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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그리스도인의 삶개혁교회, 무엇이 다른가? ⑷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3.27 16:20
▲ 개혁교회는 신앙과 구원을 성령론 안에 위치시키고 있고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강조한다. ⓒGetty Image

신앙에 앞선 성령의 강조

칼빈이 “율법 하에서 저주를 받은 인간은 단지 신앙을 제외하고는 구원을 얻을 아무런 수단도 남아 있지 않다”(Inst.,Ⅲ.xi.1)라고 말할 때, 루터와 의견이 일치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신앙의 논리에서 칼빈과 루터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없다: 신앙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며, 하나님의 행위인 동시에 신자의 행위이기도 하다.

그러나 칼빈에게 신앙은 루터에게서처럼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루터는 신앙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신앙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신앙과 분리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자신의 의, 영광, 부요함 등을 상실한다.” “만일 그가 여러분의 아버지, 재판관, 하나님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그의 실제 모습이다.” “신앙은 하나님 자신이 전능하신 것처럼 전능하다.”(1) 우리는 이 “신앙을 통하여” 의롭다는 여김을 받는다.

바르트는 신앙에 대한 루터의 이런 진술들에서 신앙이 마치 ‘위격적인 것’(hypostatic)처럼 간주되고 있음을 본다. 루터에게 신앙은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세상 사이를 마치 알렉산드라아적 로고스처럼 움직이는 신화적인 매개물 같은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2)

칼빈은 신앙을 성령론 속에서 다룬다. 이것은 성령을 먼저 말하지 않고는 신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선적인 측면’, ‘앞선 것’에 대한 강조가 또한 여기에 나타난다. 칼빈의 유명한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하는 지식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새겨진 것이다”(Inst.,Ⅲ.ii.7).

칼빈의 칭의론의 내용은 루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칼빈도 칭의론이 죄된 인간의 구원의 토대가 되고 참된 경건을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칼빈에게서 신앙은 결코 칭의론의 중심이 아니다. 칼빈은 말한다:

신앙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게 한다면, 신앙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게 여기는 일을 부분적으로 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할 것이다(Inst.,Ⅲ.xi.7).

칼빈에 의하면 우리의 의의 근거는 근본적으로 ‘신앙’이 아니라 ‘객관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 있고, 신앙의 주체는 ‘나’의 종교적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다. 성령이 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을 일으키는 일이며,(3) 우리는 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유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Inst.,Ⅲ.i.1-4). 그러므로 칼빈은 칭의론을 그리스도론 속에서 또는 그리스도론과 함께 취급하지 않고 성령론 속에서, 성령의 역사로서 취급한다.

그러므로 “오직 신앙만”이라는 구호는, 그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실과 성령의 역사가 언급되지 않는다면, ‘신앙’ 그 자체는 의의 조건이 되고 인간의 능력으로서의 신앙이 성령과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앙은 가장 불확실한 근거 위에 있게 된다. 이러한 탈선이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미신적인 업적 중심의 경건성을 낳았고,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신앙의 인간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20세기에는 무서운 나치의 유혹 앞에서 유일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에 항거하는 “독일적 그리스도인의 신앙운동”과 같은 반역을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사실을 떠나서 ‘오직 신앙만’을 기독교 경험으로 따로 떼어 강조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4)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희망의 근거는 우리자신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발견되며, 구원의 확실성은 우리자신의 계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십자가의 은혜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윤리에 대한 강조

개혁교회 신앙고백들의 중심에는 개혁교회적 사고의 능동적이고 윤리적인 추진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칼빈의 영향에 의한 것인데, 그는 “헛된 사변”과 신학의 공허한 철학화를 싫어하고(Inst.,Ⅰ.ii.2) 언제나 “건전하고 결실을 맺는”, “유용하고”, “유익한” 교리에 관심을 가졌다(Inst.,Ⅰ.ii.2; v.9; xiii.20). 그가 그의 반대자들과 달리 삼위일체론을 대체로 간략하게 논한 것도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자신의 방법론을 정당화한다:

나는 교회의 건덕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Inst.,Ⅰ.xiii.29).

이러한 칼빈의 정신은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문서들에 그대로 반영되고, 개혁교회 신학의 독특한 특징이 되었다. 칼빈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는 개혁교회의 교리적 입장을 정의한 다음에, 이 진리를 믿을 때 어떤 “유익” 혹은 “혜택”이 있는가를 질문한다(문답 28, 32, 36, 43 등). 더욱이 이 신앙문답은 문답 1에서 이미 “윤리학의 싹을 담고”(5) 있다. 문답 1은 다음과 같다: 

살든지 죽든지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육체와 영혼을 갖고 있는 나는 살든지 죽든지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피 값으로 나의 모든 죄를 속죄하셨고, 악마의 모든 지배로부터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진실로 이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목적에 부합됨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에 의해서 그는 또한 영생을 나에게 보장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전심전력으로 기꺼이 그를 위해서 살게 하십니다.(6)

이런 의미에서 개혁교회의 ‘성서원리’는 또한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서도 해결의 열쇠가 된다. “개혁자들은 그 원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에게 할당된 자리와 과제를 언급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7) 인간이 물가에 심어진 나무라면, 그가 자기의 계절에 따라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이유에서 개혁자들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로마서를 권했지만,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바울의 신앙에 의한 칭의의 교리(롬 3:27)와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약 2:26)는 야고보의 경고 사이에서 어떠한 혼란을 겪지 않은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는 동시에, “이 믿음은 … 반드시 우리 안에서 모든 선한 일을 낳게 한다”고 천명한다.(8) ‘신행일치’에 대한 개혁교회의 이 같은 강조가 루터교회의 교리와 다르다는 것은 “공허하고 나태한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고 활발한 믿음”이 문제된다고 말하는 『제2 헬베틱 신앙고백서』(1566)와 신앙과 선한 행위는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 또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에 대해 힘겨운 토론을 벌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비교하는 것만으로 분명해진다. 이후 이 같은 신앙과 행위, 교리와 윤리의 아름다운 결합은 개혁교회 신앙고백서들에서 전형적인 것이 되었다.(9)

물론, 도덕과 윤리에 대한 강조는 자칫 바리새파적 업적주의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개혁자들은 이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선한 행위의 원인이 성령이라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들”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칭의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 선행들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들로 받아들여지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1560)는 “선한 행위의 원인이 우리의 자유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영에 있다”고 고백한다.(10)

그러므로 개혁교회에서 윤리는 루터교에서처럼 신앙이 아니라 은혜 위에 확립되고,(11)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감사의 근거가 되며, 일종의 메아리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감사를 발하게 한다. 십계명을 제3부 “감사의 생활”에서 다루는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서』의 구조는 개혁교회의 윤리가 “감사의 윤리”라는 것을 매우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개혁자들의 “오직 은혜로만”이 인간의 모든 ‘업적’(인간들의 노동과 성취)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인간의 책임적인 행위들을 활성화시켜준다는 것을 말해준다.(12)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개혁교회적 강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다시 말하면, 윤리에 대한 개혁교회적 강조의 비밀은 무엇인가? 그 비밀은 바로 하나님의 선택이다. 개혁교회 신학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선택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지고, 선택은 또한 교회론의 기초를 이룬다. 칼빈이 어떻게 선택을 성화와 교회의 교리에 연결시키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택에 관하여 칼빈은 바울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세상 창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해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엡 1:4). 칼빈은 이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이 우리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게”하여, “오로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찬양을 받게 하시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Inst., Ⅲ.xxii.3). 바로 여기에 개혁교회적 행동이 지닌 동력의 비밀이 있다.

미주

(미주 1) Ruther’s Works, ed. Jaroslav Pelikan, vol.13, Muhlenberg Press, 1958, 7,  A. McKelway, “The Logic of Faith”, D. Willis and M. Wwlker(editors), Toward the Future of Reformed Theology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9), 208에서 재인용.
(미주 2) K. Barth, Die Theologie der reformierten Bekenntnisschriften, 1923, tr. by D. Guder and J. J. Guder, The Theology of the Reformed Confessions (Westminster/John Knox Press, 2002), 98.(이하, TRB)
(미주 3)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이것을 정확히 거꾸로 표현한다: “성령은 신앙을 통하여 받는다.” 이장식 편역, 『기독교 신조사』제1집 (서울: 컨콜디아사, 1993),  45.
(미주 4) 박봉랑, 『신학의 해방』 (대한기독교서회, 1991), 340.
(미주 5) W. Niesel, The Gospel and the Churches, 194; J. Hesselink, 「개혁주의 전통」, 159에서 재인용.
(미주 6) 박근원·김경재·박종화 편집·감수, 『장로교 신조 모음』 (서울: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2003), 207.
(미주 7) K. Barth, “The Doctrinal Task of the Reformed Churches”,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eter Smith Publisher, 1978), 266 이하.
(미주 8) 『장로교 신조 모음』, 162-63.
(미주 9) 『장로교 신조 모음』, 303-309, 이장식, 『기독교 신조사』 제1집, 43-45를 참고.
(미주 10) 『장로교 신조 모음』, 163 이하, 187.
(미주 11) TRB, 101.
(미주 12) J. M. Lochman, 김원배·정미현 편역, 『살아 있는 유산』 (서울: 기장신학연구소, 1997),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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