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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교인이 열댓명 남더라고요”이철우 목사, 노동자들과 광주기노련의 곁을 지켰다 ⑵
권이민수 | 승인 2021.03.08 16:48
▲ 이철우 목사는 노동운동의 한 가운데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기를 바랬다고 술회했다. ⓒ권이민수
80년대 민주화를 향한 치열한 투쟁 속에 함께했던 기독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기독인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만든 단체인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이하 기노련)이다. 그러나 기노련은 다른 단체에 비해 많은 이들에게 낯설기만 한 이름이다. 그래서 에큐메니안은 기노련의 활동을 조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전해보고자 기노련에서 활동했던 민주화 투쟁의 선배들을 찾았다. 먼저 만난 인물들은 전국 기노련 창립에 큰 역할을 했던 3인방 유동우 소장(관련 기사: 「유동우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두 번째 기사), 신철영 선생(관련 기사: 「기노련 탄생의 산파, 신철영 선생」, 첫 번째 기사두 번째 기사), 한명희 선생(관련 기사: 「한명희 기노련 초대 사무총장을 만나다」, 첫 번째 기사두 번째 기사)이었다. 이들은 기노련 탄생의 역사와 기노련 활동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기노련은 서울권에서만 활발하게 활동했던 것은 아니다. 기노련은 광주, 인천 등 여러 지역에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하며 노동자의 그늘이 됐다. 김상집 선생(「김상집, 광주기노련의 산증인」. 첫 번째 기사두 번째 기사)은 광주기노련의 탄생과 활동, 그 마무리 과정에 있던 다양한 이야기를 단숨에 풀어내기도 했다.

기노련의 곁에 항상 함께 해온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노련을 지원하고 지지하던 목회자들이었다. 지난 기사에서는 광주기노련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며 도왔던 광주 무등교회 이철우 목사가 기노련과 함께했던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줬다. 치열한 현장 속에서 구속되거나 다친 노동자들을 돌아보며 운동을 응원해 온 그의 목회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특히 목회자의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켜 본 경험담은 어디서 듣기 힘든 귀한 이야기들이었다.

이번 기사에서 이 목사는 좀 더 구체적인 목회자의 관점 아래 기노련과 노동운동을 진단하고 목회자와 기노련 가운데 있던 생각의 차이들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또 노동운동을 죄악시하거나 기피하는 한국 교회의 상황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을 예정이다.

▲ 목사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현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힘들었겠지만, 뒤에서 지원하고 지지하던 목사님의 역할도 참 많이 힘들었을 거 같습니다.

크게 보면 노동자와 함께한 것이겠지만 일단 제 역할은 뒤에서 있는 것이었으니 힘들어도 어쩔 수 없죠. 그 때는 전국민중교회운동연합이라고 있었어요. 기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단이 함께 했는데요. 100여 교회가 일 년에 한번정도 모였습니다. 그 때에는 노동자들이 함께 참여해서 한신대학교 같은 곳에 모여 복음성가도 부르고 했었죠. 다는 아니더라도 신앙을 가진 기노련 멤버들이 그 곳에서 토론도 하고요. ‘민중교회 운동이란 무엇인가’ 같은 주제였습니다.

당시 민중교회는 빈민, 장애인 등 여러 사회적 약자와 함께 했는데요. 그 중에 노동교회가 많았습니다. 각 공단에 있는 작은 교회들, 노동자와 함께 하려는 교회들이었습니다. 특히 70년도에 신학교 다니면서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도 되고, 감옥에 가기도 한 분들이 많았는데요. 그런 분들이 80년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교회운동, 민중교회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지역, 노동자들이 있는 지역에 와서 같이 활동을 했습니다. 그게 민중교회운동연합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연스럽게 노동운동, 노동선교와 만난 겁니다.

기노련은 처음 시작할 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 중심이 돼서 활동해서 민중교회연합과 자연스럽게 함께 했습니다. 당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예배당이 40~50명으로 꽉 찼습니다. 일반 교인도 있었지만 기노련 멤버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1992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동자 대중조직이 합법화되니까 그 쪽으로 다 옮겨가게 됐습니다. 현장이 또 얼마나 치열합니까? 그러니 다들 거기로 갔죠. 나중에 교인이 열댓명 남더라고요.(웃음)

▲ 기노련은 목회자 중심의 산업선교회와 달리 일반 기독인인 노동자 중심의 단체였는데요. 목사님으로서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노동자 중심의 단체라는 점에서 기노련을 상당히 의미 있게 봤습니다. 아주 귀하고 이 시대에 필요한 운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기독교 운동에서 쭉 활동을 했었습니다. 그 가운데 두 차례 구속도 됐고요. 특별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하면서 제 나름대로 민중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 전 70년대에는 유신독재 하에서 기청활동을 하면서 감옥도 가고 했는데 그 시기에 저는 민족에 대한 관심이 컸습니다. ‘우리 민족은 왜 분단됐는가?’, ‘왜 이 땅은 부조리한가?’, ‘독재는 왜 계속되는가?’와 같은 질문을 고민하고 발견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역사도 공부하고 그랬죠.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 구속된 사람들과 희생된 사람을 조사하는 활동을 제가 했었습니다. 당시 엠네스티 간사였거든요. 조사해보니 학생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전에 도망갔거나 이미 연행된 상태였습니다. 실제로 현장에서 계엄군의 만행에 항거하고 총 들고 싸웠던 사람들은 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민중이었죠. 노동자들, 세탁소에서 일하던 사람들 등 가난하고 공부도 해본 적 없는 민중들이 대부분 희생됐습니다.

민중들이 극한 상황에서 싸우고 희생도 당한 모습을 보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민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게 노동 선교로 이어지고 무등교회를 시작하는 동기가 되고, 노동자센터도 열게 됐습니다. 특히 기노련과도 함께하게 됐죠.

그래서 기본적으로 전 노동운동에 대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세한 부분에.(웃음) 제가 노동운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데 예배를 드린다거나 하면 노동자들이 좀 같이 드렸으면 했습니다. 자신을 되돌아본다는 점에서 예배를 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했죠. 그런 부분들을 노동자들이 소홀히 하는 거 같아서 목회자로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따로 들어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겠죠.(웃음) 목사가 자신들처럼 작업복도 입고, 현장에 나와서 돌도 던지고, 투쟁도 해주면 좋겠는데 점잔을 빼고 있었다는 불만이 있을 거예요.

어쨌거나 저는 노동운동을 이해하고 수용했습니다. 다만, 교회에 공동체가 있으니깐 그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자고 노동자들에게 불만스러운 소리가 나오기도 했던 거죠. 그래도 주요 활동가들은 다 교회 나오고 세례교인도 되고 그랬어요. 세례 안 받은 사람들 제가 다 세례도 주고 억지로 끌어다가 집사도 시키고요.(웃음)

그렇게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 지면 그 속에 있다가 때로 나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노동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 긴장은 항상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이 나가거나 반대로 목사를 쫓아내거나 하는 특별한 문제가 그런 긴장 속에서 나왔던 거죠. 제 전에 있던 목사님 같은 경우도 그런 셈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이 교회는 잘 안 나오고 이용해 먹을 것만 이용해 먹으니까 답답했겠죠.(웃음) 예를 들면 과거에 노동운동이 그랬잖아요. 교회란 것을 활용만 하려고 하는 태도를 가졌었죠. 전 그런 점이 좀 기분도 좋지 않았고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했던 거였습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서로 이해하면서 잘 해왔던 거 같습니다. 세세한 문제들은 서로 서로 있었겠지만요. 저도 문제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반대로 노동자들도 그렇지 않겠어요?(웃음) 교회라고 와서 잠만 자고, 라면만 끓여 먹고, 그렇게 치우지도 않고 다 늘어놓고 가고요. 그러면 제가 다 청소했습니다.(큰 웃음)

▲ 목사님은 노동운동에 대해 이해하시고 함께 하셨는데요. 한국 교회의 주요 정서는 노동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경우가 많은 거 같습니다. 이런 한국교회를 향해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해방신학이나 흑인신학, 민중신학 등을 배웠습니다. 특히 그 중에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죠. 이는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선교란 하나님께서 하시는 선교지, 교회의 선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의 선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전도만 이야기하고 교회가 중심이 돼서 무언가를 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는 그렇지 않아요. 교회가 아니어도 되죠. 넓게 이야기 한다면 교회 안 나오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회 구원활동이라든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 충분히 신학적으로 가능하다는 겁니다. 저는 교회중심주의가 문제라고 봅니다. 그건 좀 지양해야죠. 교회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만 가다보니깐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거죠. 요즘 와서는 교회와 사회가 너무 멀어져 버렸어요.(웃음)

제가 보기엔 오히려 사회의 상식이 교회의 상식보다 정의로운 거 같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게 생겼어요. 교회가 끊임없이 사회와 소통해야 되는데 기성교회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만 흘러가요. 목회자 중심주의, 교회 중심주의, 대형교회, 이런 식으로 사회와 교회가 너무 멀어져 버리니깐 저는 너무 걱정스러워요.

저는 교회를 정말 좋아했어요. 어려서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녔거든요. 어린 시절 교회에 가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교회 가서 피아노도 치고, 청소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요. 제가 그런 기도도 하나님께 했었어요. “관리 집사님이 되게 해주세요”라고요.(웃음) 교회에서 생활하는 게 너무 좋아서 교회 청소도 하고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오늘날의 교회가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 노동자와 함께하셨던 목사님의 목회가 참 인상 깊습니다. 이런 목회를 하시는데 기독교신앙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교회라고 하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본회퍼 목사님이 그러셨죠.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라고요. 교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교와 구원을 위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지금도 현장 속에, 끊임없이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매순간 깨닫게 됐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고통 받는 이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존재, 보냄을 받은 존재, 하나님의 선교 기지입니다. 그래서 제게 교회 건물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기노련이나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교회 활동을 할 때 교회 공간은 전부 협소했습니다. 한 30~40평되는 2층 셋방이나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 있기도 했죠. 그렇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크고 멋진 교회가 부럽지 않았고요. 그냥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웃음) 그래서 그 곁을 계속 지키게 됐습니다.

▲ 지금도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현장을 지키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앞서 현장 속에서 목회를 하셨던 목사님이신데 선배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나 격려의 한 마디가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저도 어떻게 나이가 들다보니 기성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격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웃음) 지금은 참 어려운 시절입니다. 한 40년 전 저희가 활동할 때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존경도 받고 세상과 소통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소통이 끊어지다시피 했죠. 그래서 지금 그렇게 활동하시는 분들은 더 어려운 환경 속에 있는 거 같습니다. 그렇다보니 참 소중한 분들이고 활동들입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일이고 개개인이 사명감을 가지고 하는 일이니 현장의 목회자 분들께서 긍지를 가지고 열심히 해주시길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개혁이 다시한번 일어나야 할 거 같습니다. 교회가 공동체를 잃고 너무 물질적이고 물량적인 쪽으로만 너무 깊이 가버려서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숨겨진 칠천명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역시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새로운 사람을 준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현장의 목회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새롭게 하나님의 선교를 해 나가시고 교회를 세워 가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목회자 분들이 새롭게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자기 고백적 긍지를 가지고 힘들더라도 열심히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철우 목사는 차분히 그간의 경험을 풀어냈다. 노동자와 함께 한 시간들은 때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그의 표정에는 그 시절에 대한 자부심과 기쁨이 묻어났다. 든든한 목사가 곁에 있었기에 광주기노련은 더욱 맘껏 투쟁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노동을 천시하고 노동운동을 죄악시하는 작금의 교회가 본받아야할 모습이다.

권이민수  simin0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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