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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셀 염소, 한 사람의 죽음(레 16:1-10, 20-22; 히 9:11-15; 요 11:47-57)사순절 다섯째주일(3월21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3.19 15:20

1. 20세기를 상징하는 장소 3곳

▲ 아우슈비츠 희생자들과 히로시마 원폭, 체르노빌 후유증

20세기를 상징하는 장소 3곳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그리고 ‘체르노빌’입니다. 먼저 아우슈비츠는 ‘이성의 시험대’로 철학과 이성의 나라인 독일이 어떻게 비이성적인 집단행동을 통해 사람을 죽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두 번째는 일본의 히로시마로, ‘과학의 시험대’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과학이 진정 윤리적이고 인간적일 수 있는가를 묻는 장소입니다. 인간의 과학으로 만든 원자폭탄은 결국 인간을 죽이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실 인류의 역사는 ‘무기의 발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과학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무기를 개발하는 데 사용 되어 왔습니다. 이렇게 과학으로 사람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나라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선진국들입니다. 물론 지금의 미얀마도 그렇죠? 인간의 과학으로 만든 총과 탱크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 미얀마의 전 국가고문 아웅산 수치(왼쪽)와 쿠데타 주동자 민 아웅 흘라잉(오른쪽), 탱크까지 동원된 쿠데타, 군부의 수하인 경찰도 쿠데타에 가담하여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따라서 미얀마인들은 ‘세 손가락 경례(Three-finger salute)’를 통해, ‘독재에 저항하고,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의미를 전세계에 전하고 있다.

미얀마는 지난 2021년 2월 1일, 국부 아웅 산의 딸인 아웅산 수치(Aung San Suu Kyi)가 이끄는 집권 국민민주연맹(NLD)이 압승한 2020년 11월 총선 결과에 민 아웅 흘라잉을 위시한 군부가 불복하며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 이전부터 이미 정부에 대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고, 문민통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우리나라 검찰 권력과 비슷하죠?). 그 결과 1988년 쿠데타에 이어 2021년 쿠데타에서도 별다른 저항이나 무력 충돌 없이 소규모로 굉장히 쉽고 빠르게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미얀마의 불안정했던 민주주의 정권은 5년 만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자 시민들이 들고일어났습니다. “군부 밑에서 사느니 차라리 시위하다 죽겠다!”라고 외치고 군부에 저항한 것입니다. 미얀마 민중들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마치 박정희 유신체제에 저항한 부산과 마산의 79년 부마민주항쟁과 신군부인 전두환의 쿠데타에 저항한 80년 광주항쟁을 보는 것 같습니다.

▲ 위쪽은 부마민주항쟁, 아래쪽은 광주항쟁

마지막 세 번째로 체르노빌은, ‘기술의 시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술력이 과연 완전한가,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시험대입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강진으로 인한 핵발전소 사태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청정에너지로 알려진 핵발전소는 사실 핵무기 이상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핵을 반대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더 큰 불행이 닥쳐야 깨달음을 얻는 인간의 무지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기상 교수는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살림, 2003)라는 책에서 이러한 문제가 ‘이성 중심의 합리성’과 ‘가슴이 없는 인간’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뜨거운 가슴 없는 냉철한 이성이 결국 인류의 종말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들어볼까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전의 철학적 큰 흐름이 결국 이성 중심이었으며, 이성 중심은 주로 합리성, 합리화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달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합리성과 합리화는 순전히 이론적, 인식적 합리화, 기술적 합리성으로 됨으로써 도덕적, 실천적, 미학적인 차원은 배제되고, 주로 이론적 합리성 혹은 과학적 합리성이 세계를 지배하게 됨을 의미한다. … 이렇게 가슴이 없는 인간이 만들어낸 끔찍한 짓거리의 예로 우리는 히로시마의 원폭,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량학살 등을 들 수 있다.”

2. 4D, 21세기 문명의 새 방향!

최근 코로나 사태 이후, 미학을 강조하는 ‘아름다움의 신학’과 도덕에 기초한 ‘윤리 신학’, 그리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공공신학’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제 인류의 문명사는 채집, 수렵의 사회인 ‘신체의 시대’에서 산업사회인 ‘인간 이성 주체의 시대’로, 또한 지식, 정보화시대의 ‘매체의 시대’에서 미래사회인 ‘영체의 시대’로 진행할 것입니다. 20세기를 상징하는 3장소와 달리 21세기 문명의 새 방향은 4D, ‘생명(DNA)’, ‘매체(Digital)’, ‘시각(Design)’, ‘영성(Divinity)’이 그 화두가 될 것입니다.

특히 생명과 영성의 문제에 있어서,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말씀에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문예출판사, 199)을 소개하며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촉진하며, 생명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고양하는 것을 ‘선(善)’으로 받아들인다고 말씀드렸죠? 반면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파괴하는 것, 생명에 해로움을 주는 것, 생명을 억압하는 것을 ‘악(惡)’으로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바쳐짐으로, 곧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아니 온 인류가 망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은 바로 그 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약 레위기에 나오는 아사셀 염소에서 이미 예표 되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구약 아사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룬, ‘좋은 일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로 소개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3.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자신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유대인들에게 물었을 때의 상황입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이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어떤 자가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리게 됩니다(요 11:45-46). 그 이후의 말씀이 본문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요 11:47-48)

예수께서 표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죠? 그러나 식민지 상황인 유대 나라에 이러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것은, 유대 땅의 지배자인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반란이고 소란입니다. 유대인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걱정합니다. 이미 이들은 현 체제에 만족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일에 종교인들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 결정한 것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판단입니다. 영적인 영향보다는, 정치적인 파장을 우려하며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나서서 주동합니다.

▲ 산헤드린 공의회 모습과 마티아스 스톰의 <그리스도 앞의 가야바>

“그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요 11:49-50)

예수님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죠? 표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놀랍고 새로운 일에 그저 예수님 한 사람 죽이면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악을 선으로 갚습니다. 따라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가야바의 말에 부연 설명을 합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52)

악한 이들의 계획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가야바 대제사장의 악한 의도를 하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역사로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이제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요 11:53-54)

예수께서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알고 드러내지 않고 빈들 가까운 에브라임에 머무십니다. 그러나 때마침 유월절이 가까웠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유월절 명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찾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도 혹시 예루살렘에 오지 않을까 하고 작전을 짭니다. 말씀을 볼까요?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그들이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요 11:55-57)

결국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오셨고, 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들의 계획대로 희생양이 됩니다. 그러나 이 희생양은 온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레위기에서는 아사셀 염소라는 예표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아사셀 염소

사실 오늘 구약 본문 레위기 16장 말씀은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대속죄일 날이 되면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갖고 지성소에 들어가, 온 백성들의 죄에 대해 속죄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때 아사셀 염소가 있었죠? 그리고 이스라엘 온 백성은 금식하면서 안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대속죄일은 매년 일회씩 지켜졌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레 16:1-2)

레위기 10장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하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여 결국 불이 그들을 삼켜 죽게 됩니다(레 10:1-2). 따라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소에 아무 때나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볼까요?

“아론이 성소에 들어오려면 수송아지를 속죄 제물로 삼고 숫양을 번제물로 삼고, 거룩한 세마포 속옷(저고리)을 입으며 세마포 속바지를 몸에 입고 세마포 띠를 띠며 세마포 관을 쓸지니, 이것들은 거룩한 옷이라. 물로 그의 몸을 씻고 입을 것이며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서 속죄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 삼기 위하여 숫양 한 마리를 가져갈지니라.”(레 16:3-5)

이 말씀에 기초해서 대속죄일에 드릴 속죄제와 번제를 위해 준비할 제물을 정리해 볼까요?

① 대제사장의 속죄제를 위한 수송아지 한 마리
② 대제사장의 번제를 위한 숫양 한 마리
③ 이스라엘 자손의 속죄제를 위한 숫염소 두 마리
④ 이스라엘 자손의 번제를 위한 숫양 한 마리

이렇게 총 5마리의 제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속죄일 절기에 드리는 제사는 단 2가지 종류입니다. 이때 곡식 제물은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의복도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대제사장의 옷이 아닌 일반 제사장이 입는 옷을 입습니다. 원래 대제사장은 흰색 세마포 옷 위에 청색의 겉옷을 입고, 겉옷 위에 에봇을 입고, 가슴에 흉패를 붙이고 양쪽 어깨에 호마노를 붙이죠. 그러나 그냥 일반 제사장의 옷을 입고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지냅니다. 이것이 거룩한 옷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것은 세마포 옷(베옷)이지, 화려한 옷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대제사장이 입는 세마포 속바지, 세마포 속옷(저고리), 세마포 띠, 세마포 관과 일반 제사장 복장과 대제사장 복장의 앞뒤 모습

아무튼 대제사장인 아론의 속죄제를 위해서는 수송아지 한 마리로 속죄 제물로 삼고 숫양 한 마리는 번제물로 삼지만, 이스라엘 자손의 속죄 제물로는 숫염소 두 마리와 번제물로는 숫 양 한 마리를 드려야 합니다. 아론은 그대로 행합니다.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레 16:6)” 그리고 이제 숫염소 두 마리의 용도가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 16:7-10)

제비 뽑아 염소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로, 여호와 앞에서 속죄하고 광야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살아 있는 염소를 드리되,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 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니라.”(레 16:20-22)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의와 죄를 지고 광야에 놓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사셀이라는 말은 ‘쫓겨난 귀신,’ ‘추방당한 악령’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아잘젤(עֲזָאזֵל)의 유음(流音)화 현상으로 ‘타락한 영적 존재들’, 곧 ‘타락 천사’를 뜻합니다. 아론은 이 아사셀 염소에게 이스라엘 자손이 지은 온갖 악행과 반역 행위, 또한 모든 죄를 안수하여 옮긴 후에 황무지로 끌고 가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영원히 떠나보냅니다.

이것은 인간 세상에 죄를 끌어들인 죄의 근원인 사탄에게 그 죄를 돌려보내고 그 죄와 함께 영원히 사탄이 형벌을 받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아사셀 염소가 바로 우리의 죄, 곧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아사셀 염소

5. 그리스도는 좋은 일의 대제사장

그러나 신약 시대로 넘어오면, 이제 더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단번에 성소에서 속죄를 이루시어 다시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는 그것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1-12)

예수님은 아사셀 염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사셀 염소의 고난과 죽음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이제 인류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볼까요?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무슨 말씀입니까?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의 피가 우리를 선한 양심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보혈’을 이야기하며 악을 행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진정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영원한 기업을 제대로 이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아사셀 염소처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의 죽음으로 온 인류 구원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이 새로운 언약의 증보자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에 의하면, 우리의 양심이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세요. 나의 양심은 얼마나 주의 보혈로 씻기어 있는가? 더러운 양심으로 오늘도 나는 예수님을 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는 않는가? 아니 우리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역사는 아닌가?

서두에 언급했듯이 21세기에도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 체르노빌이 존재하지는 않는가요? 이제 우리의 양심이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도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이름으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참다운 영성에 있습니다. 그 길에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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