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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은 나쁜 왕이어야 한다이스라엘 역사 알기 ㉗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3.18 00:46

열왕기에 나타난 연대적 혼란

이번 글에서는 북왕국의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시대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북왕국 이 세 왕에 대한 「열왕기」의 기록은 상당한 분량입니다. 「열왕기상 16장 21절 – 열왕기하 1장 18절」로 모두 8장에 달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8장에 달하는 「열왕기」의 기록 속에서 세 왕들에 관한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 성서의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이야기는 예언자 ‘엘리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예언자 ‘엘리야’와 관련된 이야기만 다섯 장(왕상17-19, 21; 왕하1)입니다. 「열왕기상 20장, 22장」은 아람과의 전쟁에 관련된 이야기이고 여기에도 예언자들의 역할이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나마 아람과의 전쟁은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북왕국 ‘아합’은 아람과 함께 반아시리아 연합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전쟁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북왕국과 아람의 전쟁은 반아시리아 연합을 맺기 전에는 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열왕기상 20장 32절」에 나타난 ‘아합’이 아람 왕 ‘벤하닷’을 ‘내 형제’라고 부르는 장면과 충돌하게 됩니다.

북왕국 ‘아합’과 아람의 전쟁에 관한 「열왕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는 북왕국 ‘예후’ 이후에 일어난 아람과의 전쟁 이야기를 ‘아합’에게 돌리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관해서는 지난 글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㉒ 「실재 역사와 역사가의 역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 가지 사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북왕국 ‘아합’을 가장 악한 왕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이야기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왕상21)입니다. 이 사건은 실제 ‘아합’과 ‘이세벨’이 일으킨 사건인지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점이 있습니다.

‘밀러/헤이스’는 「열왕기하 9장 25-26절」에서 ‘예후’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언급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밀러/헤이스, 『고대 이스라엘 역사』, 309-10). 몇몇 학자들은 이들의 가설에 따라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북왕국 ‘여호람’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고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이를 ‘아합’, ‘이세벨’, ‘엘리야’의 이야기로 각색하였다고 봅니다.

이런 가설은 ‘예후’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또 저희가 지난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이 반란에 북왕국 대다수의 백성이 동참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은 「열왕기하 9장」의 기록만으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아합’에게서 ‘여호람’으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합니다(존 그레이, 『열왕기상』, 국제성서주석 9, 637-9; T. R. 홉스, 『열왕기하』, WBC 13, 261).

제 생각에 이들이 제기한 반론은 「열왕기」의 기록을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놓인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또 ‘밀러/헤이스’의 가설이 완전하게 잘못되었다고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열왕기하 9장」만으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여호람’ 시기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반론들은 ‘밀러/헤이스’가 제시한 가설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열왕기상 21장」에 나타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증거 또한 「열왕기」 본문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무엇이 맞는지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 ‘아합’ 때에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아합’ 이후 여호람 때에 일어난 사건일 가능성은 열려있다고 봅니다.

‘밀러/헤이스’가 제시한 「열왕기하 9장」의 문제 이외에도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나봇’이 ‘아합’의 포도원 거래 제안을 거절한 근거는 「민수기 36장 7-9절」에 있습니다. 서로 다른 지파 간에는 조상의 기업을 매매할 수 없다는 법입니다(왕상21:3 참고). 보통 학자들은 「민수기」의 법이 만들어지고 기록된 시기를 따졌을 때, ‘나봇’이 이 법을 근거로 토지매매를 거절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서 기록 시기 문제를 떠나서 ‘아합’의 아버지 ‘오므리’는 ‘세멜’이라는 사람에게 은 두 달란트를 주고 사마리아 땅을 삽니다. 그리고 이 땅을 북왕국의 수도로 삼습니다(왕상16:24). 물론 ‘오므리’가 사마리아 땅이 속해 있는 므낫세 지파 출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아합’의 본래 왕궁은 분명 므낫세 지파에 속한 사마리아에 있었을 것인데, 「열왕기상 21장 1절」은 이스르엘 땅 ‘나봇’의 포도원이 ‘아합’의 왕궁에서 가깝다고 말합니다. 이스르엘 땅은 잇사갈 지파의 지역에 속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왕궁은 사마리아 왕궁일 수 없습니다. 만약 ‘아합’의 왕궁이 ‘나봇’의 포도원과 가까이 있었다면 이는 ‘아합’의 별궁이 이스르엘 지역, 또는 이스르엘과 인접한 잇사갈 지파 지역에 존재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만약 ‘오므리’와 ‘아합’이 므낫세 지파 출신이라면 이들은 잇사갈 지파 지역에 땅을 사서 별궁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이들이 원래 잇사갈 지파 출신이고 본래 자신들의 집이 이스르엘 주변에 있었고, 수도를 사마리아에 세운 것뿐이라면, ‘나봇’이 이야기하는 지파 간 토지매매 금지법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합’이 이미 예전부터 지파 간 토지매매법을 어기고 다른 지파의 땅을 구매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열왕기상 21장 4절」에 나타난 땅을 사지 못해서 근심하고 답답해 하는 ‘아합’의 상태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전에 했던 것처럼 어떤 방식을 취하건 법을 어겨 토지를 구매하면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는 이런 사실관계의 충돌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아합’과 ‘이세벨’을 악한 사람들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들의 대적자로 등장하는 ‘엘리야’를 높이는 방식을 취합니다(필리스 트리블, 김이곤 역, ‘이세벨 설화 여성신학 해석’, 「기독교사상」 39 (10), 132-142 참고).

‘그래비’는 『고대 이스라엘 역사』에서 앞선 본문에 나타난 예언자들과 관련된 사건들은 약간의 신빙성은 있지만, 의심의 여지가 있기에 역사를 재구성하는 자료로 활용하지 않습니다. ‘허셜 생크스(Hershel Shanks)’가 엮은 『고대 이스라엘 역사』도 ‘아합’ 왕실과 야훼 예언자 집단의 대결 구도는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이기 때문에 예언자 집단과 ‘아합’의 갈등 상황에서 야기된 사건들을 역사적 사건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열왕기상 16장-열왕기하 8장」에 나타난 북왕국 ‘아합’의 모습은 상당히 혼란스럽게 그려져 있습니다. 북왕국을 상당히 강한 국가로 성장시킨 왕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아람과의 전쟁에서 수차례 승리한 왕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반면에 아내 ‘이세벨’의 말에는 꼼짝없이 따르는 우유부단해 보이는 왕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또 야훼 예언자 집단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거나 의존하는 왕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바알을 섬기기 위해 야훼 예언자 집단을 박해하는 왕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여기서 ‘아합’이 야훼 예언자를 박해했다는 사실은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다양한 혼란으로 인해 최근에는 「열왕기상 17장-열왕기하 8장」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역사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 열왕기 역사가의 신학 사상을 밝히는 데에만 사용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어떤 사건 자료들을 각색해서 「열왕기」에 담아놓았음을 의미합니다. 

이 사건들의 주인공은 ‘아합’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합’ 앞에 나타난 예언자가 ‘엘리야’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엘리야’와 ‘엘리사’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들 속에도 어떤 역사적 사실이 감춰져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 사건인지 밝혀내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에 역사를 재구성할 때에는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국가의 탄생, 오므리 왕조

앞서 언급한 예언자들과 관련된 내용을 뺀다면,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에 관한 기록은 상당히 적습니다. ‘오므리’에 관한 내용은 「열왕기상 16장 21-28절」에만 나타나고, ‘아합’에 관한 기록은 「열왕기상 16장 29-34절」과 함께, 내용에 의심은 가지만 「열왕기상 22장 29-40절」에 ‘아합’의 죽음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존 브라이트(John Bright)’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아시리아 동맹이 아시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아람의 ‘벤하닷 2세’가 ‘아합’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기에 길르앗-라못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봅니다(존 브라이트, 『이스라엘 역사』, 314). 브라이트는 아람의 ‘벤하닷’도 「열왕기」에 따라 세 명이 존재했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과도하게 성경에 중심을 둔 경향이 있다고 봅니다.

「열왕기상 20장, 22장」에 나타난 아람과의 전쟁을 ‘아합’ 시대의 사건으로 돌리는 학자들은 아합이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 경우에는 ‘브라이트’와 마찬가지로 아람 왕 ‘벤하닷’이 몇 명 있었는지, 혹은 ‘하닷에셀’을 ‘벤하닷’이라고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해명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로 아람과의 전쟁을 ‘아합’ 이후의 것으로 돌리고, 열왕기 역사가 집단의 각색이라고 보는 학자들은 ‘아합’이 주전 853년에 있었던 아시리아 ‘살만에셀 3세’와의 전쟁에서 부상을 입었고, 이로 인해 죽었다고 판단합니다.

북왕국 ‘아하시야’의 경우 더 짧은 이야기만 나타나는데, 「열왕기하 1장」에 나타난 ‘아하시야’가 난간에 떨어져 ‘엘리야’를 찾았다는 이야기를 뺀다면 「열왕기상 22장 51-53절」에만 나옵니다. 「열왕기상 22장」이 제공하는 ‘아하시야’에 관한 정보는 2년간 왕위에 있었다는 사실과 바알을 섬겼다는 사실밖에 없습니다.

「열왕기」가 전해주는 작은 정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스라엘 역사 서적들이 ‘오므리 왕조’를 다룰 수 있는 이유는 이들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가 풍부하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므리’는 이스라엘 외 다른 지역의 사료에서 이름이 발견된 첫 번째 왕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상 16장 24절」의 기록대로 ‘오므리’는 사마리아에 수도를 건축합니다.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주전 9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트라카(ostraca, 그리스어 오스트라콘[ὄστρακον, Ostracon]의 복수 형태로 토기조각에 글을 기록한 것을 뜻한다)와 유적들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다만 고고학 연대 측정이 정확한 연대를 알려줄 수는 없기에 이런 사료들이 ‘오므리’ 시대의 것인지, ‘아합’ 시대의 것인지는 명확하게 밝히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두 왕의 시대에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로 정착하게 되었고, 상당한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사마리아 오스트라카 스케치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오스트라카의 스케치입니다. 실물은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Istanbul Archaeology Museums)에 소장 중인데, 사진을 찾기가 어려워서 스케치 사진으로 대신합니다. 이 오스트라카에는 사마리아로 들여오는 술과 기름을 관리하는 내용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에는 사마리아 오스트라카의 시기를 ‘아합’이 아닌 ‘여로보암 2세’로 돌리기도 합니다. 이 오스트라카는 파피루스나 양피지 또는 돌이나 점토판에 기록된 유물이 아닙니다. 조개껍질이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도자기에 기록된 사료들입니다. 이는 적어도 ‘아합’ 시대까지 사마리아의 관료들이 자신들의 업무 기록을 도자기에 남겼음을 보여줍니다. 이때까지도 이스라엘에서는 제대로 된 문서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레스터 L. 그래비, 『고대 이스라엘 역사』, 220-21 참고).

그렇다고 해서 ‘오므리’와 ‘아합’ 시기가 상당히 낙후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다는 점은 ‘오므리’ 왕조 이후 북왕국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발전했음을 보여줍니다. 또 남왕국 지역에서 이런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은 북왕국이 남왕국에 비해 더 체계화되었고, 발전했음을 알게 합니다.

다만 고대 이스라엘의 모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한참 이하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왕실이 고대 아시리아나 바벨론, 이집트에 필적할 정도로 발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허상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많은 군소국가, 블레셋, 모압, 암몬 등의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그 이하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오므리’가 사마리아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북왕국의 수도는 ‘디르사’였습니다. 「열왕기상 14장 17절」에 따르면 디르사를 수도로 삼은 왕은 ‘여로보암’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디르사는 북왕국 국내적인 상황에서 보자면 나쁘지 않지만, 산지에 고립된 형태이기 때문에 국제적 교역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오므리’는 국제 교역과 외교의 활성화를 위해 수도 이전을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통해 확인되는데, ‘이세벨’은 「열왕기상 16장 31절」에 따르면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는 ‘엣바알’이 페니키아 두로의 왕인 ‘이토바알(Ittobaal 주전 878-847년 추정)’이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사실 ‘이토바알’에 관한 정확한 정보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이름은 이스라엘 역사가 ‘요세푸스’(주후 30-100년)가 기록한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에서 페니키아 역사가 ‘에베소의 메난드로스’(주전 2세기경)의 글을 인용한 것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바알’이나 ‘엣바알’의 정확한 이름이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지만, 북왕국과 페니키아의 동맹이 서로에게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을지는 명확해 보입니다. 페니키아는 항구도시였기 때문에 북왕국과의 동맹을 통해 요단 동편까지 교역로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북왕국은 페니키아 항구를 통한 더 풍부한 국제 무역과 외교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 사마리아 유물 ⓒ메트로폴리탄 박물관(https://www.metmuseum.org/)

위의 사진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소장중인 사마리아에서 발굴된 유적의 일부입니다. 이런 양식들이 북왕국에서 나타난다는 점은 북왕국의 국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또 많은 외래문화가 유입되고 북왕국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므리’는 자신의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 공주와 결혼시킴으로 페니키아와의 동맹 관계를 맺습니다. ‘아합’은 자신의 딸 ‘아달랴’를 남왕국 ‘여호람’과 결혼시킴으로 남왕국과의 동맹 체계도 확립합니다. 이를 통해 북왕국은 모압, 에돔에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게 됩니다.

▲ 쿠르크 석비 뒷면 ⓒ위키피디아

쿠르크 석비(Kurkh Monolith)의 전면 사진은 지난번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㉕ 「무르익은 반란의 기운」’에 실었기 때문에 뒷면 사진을 싣습니다. 이 비문에는 ‘살만에셀 3세’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침공 기록에는 반아시리아 동맹 12개국의 병력이 나타납니다.

그 중 ‘아합’의 병력은 ‘병거 2000, 보병 10000’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이 ‘병거 1200, 기병 1200, 보병 2000’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상당한 군사력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때로 학자들은 북왕국의 병력이 과장되어 기록되었거나 잘못된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책에 다 나타나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보셔도 좋지만, ‘그레비’가 이런 병력 축소 이론을 반박하며 가장 충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레스터 L. 그래비, 『고대 이스라엘 역사』 243-4).

‘아합’ 시대에는 건설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열왕기상 16장」에 따르면, ‘오므리’는 사마리아를 건설했고, ‘아합’은 바알 신전을 건축합니다. 이후 ‘아합’의 죽음을 기록한 「열왕기상 22장 39절」에는 ‘아합’이 상아궁과 성읍들을 건축했다고 말합니다.

고고학 자료들을 통해 ‘아합’ 시대에 므깃도와 하솔의 확장 건축이 진행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아합’ 시기에 므깃도는 두께가 3.6미터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므깃도에서 발견되는 마굿간, 성안의 요새로 연결되는 거대한 지하수로 역시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J. 맥스웰 밀러/존 H. 헤이스, 『고대 이스라엘 역사』 329-30 참고).

지난 ‘이스라엘 역사 알기 ⒇ 「어떤 왕도 다윗과 솔로몬의 업적을 넘어서면 안 된다?」’에서 남왕국은 ‘아마샤’, ‘웃시야’, ‘요담’ 시기인 주전 800년에서 745년에 국가적 기반을 닦았음을 확인했습니다. 남왕국은 주전 8세기에 도시국가 형태를 벗어나 영토 국가를 이룹니다.

오므리 왕조의 연대

반면에 북왕국은 ‘오므리’가 왕이 된 이후 국가 체계를 이룹니다. ‘오므리’에서 ‘아하시야’까지의 연대를 추정해보면 ‘아하시야’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2년간 북왕국을 통치했다고 생각했을 때, 주전 852-851년까지 북왕국을 다스렸습니다. ‘아합’은 22년간 북왕국을 다스렸다는 「열왕기상 16장 29절」에 따라 주전 873-852년에 왕위에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연대에 대해서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열왕기상 16장」에서 연대에 착오가 일어나는 왕은 ‘오므리’입니다. ‘오므리’는 12년 동안 왕위에 올랐다고 나타나는데, 디르사에서 6년간 다스렸다고 말합니다. 사마리아에서도 6년간 다스렸을 것입니다. 문제는 남왕국 왕의 연대와 비교하는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열왕기상 16장 23절」에 따르면 ‘오므리’는 ‘유다 아사 왕 31년’에 왕위에 오릅니다. 「열왕기상 16장 29절」은 ‘아합’이 ‘유다 아사 왕 38년’에 왕위에 올랐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므리’의 통치 기간을 8년으로 줄이게 되는데, 단순한 오류라기보다 북왕국의 분열에 따른 혼동으로 보입니다.

‘오므리’가 디르사에서 ‘시므리’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을 때, 북왕국은 ‘오므리’를 따르는 이들과 ‘기낫의 아들 디브니’를 따르는 이들로 나뉘게 됩니다. 이 둘의 분열과 갈등이 얼마나 긴 기간 동안 지속되었는지 정확한 시기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앞서 나타난 연대의 차이에 의해 계산이 가능합니다.

‘오므리’의 통치기간 12년에서 남왕국 ‘아사’의 연대를 빼면 4년입니다. 아마 「열왕기」가 말하고 있는 ‘오므리’의 왕위 등극 시점은 북왕국의 분열을 제압하고 전체를 통합한 시점으로 보입니다. 즉 북왕국은 4년간 ‘디브니’와 ‘오므리’로 갈라져 분쟁이 일어났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북왕국의 왕위에 오른 ‘오므리’는 디르사에서 2년을 더 통치하면서 사마리아를 건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즉위 7년차에 사마리아로 수도를 이전하고 6년을 더 다스립니다. 그래서 ‘오므리’의 통치 기간을 추정해보면, 주전 885-874년이 됩니다. 따라서 북왕국은 남왕국보다 70년 이상 빠르게 국가 체계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므리’가 세운 왕조는 북왕국에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놓았습니다. 하지만 「열왕기」에 나타난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악의 대명사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본래 히브리어 성경은 「열왕기상,하」 의 구분이 없기 때문에 「열왕기」를 한 권으로 본다면 ‘아합’에 관한 긴 이야기는 「열왕기」의 한가운데 놓여있게 됩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어째서 다양한 각색을 통해 ‘아합’을 악한 왕의 대명사로 표현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엘리야’, ‘엘리사’로 대표되는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아합’ 시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열왕기」가 기록되던 시기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작업일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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