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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오늘 다시 인격(人格)인가? 우리 시대의 인학(仁學)과 신학(信學)사유와 信學 4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 승인 2021.03.21 15:52
▲ ‘퇴계 이황(退溪 李滉)’

지난 3편 ‘인격이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드러내고자 하는 인간 이해, 베르댜예프의 언어로 하면 ‘인격’이고, 한국 古사상으로 하면 性·命·精과 心·氣·身의 세 차원(三神)의 하나 됨이 강조되는 ‘정신’으로서, 그것은 이성과도 다르고,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육체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영혼을 말하는 것도 아님을 강조했다. 인격과 정신으로서의 인간은 이 모든 차원을 포괄하고, 서로 통하게 하고, 하나의 실존의 형식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 수수께끼 같은 단독자라고 했다. 그런데 왜 오늘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존재인 인간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 인격이라는 말은 한없이 식상한 상투어가 되어버렸고, 정신(精神)이라는 언어도 원래는 그 언어가 한자어로 ‘정(精)’이라는 몸적인 것과 ‘신(神)’이라는 영적인 것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말이지만 오늘 우리 현실에서는 이 인간 존재의 전일성과 통합성이 한없이 무시되고 왜곡돼 있다.

얼마 전 한국의 첫 성전환자 군인이었던 변희수 하사의 급작스러운 죽음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즉각적인 반응은 그것은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었다는 것이었으며, 한국 국방부가 우리 사회 인권 수호의 공적 보루였던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도 무시한 채 그를 강제 전역시킴으로써 그 생의 비극적 마무리에 큰 책임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베르댜예프의 언어로 하면 이 비극과 폭력은 한국 사회는 여전히 인간의 인격(인권)을 ‘자연’의 산물로만 보는 자연에의 노예성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오늘 수많은 사람이 자신 일상적 삶의 플랫폼으로 삼고 있는 ‘쿠팡’ 노동자가 또 그 과도한 노동으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뉴스도 듣는다. 그 쿠팡 노동자의 인격이 그 신체적 노동력에 철저히 한정된 경우이고, 여러 가지 개인적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서 지금의 빈곤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어떻게든 그 처지를 타개하기 위해서 노동하는 가운데 죽어간 것이다. 그의 인격이 결코 그 신체적 힘과 노동력으로 등가화될 수 없는데도 말이다.

왜 다시 실존인가?

인격이라는 말뿐 아니라 ‘실존(existence)’이라는 언어도 이미 거의 사어(死語)가 되어버렸으며, 상투화의 냄새를 많이 풍기고 있다. 그래서 이 말을 다시 가져온다는 것이 어떤 뜻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앞에서 밝힌 대로 인격이나 정신의 모순적 비의성과 창조성, 역동적 수행력을 밝혀내기 위해서 이 말만큼 여전히 유효하고 적실한 것이 또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無/无, non-being 또는 nothingness)와 공(空, the void)으로 있다가 어느 순간 찰나에 분별을 위해서, 선택을 위해서, 그래서 존재(有)를 불러일으키고, 선(善)이 있게 하며, 한 발자국 또는 한 차원의 새로움을 가져오는 힘!

그러나 30여 년 한스 요나스 같은 윤리학자는 당시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지구의 존재 자체가 위기에 빠졌다는 것을 감지하면서 그 타개의 길로서 더는 그러한 ‘주관’의 도덕심이 아닌 위기에 빠진 ‘객관’의 ‘존재 자체’를 인간 윤리의 출발점과 근거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바, 거기서 강조되던 객관의 존재-예를 들어 갓 태어나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우리의 책임을 호소하는 한 아기의 존재-와 지구 존재가 얼마나 쉽게 인간 주관에 의해 무시되고, 대치될 수 있는지를 보았다. 요나스도 강조했고, 지금까지 인류 문명에서 종종 모든 인간 윤리의 모형이나 원형이라고 찬양되어온 ‘모성’에 의해서도 그 대상이 존재를 잃는 경우를 허다한 경우를 보면서 과연 ‘객관’과 ‘존재’에 근거한 윤리가 얼마나 힘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여기에 더해서 오늘 지구 선진국들은 이때까지 우리의 의심하려야 할 수 없는 삶의 토대였던 지구 자체도 이제 실컷 쓴 후 버릴 수 있다는 계산으로 우주 공간에서 그것을 대신할 새로운 곳을 찾기 위해서 엄청난 재원을 쓰고 있다.

자신 존재의 지속을 온전히 타인의 배려에 맡길 수밖에 없는 아기나 어린 자식 같은 미약한 존재(객관)나 인간 생명의 독존적 터전과 집이라고 여겨지던 지구 존재도 더는 인간 윤리의 촉발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하다면 어떤 길이 남아 있는가?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가 다시 가져오고자 하는 ‘실존’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인간적 주체와 그 자유의 힘을 믿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실존은 존재보다 훨씬 더 ‘여기 지금’의 주관적 순발력에 근거해서 한 존재자의 있음과 존재에의 요구를 듣고 행할 수 있는 능동적 수행력이고, 단순한 피동적인 주관의 존재가 아닌 ‘주체(subject)’로서의 자유(freedom)가 강조된 의미로 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여러 번 강조했지만 근대 과학 문명은 주관도 철저히 하나의 객체적 대상물과 존재물로 환원시켜 이후 인간 윤리의 문제가 오늘날 널리 유행하듯이 각종 자연과학이나 심리치유, 뇌과학 등의 정보나 관리의 문제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이 다일까? 그 자신의 시대에서 그러한 객체화의 파국과 위험을 보아온 베르댜예프는 거기에 대해서 우주가 인격의 일부인 것처럼 사회가 오히려 인격 일부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인격은 외부에서 행해지는 모든 결정에 대립하며 내부(인격)로부터 결정되는 자유의 신비라는 것을 어떻게든 드러내고자 했다. “인격은 전(全) 객체 세계 밖에서 내면의 자기를 결정한다. 내부로부터의 자유에서 출발한 결정만이 인격이다”라는 서술과 더불어 “자유의 신비는 곧 인격의 신비”라는 것을 밝히면서 깊은 실존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베르댜예프, 『노예냐 자유냐』, 34쪽).

고뇌하고 환희를 느끼는 실존과 인격의 신적 보증

이렇게 자유로서의 인격은 결코 어떠한 객체(존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되고, 만약 그렇게 될 때 그것은 인격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런 뜻에서 “객체는 항상 악이며 주체만이 선일 수 있다”라는 말까지 한다. 이 말은 21세기에 와서 한스 요나스 같은 윤리학자도 빠져들기 쉬운 인간에 대한 각종 존재론적 환원이 선과 악을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로 간단하게 나누는 것에 반대한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이미 만들어진 어떤 정답이나 형식, 제도와 보편으로 제한하거나 객체화하는 것에 저항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자유가 단지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의지(willing)’의 자유나 세속적인 인본주의에서의 인간 합리성의 ‘선택’의 자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이러한 실존과 자유의 깊이를 베르댜예프는 오히려 인격이 만유이고, 전체이며, 어떤 의미에서 전 세계가 인격의 소유라는 말로 선언해 왔는데, 여기에 더해서 그는 그 자유의 “보증(the guarantee)”을 위해 다시 “신(神)”을 끌어들이고, “초인격”이나 “자기 초월”을 말한다(같은 책, 35쪽). 그만큼 인격과 자유는 세상에 대해서 역설이고, 비의이며, 모순과 신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연과 사회의, 카이사르(Caesar) 왕국의, 객체 세계의 노예화하는 권력에서 인격을 자유롭게 하는 것의 보증이다. 이 일은 정신(the spirit)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객체의 세계에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객체 세계의 어떤 범주도 내면적 실존의 관계로 옮겨놓을 수 없다. 객체 세계의 어떤 것도 진정한 실존적 중심은 아니다.”

이렇게 베르댜예프가 인격의 자유를 위해서 다시 신을 끌어들이는 것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는 다음번으로 미루고,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서 동아시아 유교 전통에서도 인간의 정신(性)에 대한 보증으로서 ‘천리(天理)’와 ‘태극(太極)’을 말하고, 다시 그 태극의 더 높은, 또는 더 깊은 시작과 근원으로서 ‘무극(無極)’을 말하는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특히 조선 성리학에서 퇴계 선생이 당시 떠오르는 신세대 학자 기대승(奇大升, 1527-1572)과 더불어 인간 존재의 가능성과 한계를 깊이 논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의 고투가 떠올랐다.

퇴계 선생은 당시 새로운 시대의 조류로 인간 본성(性)을 쉽게 자연주의화하고 실체론화 하는 것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는 당시의 젊은 학자 기대승이 인간의 신체적 현실과 감정적 실존(氣)을 중시해야 한다는 지적과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지만, 그러면서도 그러한 주장 안에 내포된 위험성을 보았다. 즉 그것은 인간의 인격(性)을 과도하게 기적(氣的) 차원으로 환원시키면서 인간의 선험적 선성(性卽理)을 왜소화시키는 위험인데, 그래서 그에 대하여 7년여에 걸쳐 인간 본성의 선함과 현실적 감정의 차원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그 두 차원의 역동적 관계와 연결을 긴밀히 엮어내면서도 본성적 리적(理) 차원의 근원성과 토대성(所從來)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1)

필자는 퇴계 선생의 이 고투가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어떻게든 인간 인격의 다면적 차원을 밝히면서도 동시에 그 근원적 초월성을 논하기 위해서 다시 그 ‘신적 보증’을 불러들이고, ‘정신’이나 ‘자유’, ‘실존’이라는 그렇게 강조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계속 말해왔지만, 베르댜예프는 20세기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각종 과학과 진보주의, 자연주의나 사회주의 등으로 과격하게 물화 되어서 해석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격주의로 인간 존재의 잃어버린 초월적 차원을 밝혀낼 수 있기를 바란 것이다. 여기서 베르댜예프는 퇴계 선생이 인간 마음의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부끄러워하는 마음), 사양지심(삼가는 마음)이나 시비지심(구별하는 마음) 등의 도덕 감정이 바로 인간 인격의 초월적 차원(性理)을 여기 지금의 현실의 삶에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 것과(2) 유사하게 특히 인간의 고뇌와 환희를 느끼는 능력을 인간 실존의 깊은 심정적 표현으로 보았다(같은 책, 35쪽 이하).

고뇌와 환희를 느끼는 능력 속에서 베르댜예프는 특히 “고난을 감내하고 고통을 견디는 능력”을 실존적 인격의 핵심으로 본다. 인격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뇌 자체라고까지 적시한다. 왜냐하면, 인격성, 즉 자유는 우리를 노예화하려는 세상 노예성과의 투쟁을 요구하고, 그런 의미에서 자유의 실존으로서 인격으로 산다는 것은 고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AI 인공지능이 말해지는 시대에 가장 간과되기 쉬운 것이 바로 이 고난을 감수하고 인내하는 능력이라면, 그 반대로 인간의 자연주의적 확장으로서의 AI 인공지능이 아무리 여러 인간 감정 영역까지도 넘나드는 때가 되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고유하게 인간의 인격적 자유를 드러내는 범주는 이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이유는 인내의 지속하는 능력(誠)은 최고의 ‘정신적 집중력과 긴장력(敬)’을 통해서 과거 삶의 경험을 ‘기억(理)’으로 불러오고, 미래에 대한 ‘상상의 믿음(信)’을 통해서, 또한 그의 모든 감정(情)과 몸의 힘(身)을 함께 하여서 견뎌내지 않으면 그 인내를 유지하고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인격의 ‘인내(誠)’하는 힘이야말로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시공의 전 영역을 세밀하게 통합하는 정신과 실존과 자유의 힘(敬)에 근거하고, 그래서 그것을 베르댜예프는 ‘신적 보증’이 요청되는 능력이라고 했으며, 퇴계 선생은 먼저 ‘理의 차원으로부터 시작을 말해야 하는(理發而氣隨之)’ 일이라는 보신 것이라 생각한다.(3)

자아주의(egoism)의 위험과 인격, 초인격

여기서 베르댜예프가 어떻게든 인간 인격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가져온 실존이라는 개념이나 퇴계 선생의 理-우선성(理發)의 인간 정신(心) 이해는 그러나 문제가 없지 않다. 이미 앞서서 인격주의가 결코 단순한 ‘개인주의’가 아닌 것을 말했지만 여기서 실존으로서의 인간 이해가 다시 ‘자아(ego)’ 또는 ‘자아주의(egoism)’와 어떻게 관계되는지가 문제가 된다. 베르댜예프는 국민이나 국가, 사회, 제도, 교회 등 공동체적 집단적 현실은 실제적인 가치이긴 하지만, ‘느끼는(情)’ 능력을 담지한 실재(實在)적인 인격이 아니라고 말하며 거기에 인격을 종속시키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인격이 가지는 단독자나 개인, 자아의 측면을 밝힌 것인데, 인격주의는 정신이 창조하는 것은 초인간적이거나 일반적인 관념적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질적 내용을 가진 내러티브의 세계(the universe in personality)라는 것을 밝히는 의미라고 여긴다(같은 책, 37쪽).

하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인격의 개별화는 인격을 자아 중심적인 자기충족과 자아집중, 자기 유폐의 위험 앞에 항상 노출시킨다. 베르댜예프는 이것을 기독교 전통의 언어를 다시 가져와서 인간이 자기에서 떠날 수 없음을 밝히는 ‘원죄(original sin)’라고 지시했다(같은 책, 54쪽). 인격을 ‘하느님의 형상(the image and likeness of God)’으로 밝힌 것과 반정립되는 것을 말한다. 이 자아주의는 인격에 충실한 삶의 실현을 방해하고, 자기편집과 모든 것을 자기에게 관계해서 생각하는 히스테리적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의 의식은 분명 개체적이긴 하지만 거기서 인격은 파괴되고, 이렇게 인격이 자신에게 유폐되어 있을 때 외부와의 소통은 단절되고 결국 질식사하고 마는데, 오늘 우리 시대의 큰 병이다.

베르댜예프는 진정한 인격은 자신에게서 나와서 타인과 세계로 나가는 것을 역설한다. “인격은 공동적이다”, “인격적인 것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라는 언술처럼 ‘공(公)’에 대한 명시와 인격의 개방적 관계성에 대한 강조가 “公이란 인간성, 즉 인격을 체득하는 방법(公者 所以體仁)”이라고 한 퇴계에게서처럼 핵심적 특징으로 자리한다. 그러나 먼저는 그 바깥 세계와의 관계가 특수의 보편에 대한 종속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힘주어 밝힌다. 진정한 인격의 실현은 잘못된 자기 유폐와 같은 동전의 다른 쪽인 객체화와 세계화가 아니라 실존의 심연에서 궁극(하느님)과 타자와의 내면적 실존의 만남임을 명시하고, 그것을 통한 진정한 “자기 초월”을 지시하고 있다. 그렇지 못할 때 인간은 오히려 무인격적 결정론의 예속(in the power of determination)에 빠지고, 오늘 인간의 실존이 각종 객체 세계의 노예 상태에 빠진 것을 밝혀낸다.

“인간은 자기를 초극하고 초월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 인격의 실현은 이 부단한 자기 초월에 있다(같은 책, 37쪽)”라는 언술은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가 어떻게 잘못된 자아주의를 경계하는지를 확인해 준다. 하지만 다시 그 인격주의는 실존적 세계에서 태양을 우주의 중심으로 볼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격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히며(같은 책, 54쪽), 인류 근대 과학적 지동설(地動說)의 단차원적 외재화의 위험을 지적한다. 그래서 참된 인격의 실현과 현실화는 “태양을 자기 속에 가져오는 것”이라고 역설하는데, 나는 이것을 인격주의의 실현을 통해서 근대의 지동설을 넘어서, 다시 중세의 천동설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 참다운 인격 중심의 ‘인동설(人動說)’로 초월해 가는 것임을 밝히는 의미라고 이해한다.

이것이 동아시아 한국에서도 20세기 이후 과거 중국 중심의 《주역周易》을 넘어서 자신이 자리하고 있는 조선의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역을 창안한 《정역正易》으로 표현되었고, 하늘이 바로 내 안에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의 큰 진실을 밝히면서 ‘향아설위(向我設位)’를 급진적으로 주창한 동학(東學) 운동도 바로 이러한 인격의 참다운 자기 초월이 표현된 것이라고 본다. 이들의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정신은 그리하여 조선 성리학의 근대주의를 넘어서는 ‘한국적 근대 이후주의(以後主義)’인 것이고, 서양 근대와 단순 비교하면서 간단히 ‘토착적 근대의식’으로 말할 수 없다고 본다.

마무리 성찰 - 한국적 인학(仁學)과 신학(信學)

청나라 말기의 사상가 담사동(譚嗣同, 1865-1898)은 청일전쟁 등을 겪으며 몰락해 가는 구왕조 중국을 혁신시키기 위해서 가장 전통적인 개념 중의 하나인 ‘仁’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성찰해서 ‘인학(仁學)’을 구성하고자 했다. 1898년 변법 유신운동의 실패로 34살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기 전에 탈고한 그의 『인학 仁學』을 보면 첫 서두에서부터 특히 공자의 핵심사상이던 ‘仁’이란 글자가 두 ‘이(二)’ 자와 사람 ‘인(人)’ 자가 결합한 글자인 것을 지적하면서 그 仁 자와 시작을 말하는 ‘원(元)’ 자나 없음의 ‘무(无)’ 자도 모두 같은 구성의 글자로 서로 같은 의미라고 역설한다. 그 仁의 가장 중요한 뜻이란 (둘이) ‘통(通)한다’라는 뜻으로 서양적 이해로 ‘에테르(以太)’나 ‘전기’, ‘정신적 에너지’와 같은 것이라고 밝힌다.

이렇게 仁과 元, 无의 하나됨을 말하는 그에 따르면, 그리하여 仁한 인간은 ‘시작’을 모르면 안 되고, 인의 유효한 작용은 ‘무(无)’에서 끝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4) 나는 이러한 담사동 인학(仁學)의 기본 정신을 들으면서 그것이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와 매우 잘 상관되고, 이번 본인 사유의 ‘한국적 신학(信學)’의 의미와도 상통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우리 문명의 전환을 인간 정신의 핵을 재성찰함으로써 길을 찾고자 하는 것이고, 전통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종교와 학문, 믿음과 사유, 인문과 과학 등의 관계를 좁히면서 더는 예전의 좁은 신학(神學)이나 종교의 의미가 아닌 ‘통합학문의 방식(Intergral Studies for Faith)’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성의 씨앗인 ‘仁’이 베르댜예프의 인격주의가 주창하는 ‘인격’으로 표현되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仁과 인격을 단지 인간 삶에서의 윤리나 도덕의 차원에만 한정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와 존재 원리(天地生物之心)로 보는 것도 그러하다.(5)

담사동이 元(the Ultimate)이나 无(the Void)라는 개념을 함께 가져와서 그것을 通을 특성으로 하는 有의 언어인 仁과 한 가지로 본 것과 유사하게 베르댜예프의 인격은 보편을 그 안에 포괄하는 특수로서 참으로 인간적이고, 개체적이며, 이 세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이고, 초인격적이며, 신적인 보편을 함께 불이적(不二的)으로 포괄하는 우주(元)와 궁극의 무(无/無極)로도 보았다. 인격의 핵심은 정신의 자유(性/生)이고, 통(通)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그 정신과 자유가 표현되고 길러지는 것은 관계(公)를 통해서이며, 인격을 넘어서는 초인격의 지향 속에서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이 ‘경(敬)’이고, 그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다시 ‘믿음(信)’이 가능해진다는 성찰이다. 전통의 신학처럼 신(神)에 대한 담론을 논하는 것보다 이 ‘인(仁)’과 ‘경(敬)’을 통해서 ‘신(信)’과 ‘성(誠)’을 말하는 ‘신학(信學)’을 주창하는 것이다. 가장 전통적인 개념인 ‘仁’이나 ‘인격’을 새롭게 성찰해서 새로운 종교, 정치, 교육과 문화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유학자 류승국 교수의 갑골문자 연구에 의하면, 그 人이나 仁 자가 원래 고대 세계의 동이족을 지시하는 고유명사였는데, 그것이 나중에 한문 세계에서 인간 일반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한민족의 인간성과 인격이 인간의 보편적 특성으로 지시된 것이다.(6) 이러한 추적은 한민족 古역사의 기록에 왜 당시 사람들이 仁과 孝를 중시했다는 기록(一心存仁孝)이 지속해서 나오고,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을 항상 행했으며(元), 그 가운데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의례는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祭天之儀 以人爲本)”(7)는 가르침이 강조되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한민족 사람들은 근본을 중시하고, 중국에 의해서 ‘군자국’으로 불릴 정도로 인간적인 것을 강조했고, 서로 논의를 통해서 국사를 운영하는 담화의 정치를 꾀했으며(화백회의), 서로 화합하고 용서하는 것을 중시하며(소도), 사형제도를 없앴다는 이야기는 오늘 우리 시대와 지금의 상황을 많이 돌아보게 하며, 한국 사회가 다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밝혀준다.

14세 단군조선 시대(B.C. 1721년) 시대를 기록한 고기(古記)에 “하늘이 마음에 두는 것은 사람이다(天所心者人也)”라는 말이 나오고,(8) B.C. 1552년경의 제17세 단군조선의 시대에 관한 서술로서 “죄과를 책망할 때는 믿음으로 하고, 경계를 관리할 때는 은혜로웠다(責禍以信, 管境以恩)”라는 말이 나온다.(9) 나는 이러한 기록들이 바로 한국적 ‘인학(仁學)’과 ‘신학(信學)’을 구성하기 위한 좋은 근거가 된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의 잘못과 죄과를 책망할 때 그 사람도 인격이라는 잊지 않는 인간에 대해 믿음을 기본으로 하고, 그래서 사형제도를 멀리했는데, 왜냐하면 인격으로서의 그의 삶은 언제든 다시 변할 수 있고, 다시 행위 하고 시작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의 말을 ‘인간(人) 말(言)’로서 믿는 일(信)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겠다.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정해야 할 때는 나의 실존은 그의 존재로 인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고, 또한 자아 유폐야말로 인격의 죽음인 것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내가 더 양보하고 함께 나누는 ‘은의(恩義)’의 방식을 강조한 것이다. 즉 이렇게 선택하고 행위할 수 있는 우리 자신 속의 초인격의 실재와 가능성을 믿는 일이야말로 참된 믿음이고, 신앙이며, 종교임을 가르치는 언어라는 것이다. 오늘 왜 우리가 다시 ‘인격’을 말해야 하고 우리의 ‘仁學’과 ‘信學’을 구성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근거이겠다.

미주

(미주 1) 이은선, “어떻게 행위하고 희락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를 수 있을 것인가?-양명과 퇴계 그리고 루돌프 슈타이너”, 『생물권 정치학 시대에서의 정치와 교육-한나 아렌트와 유교와의 대화 속에서』, 모시는사람들, 2015, 286쪽.
(미주 2) 이황 지음·이광호 옮김, 『퇴계집-사람됨의 학문을 세우다』, 한국고전번역원, 2017, 177쪽.
(미주 3) 이황 퇴계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미주 4) 담사동, 『인학仁學』, 임형석 옮김, 산지니, 2016, 11, 21쪽.
(미주 5) 이은선, “한국 천지생물지심(天地生物之心)의 영성과 기독교 영성의 미래”,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2016, 175쪽 이하.
(미주 6) 류승국, “한국사상의 본질과 평화의 이념”, 『한국사상의 연원과 역사적 전망』, 유교문화연구소, 2008, 507쪽 이하.
(미주 7) 이기동·정창건 역주, 《환단고기》 「단군세기」, 6세檀君達文 재위 36년(B.C. 2083), 도서출판 행촌, 127쪽.
(미주 8) 같은 책, 146쪽.
(미주 9) 같은 책, 153쪽.

이은선 명예교수(세종대, 한국信연구소)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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