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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을 넘어 선한 삶굳이 안 해도 되는 일(누가복음 18:20-23)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3.21 15:15
▲ 예수께서는 부자의 삶을 인정하셨지만 율법을 넘어 그의 삶이 확장되기를 원하셨다. ⓒGetty Image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오늘은 사순절 다섯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 우리 기독교의 모습을 되돌아보며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많은 분께서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한 부유한 사람이 예수님께 어떻게 영생을 얻어야 할지 질문하며 시작됩니다. 마태복음에는 어떤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했다고 나오고, 마가복음에는 어떤 사람이 질문했다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바리새인, 서기관, 관료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인지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질문했다고 말합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이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5계명에서 9계명을 말씀하십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반문하시자, 질문을 한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이 계명들을 다 지켜왔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은 어릴적부터 범죄한 사실이 없다고 예수님 앞에 당당히 이야기합니다.

이런 관리의 모습은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에 나오는 18장 9-14절의 바리새인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비유 속에서 바리새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율법과 전통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11절에서는 율법이 금지하는 항목은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12절에서는 율법과 전통에서 하라고 하는 항목을 지켜왔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부자 관리도 마찬가지로 대답합니다. 자신은 율법과 전통을 충실히 이행하며 살아온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오늘 본문 아래에는 공관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부자, 재물이 많은 사람에 대한 비판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초대교회로부터 많은 논쟁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대 교부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츠는 ‘부자의 구원’이라는 책을 통해, 그저 돈이 많다는 이유로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에만 몰두해서 살아가는 삶을 비판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부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누가복음 12장 13-21절, 한 부자의 비유에서도 드러납니다. 이 비유는 자신의 형에게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도록 명령해달라는 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것입니다. 이 비유 속에서 부자는 밭의 소출이 늘어나자 더 이상 곡식을 쌓을 곳이 없어서 새로운 곡간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약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영혼을 그날 밤에 취하신다면, 그가 쌓아놓은 재물은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이 말씀 속에서 부자는 그저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쌓아두기만 하고 쓰거나 베풀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 속에서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하게 보입니다. 사실 부자는 나사로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나사로는 그냥 가난한 사람이었고 영양부족 때문이었는지 병이 있었는지, 그저 부자의 집 앞에서 죽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앞선 12장의 말씀과 연결해 보면 부자는 자신만 호화롭게 즐기는 삶을 살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에 나사로의 죽음에 책임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아무리 열심히 지켰어도 전통을 잘 따랐어도 베풀지 않는 삶은 영생에 이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베푼다는 의미로만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선한 일, 남을 돕는 일을 행하라고 말씀하셨다는 데에서 그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선행을 장려하는 말씀과 함께 비판적인 이야기도 담겨 있습니다.

율법에 충실한 삶은 율법만 지키면 되는 삶입니다. 하면 안 된다는 일은 하지 않으면 되고, 하라고 하는 일은 하면 됩니다. 이게 율법적인 삶이고, 저는 율법만 강조하는 태도가 율법주의가 아니라, 이런 모습이 율법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태도를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도 부자 관리에게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해야 할 일은 다 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은 안 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는 이미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웃 사랑은 이미 율법의 일부이지만 추상적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최소한의 형태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면 끝날 수도 있는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라도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율법에 안 적혀 있으니까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깨닫고 그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법은 우리 삶에서 최소한의 장치일 뿐입니다. 그 법을 잘 지켰다고 해서 우리가 선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 법이 가진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의미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전통을 지키기에만 급급했던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의 본래 의미를 깨달으라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돈쭐낸다’는 표현을 종종 보게 됩니다. ‘돈으로 혼쭐내준다’라는 표현입니다.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최근에 있었던 일은 아마 다들 보셨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 치킨집 사장님이 형편이 어려운 형제에게 몇 차례에 걸쳐 공짜로 치킨을 제공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이 사연이 인터넷에서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런 사장님은 ‘돈쭐내줘야 한다’면서 그 가게에서 치킨을 엄청 주문하는 바람에 한동안 영업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최근 사람들은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힘든 처지에도 불구하고 남을 위해서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 선한 사람들을 요구하고 이런 사연이나 이야기를 접할 때 상당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 반대급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연예인, 운동선수들에 대한 과거 학폭 논란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어떤 형태의 폭력이건 폭력은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과거의 폭력에 대한 고발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사실은 나쁜 사람인데 TV에서 착한 척 했다는 점에 분노합니다. 최근 농구선수 H씨가 과거에 학교 폭력을 휘둘렀다는 인터넷 게시글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과거에는 다들 그랬는데, 이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폭력을 휘둘렀는가 아닌가의 문제보다 이 사람이 착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더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선한 사람, 착한 사람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사회의 평가는 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현재의 그리스도인은 사회가 원하는 착한 사람의 기준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이 착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시기가 있었나 되돌아봤습니다. 제 어린 시절 주변 친구들의 평가, 제가 봐왔던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되돌아봤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 된 이후 적어도 30년간 저는 교회 다니는 분들을 착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지금에 와서야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전부터 그런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최근에야 개신교의 평가가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율법에 대해 말할 때, 사도 바울을 들먹이면서 그 최소한의 율법조차 지키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며 율법 안 지켜도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세상에서는 악하게 살더라도 주일마다 교회 가서 헌금하고 회개하면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 할지라도, 율법의 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의미에 맞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기보다 그저 십계명만 준수하면서 살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그 정도 수준의 율법 준수만 했습니다. 솔직하게 십계명 5계명 이하에 나타난 계명은 어느 사회에서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입니다. 이를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항목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번 사순절 기간에 우리 개신교의 모습,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매이지 말고 율법에 없는 일이라도 그 본뜻에 따른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을 넘어서,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부자 관리에게 부족한 딱 한 가지가 그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오해해서 굳이 ‘안 해야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과도한 친절과 선행은 상대방을 오히려 부담스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너무 오버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굳이 안 해도 되는 일들, 선한 일들, 착한 일들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만을 쌓아두려고 하지 않고 베풀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고, 율법 준수를 넘어 영생에 이르는 길,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좋은 그리스도인, 착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찬을 받게 되길 바랍니다. 또 우리가 땅에 떨어져 있는 개신교의 이미지를 선한 이미지로 바꾸는 역할을 하게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영생이, 하나님 나라가 허락될 줄 믿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지치지 않도록 힘을 주시며 평안을 내려주시고 은혜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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