위시하여 조사 김문삼과 선교사 업아력과 조사 김계안과 선교사 부두일, 박걸, 등과 목사 김내범 등이 근근자자히 상계 전도한 결과 신자가 점증하고 교회가 일흥하여 1921년에 이르러 총회의 승인을 얻어 함북노회에서 분리하여 간도노회를 조직하게 되니 이는 천부의 사랑과 구주의 은혜에서 유출한 성업이므로 감사와 찬송을 귀함을 마지 아니 하노라.”(<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678쪽)

위의 기록은 북간도 선교의 선구자, 개척자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고 있다. 선교사로는 구례선, 업아력, 부두일, 박걸 등이 있으며 중국 장로회 교우로는 싼진 선생이다. 조선인으로는 조사 김문삼, 조사 김계안, 목사 김내범이 언급된다. 김내범 목사는 1913년 함경노회 파송 간도 전도 목사로 부임하여 북간도선교에 크게 기여한 것이 분명하지만 조사 김문삼이 북간도 선교에 기여한 사실 확인은 현재까지 찾아 본 자료로는 긍정하기 어렵다.(1)

지금까지 정리한 것을 종합하면 조사 김계안이 북간도 선교의 개척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첫째, 그는 공적으로 파송된 북간도 최초 상주 전도자였다. 그는 1909년 북간도 선교를 위해서 고향 성진 예동에서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1913년 선교사 박걸과 목사 김내범이 용정으로 와서 거주하게 될 따 까지 그는 혼자 북간도에서 캐나다 선교부를 대표하는 공식 전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둘째, 그는 캐나다장로회 성진 선교부 산하의 최고의 훈련된 전문인 전도자였다. 1909년 성진 선교부에 26명의 전도인이 있었는데(2) 스코트는 그를 가리켜서 권서인으로 종사하기에 충분히 공부한 사람이라고 하였다.(3) 권서인은 성서를 판매하는 사람으로 시장과 거리에 나가 쪽복음이나 달력, 교리서를 판매하며 전도 훈련과정을 거쳐서 선교부의 공식 조사(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구례선 선교사를 만나서 북간도 전도 조사로 파송되기 까지 최소한 7년의 과정동안 권서인과 조사로서 훈련을 받았다.

또한 그는 특별히 북간도의 굶주림이나 목마름, 추위와 외로움, 불편과 고달픔 등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전천후 전도자였다. 그는 스님이었던 당시 도를 깨닫기 위하여 백두산에 올라가 쌀 생식으로 100일 수련을 할 정도로 육체적으로 단련이 되었으며 자기 절제와 극복의 훈련이 된 전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를 관리하며 북간도 상주 전도자로서 개척자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셋째, 그는 성진지역과 북간도 순회 전도자로 가장 많은 교회 설립자가 되었다. 그는 성진지역에서 6개 또는 9개의 교회를 세웠으며 북간도로 이주해 온 후에는 강원도 면적의 2배가 되는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볼모지에 복음을 전하여 적안평과 낙타하교회 2개를 세웠다. 그는 사경회를 통해서 사람들을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가며 말로만 전도하는 부흥사경회의 상투적인 강사가 아니었다. 그는 전도의 결실이 맺혀질 때 까지 반복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결단을 촉구하고 섬기며 변화에로 이끄는 지도자였으므로 성진에서 성진과 북간도지역의 권서 교육과 관리를 맡았던 스코트 선교사는 그를 가리켜 초기 한국 그리스도인들 중에 전도로 가장 많은 결실을 맺은 사람이라고 하였다.

넷째, 그는 15년 동안 북간도에 설립된 110여 개 교회 설립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는 북간도의 110여 개 교회 설립의 과정을 지켜 본 산 증인이다. 그가 북간도에 오기 전에 이미 세워진 5개 교회를 제하고 그는 1923년까지 설립된 110여 개의 교회의 태동과 설립 과정을 전임 전도자로서 애정을 가지고 기도하며 지켜보았다. 연속 순시했다고 기록된 구세동교회는 물론이고 본인 설립한 적안평교회, 낙타하교회도 무시로 순회하였을 것이다. 그는 순회하며 설교하고 기도하며 새 교우들과 새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함께 고락을 나누며 지성껏 섬기며 감사와 기쁨으로 교회의 설립을 도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스코트 선교사는 그를 사랑과 자비, 나눔과 섬김, 희생과 헌신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 있는 모범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그는 북간도 캐나다장로회 순회전도자이면서 최초의 장로로 추대되었다. 그는 1913년 장로로 선임되어 김내범 목사와 함께 용정시교회를 섬겼다. 그는 조사(전도자)로 북간도에 왔지만 광범위한 지역을 순회하며 교회와 교우들을 섬기며 용정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그는 교회와 교우들을 사랑하며 말씀과 지혜로 겸손히 그들을 섬겼고 그들에 의해 북간도장로교회의 최초의 장로로 세워졌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스코트 선교사는 영적으로 성숙한 그의 설교와 지도력, 신앙생활이 북간도를 포함하는 북한지역의 많은 교회들의 모범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최초의 장로로서 북간도교회 설립과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노회가 그를 포시에트교회 전도자 문제 해결을 위한 특별위원으로 선임된 것도 그의 지도력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여섯째 그는 선교사, 조사, 권서인, 교사, 독립투사들과 함께 북간도 교회와 교우들을 섬겼다. 그는 성진선교부와 용정선교부에서 선교사 구례선, 업아력, 부두일, 박걸, 배례사, 서고도, 민산해, 매길로 선교사를 만났고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그들과 협력하며 함께 일하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 권서인, 조사, 지도자, 교사들과 함께 일하였다. 북간도 상주 전도자로 파송 받은 후에는 구춘선, 이동춘, 이동휘, 강백규, 마진, 김영제, 김내범, 박례헌, 이호준, 박영헌, 최선탁, 정재면, 김약연, 김하규, 김정규, 홍순국, 박무림, 박태환, 남공선, 양진선, 양형섭, 양형식, 김영학, 류례균, 배형식, 윤동철, 김순문, 김강, 조성극, 김문삼, 김택서, 이응현, 오병묵, 황병길, 이명순 강두화, 강두송, 박상룡, 김선관, 황신기, 김여용, 한덕일, 김택근, 이태준, 장석함, 문재린, 이병하, 최봉렬, 오재영, 김립, 계봉우, 윤해, 남공선, 권두혁, 박홍식, 구태선, 홍춘명, 김홍순, 함광실, 남인상, 지병학 등의 교회 지도자와 설립자, 교사 등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후세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는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의해 공적으로 파송된 북간도 장로회 최초 상주 전도자로서 다양한 지도자들과 함께 여러 교회와 여러 부류의 교우들을 지도하며, 섬기며, 격려하며 실로 북간도장로회 선교의 개척자가 되었다.

다른 기록과 의미를 찾아서

안타깝게도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하>와 스코트 선교사의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을 제하고는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다행스럽게 중국에서 발행된 2권의 소책자 기독교 관련 부분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다. 아래는 룡정문사자료 2집 156, 157쪽에 실린 글이다.

“1908년부터 룡정 조선인 신도들이 례배를 보던 초가집은 중앙교회당의 전신이다.  1913년 중앙교회에서는 김내범 목사를 초빙하여 처음으로 당회를 개회하고 김계안을 첫 장로로 추천했다. 초기 신도는 20여 명이었는데 초가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1917년 김내범 목사가 사임하고 강두화가 조사로 친무했다. 1918년부터 12년간 박례헌 목사가 초빙되었고 1930년부터는 리태준 목사가 초빙되여 친무하였는데 1932년 6월 이후부터는 문재린 목사가 친무했다.  중앙교회에서는 1934년 3월 3일부터 13일까지 대복흥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번 회를 통하여 신도 100여 명이 확충되었고 경비 4천 8백여 원을 모음으로써 80여 평의 벽돌기와로 지은 례배당을 락성하게 되었다.”

1908년부터 1934년까지의 용정중앙교회 역사를 몇 줄로 정리하는 중에 김계안이 용정중앙교회의 최초의 장로로 추천되었다는 내용이다. 그가 용정에서 최초의 장로로 선임된 것이 북간도조선인 사회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일언반구 설명이 없는 간단명료한 서술이 참으로 야속하고 인색하기 그지없다.

다음은 연변문사자료 8집, 123쪽에 실린 내용이다.

“1913년, 룡정중앙교회에서는 김내범 목사를 청하여 제1차 <당회>를 열고 김계안을 제1임 장로로, 강두화를 조사로 박례헌을 목사로 정하였다. 후에 리호준이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다.”

내용인즉슨 1913년에 있었던 사건을 앞의 글보다 더 짧고 쉽게 쓴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는 구례선 선교사의 책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에 이름이 나오지 않은 채 간접적인 언급이 나온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스코트 선교사의 가슴에 위대한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된 조사 김계안,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가 “1909년, 중국 동만주 용정시교회에 조사 김계안이 이주하야 간도지방에 순회 전도하니 교회 대진이러라. 개 김군은 본시 불교인으로 아교에 투입하야 진리를 심구하고 전종에 열심하야 다년 권서로 근무하더니 도금 조사로 담임하니라.”(4)라고 극찬한 인물, 김계안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은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는 성진에서 러일전쟁, 을사보호조약으로 인한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 헤이그밀사파견과 고종의 폐위, 군대해산의 과정을 몸서리치게 겪었다. 1909년 용정으로 이주하여 이미 설치된 용정 일본 파출소와 용정 일본 영사관의 폭력과 수탈, 음모와 이간질을 직접적으로 체험하였다. 1910년 이후로 한일병탄의 치욕과 절망, 사망의 골짜기를 북간도 조선인들과 함께 겪었으며, 그 후로 오랜 시련과 침묵 끝에 분출한 1919년의 3.13 용정만세 시위, 간도국민회조직, 크고 작은 무장독립투쟁,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경신대학살, 자유시참변을 가까이에서 참여하며 혹은 멀리서 지지하며 기도하며 지켜보며 고난과 참변의 시대를 숨 가쁘게 살았다.

그는 캐나다장로회 교회가 모체가 되어 만들어진 <간민교육회>, <간민회>, <독립운동의사부>, <간도독립운동기성총회>, <간도국민회>, <국민회군>의 결성과 해체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디에도 그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북간도 장로회사회에서 최초의 북간도 전임전도자이며 최초 장로인 그의 비중이 없을 리가 없다. 어떤 역사의 소용돌이가 그를 덮쳐버린 것일까?

1921년 자유시참변이 일어난 후에 캐나다장로회 교회 안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다. <간도국민회> 주요 멤버들이 공산당에 가입한 일로 인하여 교회에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일로 인하여 북간도 장로교회를 개척한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가입하여 교회를 떠났다. 그들은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약속한 레닌과 국제공산당에 열광하였다. 그들은 교회에 남은 자들을 보수 민족주의자로 불렀고 남은 자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부르며 서로 격렬하게 비판하며 경계하였다.

이런 첨예한 상황 속에서 김계안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속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느 한 쪽도 배제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어느 한 쪽만 특별히 지지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만, 그리스도에게만,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게만 속하고 싶었다. 그는 이념으로 인한 갈등과 대립으로 에너지와 시간을 소진하기보다는 일본군의 대학살과 방화로 고통과 절망, 기아와 질병, 낙심과 우울증에 빠진 민초들과 교우들을 보살피고 소실된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일에 몰입하였다. 그러므로 마치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병들고 짓밟히고 상처받은 영혼을 몰아적으로 돌보며 섬기는 그가 공산주의자들이 보기에는 한없이 여린 의식 없는 민족주의자였고, 민족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이상적인 공산주의자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교회 내에서 이념 대립으로 힘겨루기와 주도권 투쟁이 시작된 후, 어느 쪽도 그를 자기들 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불가에서 나온 이후로 구원의 길과 하나님의 도를 가르쳐 준 예수님처럼 권력의 자리를 탐하거나 특별한 자리와 사람에게 속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초연하고 표표하게 살았다. 스코트 선교사가 그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있는 모범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코트 선교사가 그의 설교와 전도가 북한지역에 모범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구도자의 삶을 살아 온 그는 자신의 글과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높은 자리와 특별한 자리에 앉은 적이 없는 그의 비정치적인 가난하고 초라한 삶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미주

(미주 1)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나오는 김문삼에 관련된 기록은 아래와 같다.
* 1913년 신학생 취교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나온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59쪽)
* 1910년 회령군읍교회가 문제 해결자로 성진선교사회 특파를 받은 기록.(<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93쪽)
* 1912년, 김계안, 이동휘. 김문삼, 김택서 등과 함께 복음을 전해서 명천군 상가면 와연동교회를 세웠다.(<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56쪽)
*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에 김문삼도 서명하였다.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 125쪽.
(미주 2)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137쪽.
(미주 3) 매서인, 성서를 판매하는 사람으로 전도 훈련의 과정을 거쳐서 조사가 되었다.
(미주 4)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390쪽.

 

참고서적

차재명,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8.
양전백·함태영 외,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2017.
윌리엄 스코트, <한국에 온 캐나다인들>. 한국기독교장로회출판사, 2009.
로버트 그리어슨, <조선을 향한 머나먼 여정>, 한신대학교출판부, 2014.
심영숙, <중국조선족 력사독본>, 민족출판사, 2016.
정협룡정현문사자료연구위원회 편, <룡정문사자료2집>, 룡정현기관인쇄공장, 1988.
호이전·문홍복, <연변문사자료 8집, 종교사료집>, 문사자료위원회편집출판, 1997.
김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역사공간, 2013.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개척〉, 민족출판사, 1999
서굉일 외, <북간도민족운동의 선구자 규암 김약연 선생>, 고려글방, 1997.
서대숙, <간도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자 김약연>, 역사공간, 2017.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편집위원, <종교사>, 민족출판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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