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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람들 안에 존재하신다”하나님을 믿으십니까?(창 1:1; 요 17:15~23; 골 1:26~29)
홍인식 목사(더처치) | 승인 2021.03.08 16:40
▲ 전대미문의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통하는 철로 ⓒGetty Image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 우고 아스만은 “오늘의 신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신론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상 숭배와 관련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최근 수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무신론의 문제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은 리처드 도킨스가 쓴 책입니다. 그는 과학적 논증을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신론을 펼치면서, 종교(인격화된 신을 숭배하는 종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는 초자연적 창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전 세계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이 나오자 한국 교회는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사탄의 책이라고 말하면서 금서로 지정하였고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대항하여 신은 존재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곤 하였습니다. 양자역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등 여러 다양한 노력을 합니다. 마치 무신론과 유신론의 싸움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우리들의 최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면 모든 사람이 신을 믿을까요? 반대로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증명되면 신을 믿는 종교는 사라지고 말까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저런 경우에도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은 늘 있을 것이고 또 어떠한 경우라도 이런저런 신을 믿는 사람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 여부가 아닙니다. 무신론과 유신론의 싸움은 사실 무의미한 싸움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만일 우리가 신을 믿고 있다면 어떤 신을 믿고 있느냐의 일 것입니다. 신(神)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믿는가의 질문은 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하나님을 믿고 있느냐의 질문입니다. 나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믿음의 내용은 나의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주제입니다.

신(神)과 삶의 형태

예를 들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절대권력(전지전능)의 신을 믿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서 적극적 혹은 진취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신만 바라보면서 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위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은 무엇일까요?

1. 소극적인 영성의 모습
2.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가부장적인 하나님
3. 수동적인 인간의 모습
4. 내면적 변화를 이루기는 하지만 주위 현실의 개혁에 대해서는 미흡한 모습

이러한 내용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신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어떨까요?

먼저는 신과의 관계를 교섭의 관계로 설정합니다. give and take의 방식 주고받기의 교섭의 관계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은 신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에게 제물을 바칩니다. 공덕을 쌓는다고 생각합니다. 공덕이 쌓이게 되면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여러 가지 제물(희생)을 바치게 됩니다.

세 번째는 신의 비위를 추기 위하여 눈치를 보기 시작합니다. 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눈치입니다. 책임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신 앞에서는 신에게 충성된 삶을 살지만 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삽니다.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 교인들의 모습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착실한 신자의 모습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삶은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이러한 신을 믿는 사람들은 신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기를 바랍니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과 같은 존재가 신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 중심의 삶을 삽니다. 신을 성전이라고 하는 특정한 공간에 모셔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을 화려하게 건축하고 장식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신이 그 공간에 만족하고 그곳에 계속 머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공간에서 사는 신을 정기적으로 찾아오곤 합니다. 한국 교회의 성전 건축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집중 그리고 성전이라는 건물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 무서울 정도로 집착하는 것도 이러한 신의 개념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어떤 신을 믿느냐는 우리의 삶의 형태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느냐에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과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을 잘 살펴봄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교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변화, 교회의 변화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찰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코로나19 위기 이후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가‘변화와 개혁’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말을 하면서도 왜 변화와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하나님에 대한 개념,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 죽이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죽이기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나님 죽이기를 하려고 합니다. 구약의 말씀과 복음서 그리고 서신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형상을 교정 해보려는 시도해 볼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교정하기 위한 3 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창세기의 말씀

구약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 세상 창조, 우주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무엇보다도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입니까?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하여 자기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곳을 보여주려고 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유치한 분이시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주의 생명의 원천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아니 생명을 넘어서 우주 존재의 원천이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은 존재를 구분하곤 합니다. 무생물체 혹은 생명체로 구분합니다. 생명체도 의식의 존재로 식물과 동물로 구분합니다. 동물의 경우에도 자아의식의 유무로 구분하곤 합니다.

그러나 존재는 그렇지 않습니다. 존재는 그런 구분을 뛰어넘어 존재 자체로 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본문의 선언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원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의 원천이 동일하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만의 신이 아니십니다. 동식물 아니 모든 무기질까지 포함하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형제자매입니다.

그러한 것을 깨달은 성 프랜시스는 해와 달과, 동물들과, 식물들과 그리고 돌들과도 대화를 나누었으며 우주의 존재를 향하여 나의 형제자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다른 존재를 향한 혐오, 미움, 차별, 착취가 얼마나 잔인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다른 존재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한 것임을 아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유행하는 교회론과 선교론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선교적 교회입니다. 둘째는 마을 목회이고 셋째는 공공신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이 아무리 훌륭하고 멋진 선교와 신학적 설명을 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이는 엉뚱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을 목회를 예를 들어봅시다. 교회가 마을을 향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마을에 참여하겠다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참여하고자 하는 마을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존재들이 살고 있습니다. 성소수자, 이웃종교인,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범죄자, 억압당하는 사람, 권력자 등등.

그런데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마을로 향하겠다는 마을목회 주도자들의 생각을 한번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이들이 성소수자를 향하여 갖고 있는 생각은 어떨까요? 이웃종교를 향한 생각은 어떨까요?  마을 목회를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저는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동일 원천이신 창조의 하나님을 진정 믿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우리는 모든 존재의 원천이신 창조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말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마지막 기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세상과 관련된 기도입니다. 오늘 읽은 짧은 기록에서만 ‘세상’이라는 단어가 모두 7번이나 나타납니다.

예수님에게 세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과 관계없는 삶은 의미가 없습니다. 죽어서 천당(?)가는 믿음은 그에게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한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천당 가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 남아서 세상을 위해 살라는 기도를 남깁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영역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세상(인간)이 없다고 한다면 그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까?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우리는 흔히 절대적인 존재이묘 홀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존재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혼자 있는 신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홀로 계신 하나님(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하고 세상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상상일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할 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영적 에너지를 공급하여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는 주유소와 같은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고 교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만 합니다. 모든 일을 교회 안에서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일해야 합니다. 세상과 연관 없는 하나님은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골로새서의 말씀

골로새서에서 강조되는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라는 단어보다는 예수라는 호칭을 선호합니다. 오늘 골로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 이 비밀은 영원 전부터 모든 세대에게 감추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 성도들에게 드러났습니다. 27 하나님께서는 이방 사람 가운데 나타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를 성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셨습니다. 이 비밀은 여러분 안에 계신 그리스도요, 곧 영광의 소망입니다. 28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에게 권하며, 지혜를 다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칩니다. 29 이 일을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작용하는 그분의 활력을 따라 수고하며 애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이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게시가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접근한다는 생각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표현의 절정입니다. 예수교의 신론의 특징은 다름 아닌 예수가 우리에게 제시한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 행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형상은 예수의 생애를 통하여 교정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것입니다. 신의 전능은 누구나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신의 속성 중의 가장 중요한 속성입니다.  신이 전능하지 않다면 어느 누가 그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전능은 의외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외칩니다. “나의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그가 죽음의 순간에서 경험한 것은 하나님의 전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바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숨을 거둡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에게 자신의 영혼을 맡깁니다. 도대체 예수가 십자가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전능은 어떤 전능이었습니까?

1940년대 독일에서 나치 정권하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 가스실에서 겨우 살아나나 당시 16살짜리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평생의 질문은 “그러한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였습니다. 그 질문을 가지고 그는 평화를 위해 전 생애를 헌신합니다. 그리고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합니다. 엘리 위젤입니다. 그가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나는 물었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의 질문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엘리 위젤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죽어가는 사람들, 처형당하는 사람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사람들, 강제수용소에 갇혀 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사람들 안에 계셨다. 아니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도 이 세계에서 발생되는 모든 비인간적인 사건들, 불의와 폭력으로 억압받고 죽어가는 사람들 안에 존재하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절망 속에서 죽어 가시면서 발견하신 하나님의 전능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무엇이나 할 수 있다 혹은 못할 것이 없다는 기계적인 전능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있는 데도 아무 것도 안 하시고 바라만 보고 있다면 그런 신은 너무나도 무섭고 차가운 신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전능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고통 속에서 인간과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전능을 경험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과 형상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교정 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화 된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창조의 하나님, 세상의 하나님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가 잘못 알고 잇는 하나님을 죽여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참 하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홍인식 목사(더처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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