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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토(嘔吐)엔-보스-바하(En Voz Baja)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03.31 16:27
▲ Herbert Gustave Schmalz, 「The Morning od Resurrection」 ⓒGetty Image

4월, 부활의 계절이다. 기독인들에게 부활만큼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는 사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부활이 없는 예수와 기독교는 상상할 수 없다. 예수의 부활을 전제하지 않는 고난과 희생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만큼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부활을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금년도 부활의 계절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국면의 혼돈과 격변의 시대를 경험하면서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부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기보다는 실망과 포기의 마음이 앞서는 답답함을 금할 수 없는 환경이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오늘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부활의 신앙을 단순히 교리정도로 알아서 혹시 이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이단’ 소리를 들을까 혹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서 떨어져 나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고백하는 것은 아닐까? 진정 우리에게 부활은 확실한 것으로 다가오고 있고 또 절실한 필요성으로 오고 있는 것일까? 오늘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부활의 신앙도 인간의 죽어야만 하는 운명과 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온 현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부활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만의 유일한 것이 아니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기독교가 발생하기 이미 오래전에 고대근동지방의 신비종교와 밀교에서 널리 유행하였던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부활사상을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불교의 윤회설도 어쩌면 부활의 사상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현생의 삶속에서 이루지 못한 일, 즉 업보들을 다음 삶에서 이루어 나가거나 혹은 갚아 간다. 한 평생의 삶이 한계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업보를 남기게 되고 다음의 생에서 한계를 극복해 나간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부활은 전체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죽어야만 하는 인간,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인 한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인간은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인간은 공포를 갖는다. 그리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그리고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부활에 대한 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측면과 연관이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측면에서 이해하는 부활의 모습이  기독교의 부활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만 믿고 있다. 부활에 대한 성경구절과 언급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우가 장례식이라는 사실은 이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렇게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이 예수의 부활이 주는 의미일까?

부활이 단순한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발생하는 현재적인 일이라고 한다면 오늘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제자들을 비롯한 예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의 초자연적인 이적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자연을 마음대로 다스리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수의 사역의 근본적인 의미를  따지기 보다는 예수가 행하는 초자연적인 이적에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당시의 사람들에게서만 발견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신앙인들에게도 이런 이적만을 바라는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이렇듯 초자연적인 이적만을 바라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예언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과 함께 예수는 계속해서 “요나가 사흘 낮과 밤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같이 인자도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을 땅 속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마태 12장 38-39)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요나의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예수의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감과 다시 토해져 나옴과 같은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나의 기적의 의미는 예수의 부활의 이적의 의미와 연결된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난다는 소생의 의미가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이 표적을 구할 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요나의 이적, 새로운 생명을 향한 부활의 이적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한다. 부활은 단순히 인간의 한계성을 극복하려는 믿음과 추구의 결론이라고만 볼 수 없다. 부활은 인간의 한계극복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세계를 향한 옛 삶과의 단절이라는 의미에서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부활은 한계 극복보다는 적극적인 의미에서 해방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이다.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우리는 좌절하기 쉽지만 부활의 소망 속에서 다시 한 번 용기를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최대의 문제인 죽음을 이겼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해방의 기쁨의 의미를 주고 있다. 우리를 억매고 있는 죄악의 쇠사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보다 근원적인 의미가 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를 억매고 있는 모든 불의의 사슬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이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의 죄악(불의)을 극복하는 사건이다.

예수는 당시의 사회의 불의와 죄악을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이겼다. 예수는 부활을 통하여 더 이상 죄와 불의가 인간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보여 주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 15:54-55)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부활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순간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의 삶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기만 하면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좋은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런 사람에게 부활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여 결국에는 더 좋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마치 면죄부와 같은 것이 아니다. 부활은 우리에게 하늘의 문을 열어 주는 표가 아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은 요나의 기적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이다.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토해 냄을 당한 것처럼 우리의 옛 시대로부터 토해냄을 당하는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켰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를 회개 시키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다. “주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니, 물고기가 요나를 물에다가 토해냈다.”(요나 2:10) 부활의 계절에 계속해서 토해짐을 당하는 부활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부활은 토해짐이다.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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