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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믿음, 부활의 삶살아 계신 주(출애굽기 14:9~14)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1.04.07 00:05

부활의 아침입니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주어진 성서일과를 따라 출애굽기의 말씀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직접 전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죽음을 딛고 일어선 삶의 의미와 더불어 우리가 살아 계신 주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새길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직접 전하는 말씀은 이미 우리가 누차 되새겨왔던 만큼, 오늘은 이 출애굽기 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가운데 부활의 의미를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서에서 출애굽기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세계, 성서의 신앙세계를 형성한 원초적 사건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신앙세계,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지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바로 이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해방의 사건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게 된 사건, 그것이 성서적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역사적 해방의 사건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믿음이 풍요로운 신앙의 세계를 형성한 출발점이 된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출애굽, 곧 이집트 탈출의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로서 홍해를 건너기 직전의 백성들의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지도자로 하는 히브리 노예들은 질긴 요구 끝에 드디어 이집트의 억압에서 벗어나 해방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 해방의 여정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권력은 절대 스스로 반성하는 법이 없습니다. 어떤 심각한 위기를 느낄 때만이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 그 행동방식을 변경할 뿐입니다.

제국 이집트의 권력자 파라오는 히브리 백성들의 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다가 극심한 재앙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 백성들의 요구에 응해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파라오는 군대를 이끌고 탈출하는 히브리 노예들을 추격합니다. 이 사실은 한편으로 권력의 완고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여정의 질곡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소중한 자유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파라오의 추격부대가 바짝 다가왔습니다. 파라오가 직접 진두지휘를 할 뿐 아니라 특수병거 육백 대를 포함한 정예부대였습니다(14:7). 그 장면을 목격한 히브리 백성은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는 내용입니다.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서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14:11~12)

이 불평은 출애굽 내내 반복됩니다. 본문말씀이 이미 이집트에 있을 때부터 그 불만의 뜻을 전했다고 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충분히 그럼직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성서본문상의 증언을 통해 볼 것 같으면, 이 대목에서 비로소 그 불평이 본격적으로 터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탈출하기까지 숱한 사연을 겪어야 했겠지만, 탈출의 여정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중대 위기를 겪으면서 터져 나온 불평의 목소리였습니다. 죽음의 위기 앞에서 엄습한 두려움의 발로였습니다. 죽을 바에야 차라리 노예로 사는 것이 낫다는 탄식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탄식과 불평을 쏟아내는 백성을 향하여 모세가 대답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려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14:13~14)

오늘 본문말씀은 여기까지이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이 무엇입니까? 바로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홍해가 갈라져 히브리 노예들은 바다를 건너지만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는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지는 장면입니다. 출애굽 여정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현대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논란이 되는 장면입니다. 과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의문을 제기하는가 한편 정반대로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라 믿기도 합니다. 그 사실이 입증되어야 이 이야기의 진실성이 보장된다는 입장에서 제기되는 공방전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진실은, 역사적 사실성, 고증의 확실성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접근하면 오늘 본문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힙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확실하게 고증하여 그 위치를 확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 가운데 예컨대 바알스본의 경우 지중해 연변이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입니다. 게다가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홍해’(Red Sea)의 히브리어 원어는 ‘얌숩’으로, 그것은 곧 ‘갈대바다’(Reed Sea)를 뜻합니다. 그 ‘얌숩’을 그리스어 칠십인역에서 ‘홍해’로 번역한 바람에 오늘날 그렇게 굳어졌을 뿐입니다. 이 사실을 규명하고 나면 이 이야기의 진실성이 보증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요한 진실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도저히 불가능하리라 여겨진 일이 일어났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놀라운 비약이요 초월의 사건입니다. 제국 이집트의 억압으로부터 노예들이 탈출한다는 것 자체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이 자신들만의 자주적인 공동체를 꾸린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끄는 히브리 백성이 하나님을 믿는 가운데 그 놀라운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이 곧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이 성취된 사건입니다. 그것이 곧 바다를 건넌 사건이 된 것입니다.

▲ Frederick Arthur Bridgman, 「Pharaoh’s Army Engulfed by the Red Sea」 (1900) ⓒWikipedia

오늘 본문말씀은 그 현실적인 불가능성과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불가능성은 비단 외부의 힘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부의 힘에 압도당하여 스스로 두려워하고 좌절할 때 그 불가능성은 굳혀집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전하고 있는 백성들의 태도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바라는 것 같지만, 정작 자유가 책임을 동반할 뿐 아니라 때때로 험난한 난관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 때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태도를 취합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정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불가능성에 매여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다시 종이 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탄식하고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모세가 선포한 것이 그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그렇게 좌절을 겪었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유에의 의지이며 해방의 손길로 경험됩니다.

명백한 비약이자 초월적 사건으로 경험되는 이 사건이 그저 초자연적 사건이거나 육체적ㆍ물질적 삶과 무관한 내면의 사건인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한편 명백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이 놀라운 탈출의 해방을 경험한 사건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한 것도 명백히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땅의 현실 위에서 스스로 경험한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 비약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은 분명히 역사적 사건인 것입니다.

그것은 노예로서 자유를 잃고 죽음과 같은 삶에서,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진정한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기쁘게 누릴 때 비로소 진정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진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흥미로운 글월 하나 읽어드릴까 합니다. 한번 음미해보시기 바랍니다.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하며 또한 찬성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는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꼬리에 부유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일제치하에서 김교신 선생이 발행한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권두언입니다. 이른바 “弔蛙”(개구리를 애도함)로 알려진 문장입니다. 이 권두언으로 <성서조선>은 158호를 끝으로 폐간되었고, 이 책을 만들었던 모든 사람이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가운데 당시 총독부의 <조선사>에 맞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했던 함석헌 선생도 포함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아, 전멸은 면했나보다.” 일제는 식민지 백성의 삶에의 의지, 자유에의 의지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없이 죽어줘야 유지되는 권력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치며 죽을 때까지 한결같은 걸음을 내디뎠던 함석헌 선생은 1976년 3.1구국 선언 이후 재판을 받을 때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를 심판하는 판사들과 검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새로 오는 세상을 맞이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저희를 훈련시키시고, 길고 긴 고난과 시험을 우리 씨알들에게 허락하셨다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러 가지 값진 고난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에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시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이 말씀에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신앙고백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논리적 추론에 따른 존재증명을 따르는 것도 아니요, 생물학적 존재로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역사적 신앙고백입니다. 고난의 역사, 그 삶의 현장 가운데서 마땅히 따라야 할 길을 걷는 가운데 체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저 특정한 교리를 신실하게 따르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그 교리적 강요를 따른다면 헛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 예수 부활을 믿느냐 하는 것은 교리적 명제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의미를 우리의 삶으로 체험하느냐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부활을 믿는 것은 부활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이 아니라 진정한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진정한 삶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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