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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모를 공경하라채수일 목사와 함께 하는 주제로 읽는 성경 ⑽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 승인 2021.03.2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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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유교와 가부장적 전통, 농경사회를 유지해 온 우리나라에서 부모공경은 낯선 계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핵가족을 넘어 일인가족시대가 되었습니다. 함께 살면서 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집값이 하늘까지 치솟는 대도시에서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모시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부모들도 자녀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누워계신 부모님 수발 들면서 직장생활을 하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노인복지시설도 많아져서, 이제는 부모공경의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가끔 들려오는 충격적인 뉴스,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거나, 심지어 죽이는 존속살해 사건들, 또는 그 반대로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거나 살해하는 비속살해 사건 소식이 들려오면, 우리는 이 시대에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삼스럽게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2006년 1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존속살해사건은 381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같은 기간 전체 살인 사건의 5%로 미국(2%)과 영국(1.5%) 등의 3-4배 수준입니다. 살해를 포함한 폭행, 감금, 협박 등 이른바 존속범죄는 2013년 1,141건이었는데, 매해 늘어 2016년에는 2배(2,235건)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죽이는 비속살해도 해마다 30-40건 씩 발생하여,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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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인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계명은 오늘 우리 시대에,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요?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정한 4개의 계명이 끝나고, 시작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첫 번째 계명이자,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 받은 땅에서의 장수(출 20,12), 신명기에서는 장수와 함께 복(신 5,16)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독일의 구약학자 프랑크 크뤼제만은 그의 십계명 해설서인 ‘자유의 보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이 제일 앞에 놓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 이 계명이 가장 앞에 놓인 것은 이것이 구약의 윤리적 지침들 중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에도 상응한다.

이 계명이 인간 사이에서 지켜져야 할 계명 가운데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그 빈도수만이 아니라, 그 중요성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 계명이 하나님 공경 다음에 나오는 이유도 하나님 다음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법전들도,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규정하여, 부모 홀대를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 다뤘습니다(출 21,17; 레 20,9). 그 외에도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권면하는 말씀들이 있는데, 잠언은 “부모를 저주하는 자식은 암흑 속에 있을 때에 등불이 꺼지고”(잠 20,20), “아버지를 조롱하며 어머니를 멸시하여, 순종하지 않은 사람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새끼 독수리에게 먹힐 것이다”(잠 30,17)고 경고합니다.

성경을 사회사적으로 연구하는 프랑크 크뤼제만은 이 계명이 중요한 것은 부모의 ‘노후봉양의 문제’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노인들의 노후대책은 가정 밖에서는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노인들, 특히 병자들과 약자들은 오로지 젊은 자녀들의 봉양에만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후봉양은 단순히 정신적, 영적인 의미를 지닐 뿐 아니라, 구체적인 물질적 봉양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계명은 고령에 들어선 부모를 열악하고 경멸적인 대우나 심지어는 구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의도도 반영되어 있었습니다(출 21,15; 자기 부모를 때린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 이 계명의 수신인은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이들이 아니라, 성인이 된, 이미 결혼했고 집과 농토를 가지고 있는 성인들입니다. 자녀들은 노년의 부모에게 죽을 때까지 음식, 옷, 거주지 등 적절한 봉양을 할 것은 물론이고 마지막으로 장례를 치루는 것까지 담당해야 했습니다.

부모공경 계명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땅을 경작할 수 없거나, 부여받은 자유와 땅을 더 이상 스스로 지킬 수 없는 노인들의 신분에 상응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보장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노인이 된 부모는 이제 그들의 자유와 삶을 그들의 자녀들의 행동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명은 세대의 고리를 통해 그 자유를 가장 힘없는 일원에게도 전달할 것을 규정하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계명이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의존성과 관계성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날 수도, 성장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의존성과 관계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배꼽입니다. 인간이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배꼽을 통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태어났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의존성과 관계성을 가장 구체적이고 극적으로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배꼽으로 연결된 어머니의 자궁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생명이 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선물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지요. 배꼽은 우리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생명이 선물임을 가르쳐 줍니다.

▲ 부모 공경은 복종이 아니라 하나님 섬김 안에서 일어난 것이다. ⓒGetty Image

< 3 >

16세기 유럽의 교회개혁자인 칼뱅도 1555년 6월 26일에 신명기 5장 16절의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칼뱅은 그 설교에서 제5 계명이 단순히 부모에 대한 공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고, 마틴 루터도 그의 ‘대요리문답’에서 ‘하나님은 부모를 이 땅에서 자신의 대리자로 삼으셨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부모공경을 통해 자연스럽게 권위에 대한 복종과 겸손을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 공경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본래 자만의 죄에 사로잡혀 있어서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해지가 어려운데, 하나님은 부모를 둠으로써 인간이 자만을 극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칼뱅은 부모 공경은 공경 받는 부모보다, 공경하는 자식에게 더 큰 유익이 된다고 주장했고, 그 유익함은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도록 산다.’는 것입니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고 추구하고 희생하며 헌신적으로 보살핀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존을 위해 다른 이에게 의지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는 부모를 통해 어렴풋이나마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처럼,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부모가 나이가 들면 놀라운 역할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았던 우리가 거꾸로 그들을 보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유아기 시절 우리 기저귀를 갈아 주셨던 부모의 뒤처리를 이제 우리가 해드리게 되는 것이지요.

< 4 >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는 모리 교수가 루게릭병에 걸려 죽어갑니다. 졸업하면 교수님을 찾아뵙겠다고 약속했지만, 살아가는 것이 너무 바빠 16년 만에 찾아온 제자 미치가 죽어가는 모리 교수와 함께 매주 화요일마다 나눈 대화이지요. 자존심 강한 모리 교수가 루게릭병 때문에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은 자기 아랫도리를 남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엄마 배속에서 세상에 처음 나와서도 아랫도리를 남에게 맡겼는데, 세상을 떠날 때 다른 사람에게 내 아랫도리를 맡기는 것이 뭐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냐는 생각에 자신을 용납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 아랫도리를 깨끗하게 치워주시던 부모님의 뒤처리를 하는 것은 그러므로 최소한의 은혜 갚기이지요. 저의 아버님도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중풍으로 쓰러지셨습니다. 제가 뒤처리를 하려고 하면 아버지는 굳이 말리면서 어머니를 부르셨지만, 목욕탕에 모시고 가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의 마른 등을 밀어드릴 때,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뿌듯한 기쁨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어릴 적 나를 이렇게 씻어주시던 부모님을 이제 내가 씻어드린다는 뿌듯함이지요. 아마 여러분도 같은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것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일방적으로 자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엡 6,1-4). 여기서 “주 안에서”라는 단서가 복종의 목적과 한계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부모공경을 포함한 모든 권위에 대한 공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 공경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바울은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의무도 규정합니다: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엡 6,4). 일방적인 공경의 강요는 자녀를 노엽게 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기준을 강요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라는 것이지요. 주님의 훈련과 훈계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기른다는 것이 방임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 5 >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은 그의 ‘예언자’에서 “자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대의 아이는 그대의 아이가 아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갈망하는 큰 생명의 아들딸이니
그들은 그대를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또 그들이 그대와 함께 있을 지라도 그대의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는 아이에게 사랑을 줄 수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생각이 있으므로.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는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 조차 갈수 없는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
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말라.”

그렇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사랑을 주어야 하고, 부모는 자녀에게 육신의 집은 줄 수 있지만 영혼의 집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리고 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 때문에 마땅히 공경해야 하지만,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딸린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명령이기에 지키거나,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 사는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모가 조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보고 자라는 손자들이 어떻게 자기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모의 자녀 사랑은 자녀를 미래의 땅에서 오래 살게 할 것이고, 자녀의 부모공경은 부모를 현재의 땅에서 오래 살게 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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