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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삼하 6:12-19; 히 12:18-24; 막 11:1-10)종려주일(3월28일) 제주 4·3기념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3.26 16:14

1. 호산나,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

▲ 유채꽃 만발한 제주와 억울하게 희생당한 양민들

오늘은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자, 제주 4·3희생자 추념일입니다. 지금 제주에 유채꽃이 만발할 텐데, 그 꽃들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밑에 제주 4·3 당시 죽어간 많은 영혼의 울부짖음이 감춰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당시 죽어간 제주의 고통 받았던 영혼들이 지금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왜 종려주일이라고 했을까요? 성경에서 종려나무는 ‘의(義)’와 ‘아름다움’, 그리고 ‘승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려주일 날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

▲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러자 많은 사람이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여기 ‘호산나(ὡσαννὰ)’라는 말은 히브리어 ‘호쉬아나(הושיעה־נא)’의 헬라어 음역입니다. ‘호쉬아’는 예슈아, 여호수아와 같은 어근으로 ‘구원’이라는 뜻이고, ‘나’는 지금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호쉬아나는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Save me, Now)를 뜻합니다. 종려주일을 ‘호산나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기원후 385년경 에게리아라는 여성이 쓴 예루살렘 성지 순례기인 『에게리아의 순례기』(분도출판사, 2019)에 처음 나오는데, 당시 동로마 교회에 속했던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축하의 의미로 ‘종려 행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마 교회들은 축하 분위기 대신 애도의 성격을 띠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후 6세기경에는 동로마 교회의 종려주일 풍습이 서로마 교회에도 전해졌습니다.

당시 종려주일이 되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다음, 가까이 있는 다른 교회로 걸어가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종려주일이 되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습니다.

특별히 종려주일 때에는 ‘축성 의식’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축성(祝聖)’이란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별 의식(출 40:9-15)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중세 교회는 종려주일에 사용하는 종려나무 가지에 축성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렇게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을 추방하거나 질병을 치유하고 재앙을 막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군중들이 이렇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으로 거행했지만, 단 5일 만에 돌아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려주일 이후는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되는 고난주간이 이어집니다. ‘수난주간(受難週間)’으로도 불리는 고난주간(苦難週間, passion week)은 잘 아시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절기로, 종려주일 다음 날부터 예수님의 부활 직전까지 한 주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건하게 보냈습니다. 특히 최후의 만찬과 세족식을 기념하는 ‘세족목요일(洗足木曜日)’과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요일(聖金曜日, Good Friday)’은 더욱 경건하게 보냈습니다. 이때는 오락을 금하고 금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는 종교개혁을 통해 고난주간에 행해지던 로마 가톨릭 의식들을 대부분 폐지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U. Zwingli)의 영향 아래, 부분적으로 고난주간 의식들이 회복됐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교파에 따라 다양하게 고난주간 의식들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가령,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나 성금요일 저녁 예배 등을 열어 경건하게 보내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종려주일 말씀이지만, 우리가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예루살렘 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을까?”, “예루살렘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의미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일까?” 등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복음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평면적으로 보여주지만, 구약의 말씀은 다윗 시대에 법궤가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을 통해 예루살렘의 원래 의미를 들여 줍니다. 그리고 서신서인 히브리서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성으로까지 격상됩니다.

2.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복음서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셨을 때의 상황입니다.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경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막 11:1-3)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합니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막 11:4-7)

이렇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이 환영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8-10)

물론 이 장면을 ‘로마 군대의 화려하고 강력한 예루살렘 입성’과 비교하여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강한 군대의 행렬이 아니라, 초라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 무리를 통해 다윗의 나라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유대 민족의 혁명 정신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기원전 164년경 유다 마카비(Maccabee, ‘쇠망치’라는 뜻)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기원전 175-164)를 몰아내고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했을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마카비를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낸 메시아로 추앙하였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마카비를 향해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마카비가 세운 정통 유대왕국인 하스몬 왕조(Hasmonean Dynasty)는 기원전 142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79년 동안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유대인들의 마지막 독립 왕조입니다. 안타깝게도 형제간 왕위 다툼으로 외세인 로마를 끌어들여 결국 기원전 63년 로마에 의해 점령당한 이후,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유대인들은 독립 국가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아마도 당시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을 탈환했던 마카비로 보았고, 예수께서 세우실 나라가 하스몬 왕조, 나아가 다윗 왕조의 부활로 보았던 것입니다.

▲ 하스몬 왕조의 영토와 루벤스의 <유다 마카비의 승리>, 붉은 망토를 두른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순간을 묘사하고 있음

그러나 구약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예루살렘 자체의 상징성과 또 그것을 해석하는 히브리서의 지평에서 말씀을 보게 되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의미가 새롭게 드러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세 본문 말씀의 매력입니다. 신약의 말씀이 구약의 맥락과 서신서의 지평에서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 말씀을 먼저 살펴볼까요?

3.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예루살렘 성)으로

오늘 구약 본문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 내용입니다. 처음에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다가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소들이 뛰어 웃사가 급히 흔들리는 수레 위 법궤를 만집니다(삼하 6:3-7). 민수기 말씀에 보면, 법궤는 절대 만져서는 안 되고 운반할 때는 레위 지파인 고핫 자손이 어깨에 메서 옮겨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수레에 실어 옮겨서도 안 됩니다(민 4:15).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웃사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죽게 됩니다.

▲ 1차 법궤 운반 때 웃사의 죽음과 2차 운반 당시 다윗의 춤

이로 인해 1차 법궤 운반 작업이 중단이 되었습니다(삼하 6:1-8). 이후 법궤는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오벧에돔의 소문을 듣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삼하 6:11a).”

따라서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삼하 6:12)”가게 됩니다. 그때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춤을 추고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워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백성들이 즐거워하듯이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온 백성이 기뻐한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삼하 6:13-15)

말씀에 보면 6보 1배 하죠? 사실 3보 1배도 힘든데, 말씀대로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자, 다윗이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춥니다. 그러나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부인인 미갈이 이를 보고 다윗을 업신여깁니다. “여호와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삼하 6:16).” 물론 이 말씀은 사울보다는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라, 오늘 본문의 맥락에서는 가볍게 넘어가야 할 듯합니다. 아무튼 법궤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자, 온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잔치를 벌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떡 한 덩이씩 나누어 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하 6:17-19)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모든 백성이 즐거워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무엇인가요?

4. 예루살렘,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모든 것이기도 한!

단테의 『신곡』 (神曲, La Divina Commedia, 1308-1321)을 보면, 지옥에 하나의 특별구역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아 천국에는 갈 수 없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으며 사는 곳입니다. 가령,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 예수님 탄생 이전의 인물들이 그곳에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복음이 전래 되기 전 인물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단테의 말은 이렇습니다. “아마 지옥에서 가장 적은 벌을 받게 될 이교도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살라딘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리스 사람으로 위대한 철인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살라딘(Saladin, 1138-1193)은 처음 들어 보셨을 겁니다. 살라딘은 이슬람의 술탄(통치자, 군주)으로 수니파 이슬람 왕조인 아이유브(Ayyub) 왕조를 창건한 가장 유명한 이슬람의 영웅입니다. 그의 통치 지역은 이집트·시리아·예멘·팔레스타인 등입니다. 아무튼 살라딘이 살던 시대에는 십자군 전쟁 중이었습니다. 1096년부터 1291년까지 200년 동안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1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1098년에 십자군의 통솔자 보에몽 1세(Bohemond I, 1058-1111)는 시리아 북서쪽의 ‘마하라트 알 누만’을 정복하고,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저지릅니다. 가령 산채로 사람을 집어다가 불구덩이로 던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도시 안에서만 2만 2천 명을 학살하며 인종청소를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슬람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이슬람 사람을 잡아먹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 사람들은 십자군에 대해 극도의 반감을 품게 됩니다.

살라딘 당시 아랍 지역은 한정된 자원인 오아시스를 차지하기 위해 매일 같이 약육강식의 혈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무함마드의 ‘혈통을 따르는’ 시아파(Sia, 분파)와 무함마드의 ‘가르침(Sunnah)을 따르는 사람들’인 수니파의 분쟁도 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도 기독교인들에게 빼앗겨 버렸죠. 이렇게 내외부적으로 전쟁의 바람이 그치질 않을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소수민족 쿠르드(Kurd)족 출신인 살라딘입니다. 쿠르드족은 오늘날까지 단일 민족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가장 큰 종족입니다. 3,0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대부분 수니파입니다.

아무튼 당시 기독교인들은 살라딘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살라딘의 권력이 커갈수록 우리들의 두려움도 커진다. 그는 통찰력과 용기를 가진 인물이며 영토는 금방 두 배로 늘어났다. 우리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원수들에게조차 존경을 받은 위대한 군주가 바로 살라딘입니다. 놀라운 것은 역사는 그를 ‘문명의 화해자’라고 부릅니다.

▲ 영화 <킹덤 오브 헤븐> 포스터와 살라딘의 모습

사실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사람인 살라딘이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 제국을 통치하려면 명분이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점령한 십자군을 공격하고자, “이슬람이여, 단합하자!”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입성합니다.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안전하게 기독교권(유럽)으로 보내주겠네. 남녀노소 백성 전부와 기사들, 병사들, 여왕까지도, 맹세코 안전을 보장하겠네.” 당시 십자군의 책임자였던 발리안(Balian, 1140-1193)은 이렇게 묻습니다. “십자군은 입성 때, 이슬람을 학살했소.” 살라딘의 말입니다. “난 그들과 달라. 난 살라딘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 2005)은 마지막 장면에 살라딘과 발리안의 만남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역사상 중세문화 고증을 가장 완벽에 가깝게 실현한 영화’라고 평가를 받습니다. 영화에서 발리안은 협상을 타결한 후, 이렇게 묻습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죠?” 살라딘은 뒤로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걸어가며 대답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지.” 어이없어하는 발리안에게 살라딘은 뒤돌아 천천히 두 주먹을 가슴에 올려 쥐고, 미소 지으며 말합니다. “모든 것이기도 하고”

5.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인 예루살렘! 무슨 말일까요? 오늘 히브리서가 예루살렘의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히브리서 본문 말씀은 조금 어렵습니다. 따라서 공동번역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갔던 그 시나이산은 아닙니다. 그 산은 손으로 만져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검은 구름과 암흑에 싸인 채 폭풍이 일고, 나팔 소리가 울리고 굉장한 음성이 들려오는 산이었습니다. 그때 그 음성을 들은 사람들은 하느님께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시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비록 짐승이라도 이 산에 닿기만 하면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하신 하느님의 명령이 견딜 수 없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사실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까지도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떨린다.’하고 말할 지경이었습니다.”(히 12:18-21)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 산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이어서 시온산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와 있는 곳은 시온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하늘의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는 수 많은 천사들이 있고, 잔치가 벌어져 있고 또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가 있고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이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가 계시고, 아벨의 피 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히 12:22-24)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성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수많은 천사와 잔치, 장자들의 교회와 심판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과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께서 계신 곳입니다. 무엇보다 아벨의 피 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속죄의 피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천국 잔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장소로서 예루살렘 성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이러한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성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지상의 예루살렘 성이 천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이것은 지상의 교회가 곧 하늘에 등록된 장자들의 교회로 연결이 되는 것이고, 지상에서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이들이 천상의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의 영혼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 계신 하나님의 도성으로, 예수께서 종려주일 날 예루살렘 입성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하늘 성전으로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참여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종려주일을 기념하며 장차 올 하늘 성전을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13:14)” 그리고 장차 올 새 예루살렘 성은 요한계시록에 잘 나와 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계 21:10)”

이렇게 다가올 미래의 성전은 인간의 손으로 건축한 성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며,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성전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영원한 하늘 성전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계 21:7b)”라는 언약이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의 온전한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종려주일 날 의와 아름다움, 승리를 위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뒤따라가야 할 영원한 성 예루살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서 하늘의 성전인 예루살렘 성에 참여하며, 기다립니다. 인간이 세운 건물은 완전한 성전이 아닙니다. 온전한 하늘 성전을 기다리며 완전히 올바른 사람들이 되기 위해 오늘도 예배로, 또 축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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