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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종교중독을 부추기는가중독을 넘어 참 자유로
이도영 객원기자 | 승인 2021.04.0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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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심리조작의 비밀』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일반 책들이 잘 다루지 않는 테러리스트,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불법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 등을 다룬 책이다. 이 책에는 심리조작을 하는 사람의 특징과 심리조작을 당하는 사람의 특징이 나온다.

심리조작을 하는 사람들은 타인을 지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패쇄적인 집단에서 가장 강한 위치에 서 있다. 이들은 삐뚤어진 자기애가 만들어 낸 환상 속에서 살기 때문에 과대 자기를 팽창시켜 전능감으로 무장하고 타인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 이들은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감능력이 없고 약자에 대한 배려나 윤리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들은 사람을 지배하는 행위를 통해 쾌락을 얻는다.

심리조작을 당하는 사람들은 주로 네 부류의 사람들이다. 첫째, 의존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인데 자기를 과소평가하고 타인에게 의지한다. 둘째, 피암시성이 있는 사람인데 수동적이며 무비판적으로 모든 정보를 수용한다. 셋째, 불균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인데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내면이 항상 불안정하다. 넷째, 스트레스와 고립감이 있는 사람이다. 책의 저자는 심리조작을 당하는 사람이 지닌 최대 특징이 ‘의존성’이라고 말한다. 정말 재미있었던 것은 심리조작을 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 모두 중독적인 특징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중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마약 등에 중독되는 ‘물질중독’이고 다른 하나는 스마트폰, 쇼핑, 도박, 섹스, 폭력, 돈, 일 등 ‘행위중독’이라고도 부르는 ‘과정중독’이다. 과정중독 중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는 ‘자기애 중독’과 ‘관계중독’이다. 전자는 현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기도 한 ‘나르시시즘’을 의미하며, 후자는 ‘공의존’이나 ‘공동의존’이라고도 부르는 ‘동반의존’이다.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고 동반의존은 타인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심리조작을 하는 사람과 심리조작을 당하는 사람은 각각 이 두 가지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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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르시시즘의 심리학』에 의하면 첫째, 현실을 왜곡하는 마법적 사고를 가지고 자신을 이상화하고 자신 안에 있는 이상화하기 어려운 점들은 모두 타인에게 투사하여 떠넘긴다. 둘째,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나라는 오만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권력을 타인을 조정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셋째, 다른 사람을 별거 아닌 존재로 취급하며 타인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넷째, 부끄러움을 모르는 철면피이다.

다섯째, ‘어떻게 감히 네까짓 게’라며 타인에 대한 좋지 않은 자격을 함부로 부여한다. 여섯째, 영원히 자신을 사랑해달라며 타인을 끝없이 착취하며 만약 상대가 사랑을 더 이상 주지 않으면 상대를 공격하며 분노를 폭발하기도 한다. 마지막, 내 것은 내 것, 그리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사고를 가지고 다른 이의 영역을 쉽게 침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심리조작을 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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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르시시스트’와 짝패를 이루고 있는 ‘동반의존’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 『관계중독』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신의 객관적 지위와 상관없이 자존감이 낮다는 점이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이들의 내면에는 ‘비판자’가 있다.

내면적 비판자라는 심판관이 있어서 끊임없이 자신을 정죄한다.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학대자인 셈이다. 더 나아가 이것을 밖으로 투사한다. ‘내면적 비판자’가 우월한 위치에 있을 때는 타인을 비하하고 ‘자기비하적 자아’가 열등한 위치에 있을 때는 타인을 이상화한다. 그들은 자기를 지배하는 자를 이상화하고 동반의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자들을 비하한다. 그들은 어떤 권위자나 학대자로 하여금 자신을 괴롭히게 함으로써 피학적 쾌락을 얻는 마조히즘적 요소와 중독 시스템 밖에 있는 자들이나 자신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공격하고 혐오하고 괴롭힘으로써 가학적 쾌락을 얻는 새디즘적 요소가 동시에 있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와 마찬가지로 ‘승자와 패자’의 패러다임에 사로잡혀있는데 자신을 승자가 아니라 패자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 항상 ‘쓸모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 핵심적인 감정은 ‘수치심’이지만 거기에는 불안감이나 죄책감 혹은 우울감이나 외로움이 공존한다.

이들은 이러한 감정을 부정하고 자신의 욕구를 철저히 억압한다. 그들은 “혼자가 되느니 불행한 관계가 낫다”고 생각하며 항상 다가가려 하고 상대의 인정을 갈구한다. 심지어 순교자나 되는 듯 희생적이지만 실상은 희생조차도 상대를 은밀하게 조정하고 수동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로 심리조작에 쉽게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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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대의 문제는 중독이 개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중독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중독치료 전문가인 앤 윌슨 섀프가 쓰고 강수돌 교수가 번역한 『중독사회』라는 책을 보면 저자는 자신의 치료경험을 토대로 현대사회를 분석하면서 현대 사회를 ‘중독 시스템’이라고 칭한다. 중독사회는 기본적으로 희소성 모델과 제로섬 모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 서로 경쟁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배적이다. 이로 인해 모두 중독에 걸린 사회가 되어 나르시시스트가 되거나 동반의존자가 되도록 만든다.

자기중심성을 추구하며 통제환상과 완벽주의에 빠지거나 의존성을 가지고 터널 비전이나 수치심과 두려움에 빠지게 만든다. 윤리적 퇴행이나 부정직함, 혼란과 부인, 망각이나 부정, 자기 방어와 남 탓하기 등의 특징이 사회 전체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테러리스트나 사이비 종교집단이나 불법 다단계 판매업체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중독자다.

강수돌 교수가 직접 쓴 『중독의 시대』라는 책을 보면, 한국이 더 심각한 중독사회가 된 것은 사회적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존과 안정을 추구하며 압축 성장을 위해 모두가 돌진하는 사회가 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지나갔다. 한 개인이 중독에 쉽게 빠지는 이유가 자신 안에 있는 상처를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듯이 한국사회가 중독사회가 된 것은 사회적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의 결과로 속물주의에 빠졌고 적대관계가 심화되었다. 특히 모두가 일중독에 빠진 ‘노동사회’가 만들어졌기에 이에 대한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새로운 대안을 만들기 위해 첫째, 새로운 삶의 ‘가치관’을 세워야 한다. 새로운 가치관은 소유 양식의 삶이 아닌 존재 양식의 삶, 결과 지향적 삶이 아닌 과정 지향적 삶, 외면 지향적 삶이 아닌 내면 지향적 삶을 의미한다. 둘째, 새로운 삶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현 시스템은 ‘중독 시스템’이며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의 삼각축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적정생산-적정소비-적정순환’이라는 새로운 삼각축을 가진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

세 번째로 ‘주체’의 문제가 중요하다. ‘누가’ 새로운 시스템 전환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경계를 넘어선 연대’다. 일중독에 빠진 ‘노동사회’가 아닌 건강하고 인간다운 ‘품위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관계에 근거한 연대’가 아닌 ‘인간의 필요’에 기초한 ‘공감의 연대’를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부터 실천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독교가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공동체적 비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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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큰 문제는 중독이 종교적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점이다. 종교중독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책은 『해로운 신앙』이다. 부제가 ‘종교중독과 영적 학대의 치유’이다. 이 책에서는 전통교회 안에 있는 종교중독을 일으키는 해로운 신앙 체계의 특징들을 말한다. 지면 관계상 다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그 특징을 보면 놀랍게도 사이비 단체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해로운 신앙체계를 작동시키는 5가지 역할이 있다. 학대자, 공모자, 행동가, 희생자, 추방자다.

이 중 핵심적인 두 가지 역할이 지도자인 학대자와 일반성도인 희생자이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와 동반의존자, 심리조작을 하는 자와 심리조작을 당하는 자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렇다는 것은 사이비 집단이나 이단이 기성 종교의 토양에서 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성 교인이 왜 이렇게 쉽게 이단이나 사이비 집단에 빠지는 지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 이단이나 개신교 집단을 동일하게 보는 이유가 타당성을 갖는 것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다. 기독교는 속히 종교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이러한 종교중독이 한국에서는 독특한 특징과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박성철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속에서 주류기독교의 반응을 보며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종교중독과 기독교 파시즘』이라는 책을 썼다. 한국교회의 독특성은 종교중독이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정치적 종교’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는 데 있다. 종교중독이나 기독교 근본주의는 모두 현실 도피 욕구로 인한 집착을 기반으로 하며, 권력 중독을 동반하고,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전근대적 종교 전통에 대해 집착하고, 권력추구적인 동시에 권위주의적이며, 분리주의적 강박과 편집증적인 반공주의로 무장한 진영논리에 빠져있고, 반대자에 대한 공격성을 표출하며, 여성차별적인 동시에 가부장제적이며, 번영신학을 추구하는 물신숭배에 빠져있다. 이런 모습을 유지하는 한 세상 사람들에게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하는 ‘디아코니아’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개인적 차원에서는 종교중독의 문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성자적 영성의 한 측면인 자율성과 책임성이라는 차원에 접근해야 한다. 중독은 ‘대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대체물을 찾는 것이 중독이다. 종교중독의 핵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종교’라는 대체물을 섬기는 것이다. 황홀한 영적 체험이든 특별한 종교적인 행위든 종교 체제와 종교 집단이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이든 우리의 근원적인 욕구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는 것이 종교중독이요 이것이야말로 우상숭배다. 참 종교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한다. 의존적 노예가 아닌 참 자유인이 되게 하는 것이 참 종교의 특징이다. 참 그리스도인일수록 의존성이 아니라 자율성이 커진다.

둘째로 중독은 ‘회피’다. 진짜 현실에 대한 회피이며 책임으로부터의 회피다. 거짓 환상으로의 회피이며 쉬운 해결책에 대한 추구다. 종교중독을 추구하는 자들을 보면 힘든 현실을 피할 수 있게 하고 가짜 위안을 제공하는 마약과 같은 종교를 찾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구원과 안전함이 주어지고 마법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는 신비주의적인 종교를 찾는다. 자신의 욕망을 손쉽게 충족시켜줄 수 있는 종교를 찾는 셈이다. 해로운 신앙체계나 우상숭배만큼 이것을 잘 성취해주는 것도 없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값싼 행복으로 가는 도피주의자가 아니라 십자가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이다. 어떤 시험이 와도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손쉬운 해결책이 아니라 책임을 지며 인내를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율성은 책임성과 함께 갈 때만 온전해진다.

무엇보다 중독은 자존감이 낮은 자들이 잘 걸린다. 낮은 자존감의 뿌리에는 ‘수치심’이 있다. 죄책감은 행위에 대한 판단이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된 행위를 했다.” 반면 수치심은 존재에 대한 판단이다. “내가 잘못됐다. 내 존재가 잘못된 존재이다.” 수치심은 자신이 잘못된 존재이자 쓸모없는 존재라는 감정이다. 이런 사람들이 중독에 잘 걸린다. 중독이란 수치심을 일으키는 상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다. 중독에 빠져 있는 동안은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중독은 자기 효능감을 높여준다.

하지만 이것은 환상을 통한 일시적인 기분전환일 뿐 결국은 더 큰 수치심에 빠지게 만든다. 종교중독의 모습에서 벗어나려면 수치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낮은 자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근원적인 욕구인 안정감과 중요감 또는 소속감과 성취감을 경험해야 한다. 그것은 오직 참 하나님을 만날 때 가능하다.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고 내 존재 자체만으로 기뻐하시며 나의 약점을 수용할 뿐 아니라 나의 잘못까지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으신 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해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중독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시려고 오셨으며 우리의 낮은 자존감 안에 있는 수치심을 해결해주시기 위해 오셨다. 그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라.

이도영 객원기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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