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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왕조가 야훼 하나님의 뜻인가이스라엘 역사 알기 ㉚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4.08 16:20

분열 이후의 시기

남왕국 ‘르호보암’과 북왕국 ‘여로보암’에 의해 분열된 이스라엘은 북왕국 ‘아합’과 남왕국 ‘여호사밧’의 혼인 관계로 인한 평화가 찾아올 때까지 전쟁과 대립의 시기를 겪습니다(왕상14:30; 15:6f,16,32).

이번 글에서는 「열왕기상 15장 1절 – 16장 20절」에 나타난 다섯 명의 왕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남왕국의 ‘아비얌’과 ‘아사’, 북왕국의 ‘나답’과 ‘엘라’와 ‘시므리’입니다. 이들 각자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이들에 관한 본문 속에 나타난 전쟁들과 그 지역을 먼저 살펴보는 편이 당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이스라엘의 남북 분열 왕국

위의 지도에 나타난 영토 경계는 전반적인 분열 왕국 시대의 경계이기 때문에 분열 초기의 경계와는 약간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또 밀접한 지역의 경우, 지명을 표시하기 위해서 실제보다 멀리 표시되었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15장 17-22절」에는 북왕국 ‘바아사’와 남왕국 ‘아사’의 전쟁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북왕국 ‘바아사’는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막으려 했다고 합니다. 지도상에서 라마는 남왕국 영토에 속해 있는데, 본래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북왕국 ‘바아사’가 남왕국에 속해 있는 라마에 요새를 건축했다는 말은 당시 남북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대략적으로 베냐민 지파 지역에서 경계가 나눠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역에서는 국지적인 다툼이 계속 일어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때 남왕국 ‘아사’는 아람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고 아람이 북왕국을 공격하도록 요청합니다. 「열왕기상 15장 19절」에 따르면 아람왕 ‘벤하닷’은 북왕국 ‘바아사’와 동맹 관계에 있었습니다. 남왕국 ‘아사’는 이 동맹을 끊고 자신과 동맹을 맺자고 권유하는데, 아람에게 있어서 남왕국 ‘아사’의 제안은 상당히 달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람왕 ‘벤하닷’이 북왕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전쟁을 치룬 결과, 아람은 북왕국 북부 지역에 있는 이욘, 단, 아벨벧마아가를 손에 넣습니다. 이 지역은 페니키아의 두로로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아람은 이 전쟁을 통해 지중해로 향하는 중요한 교역로를 손에 넣게 됩니다.

아람의 참전으로 북왕국 ‘바아사’가 물러나고 남왕국 ‘아사’는 그들이 라마에서 사용하고 있던 건축 자재를 게바와 미스바로 가져가 요새를 건설합니다. 게바와 미스바도 베냐민 지파에 속한 땅으로 남왕국과 북왕국의 경계선 위에 있습니다.

북왕국의 경우에는 블레셋 지역 깁브돈에서의 전쟁이 두 차례 나타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왕위에 오른 2년째에 깁브돈에서 전쟁을 치루던 중, ‘바아사’에 의해 죽임당합니다.

‘시므리’가 디르사에서 모반을 하여 ‘바아사’의 아들 ‘엘라’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 훗날 중요한 왕조를 세우게 되는 ‘오므리’는 깁브돈을 향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므리’를 인정하지 않는 북왕국 백성들에 의해 그곳에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열왕기상 15-16장」에 나오는 전쟁들은 모두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는 각국의 국경선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시기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이 전쟁들을 국경선 확장 전쟁으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발생한 지역들이 교역에 있어서 중요한 거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열왕기상 15장 17절」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국의 분열 이후 남왕국과 북왕국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의 패자가 아닙니다. 블레셋, 아람, 암몬, 모압, 에돔과 비슷한 수준의 국가로 전락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들은 더욱 유리한 교역로 확보에 힘을 썼던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솔로몬’이 수행했던 영토 확장은 이 시기에는 무리한 일이었습니다.

지난 「이스라엘 역사 알기 ㉗ ‘아합은 나쁜 왕이어야 한다’」에서 보았지만, 북왕국 ‘여로보암’은 수도를 디르사로 정합니다. 디르사는 국제 외교에 적합한 지역은 아니었고 방어 전쟁에 유리한 지역이었습니다. 분열 왕국 초기 북왕국의 수도가 디르사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이 시기 북왕국이 어떤 정책 기조를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역대상 14장 9-12절」에는 「열왕기」에는 나타나지 않는 전쟁이 나오는데, 남왕국 ‘아사’ 시절에 구스 사람 ‘세라’가 마레사의 스바다 골짜기를 치러 올라왔다는 기록입니다. 위의 지도에는 마레사 지역이 표시되어 있지 않은데, 마레사는 라기스보다 조금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만약 「역대기」에 기록된 전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라면, 구스 사람 ‘세라’는 이집트 제22왕조에 속한 용병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시 어떤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지 분명하진 않지만, ‘오소르콘 1세(Osorkon Ⅰ, 주전 924-895년)’ 또는 ‘타켈로트 1세(Takelot Ⅰ, 주전 895-874년)’의 통치 기간 중에 일어난 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이집트에 남아있는 기록도 없고, 「역대하 14장 9절」에도 특별한 이유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는 역대기 역사가 집단에 의해 상당히 과장되게 기록된 이야기로 보이는데, 그래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남왕국의 남쪽 영토 경계가 지도에 표시된 것보다는 더 북쪽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구스 사람 ‘세라’가 전쟁을 일으킨 목적이 북쪽을 향한 원정이라고 말하기에 그들의 병력이 너무 적습니다. 또 그러한 대규모 원정이었다면 이집트에 기록이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전쟁은 분명 국지적인 규모의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열왕기」에서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국경 지역의 분쟁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남왕국의 영토 경계는 상당히 작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북왕국의 혼란기

「열왕기」는 북왕국 왕들 ‘나답’, ‘엘라’, ‘시므리’, ‘오므리’를 연속적으로 배치함으로 당시 북왕국이 상당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즉위 2년만에 ‘바아사’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바아사’의 경우에는 모반이 일어나지 않고 24년간 왕위에 있었지만, 「열왕기상 16장 1-4절」에 나타난 예언자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예언을 통해 그가 세운 왕조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인상을 남깁니다.

예언자 ‘예후’의 예언은 ‘바아사’의 아들 ‘엘라’의 때에 이루어지는데, ‘엘라’도 ‘나답’과 마찬가지로 왕위에 오른 2년만에 군 지휘관 ‘시므리’의 모반으로 죽임을 당합니다. ‘시므리’는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진 않았지만, 북왕국 백성들에게 왕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북왕국 백성들은 ‘시므리’가 아닌 ‘오므리’를 왕으로 세웠고(왕상16:16), ‘오므리’를 반대한 이들은 ‘디브니’를 왕으로 세웁니다(왕상16:21).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오므리’에 의해 디르사 성을 포위당한 ‘시므리’는 왕위에 오른지 7일만에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서 자결합니다.

▲ Rudolf von Ems, 「이스라엘 왕 스므리」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서사시인 루돌프 본 엠스(Rudolf von Ems, 1220-1254)의 『세계연대기(Weltchronik)』에 수록된 삽화입니다. 왕위에 앉아 있는 이는 북왕국 ‘시므리’로 보이는데, 그의 좌우에는 왕과 비슷한 의상을 입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마 ‘오므리’와 ‘디브니’로 보입니다.

북왕국의 잦은 왕조 교체는 북왕국 내에 왕조 사상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북왕국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에 반대하여 세워집니다. 왕에 반대하여 갈라져 나와 세워진 국가이기 때문에 이들은 단일 왕조에 의한 지배체제를 부정합니다.

이런 성향은 왕실에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에 ‘여로보암’을 다룰 때 살펴보게 되겠지만,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곳에 제사장을 세웁니다. 「열왕기상 12장 31절」을 보면, 그가 ‘레위 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제사장 집단도 하나의 혈통으로 고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북왕국은 ‘오므리’ 이전까지 3세대 이상 왕위를 차지한 일이 없습니다. ‘여로보암’ 왕조는 그의 아들 ‘나답’ 때에 끝났고, ‘바아사’ 왕조도 그의 아들 ‘엘라’ 때에 끝납니다. 단 두 세대에 걸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이들을 왕조라고 부르기도 애매합니다.

「열왕기상 15장 33절」에는 ‘바아사’가 24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연대를 수정하다보면 2-3년 정도의 오차가 생깁니다. 저는 연대를 맞추다보니 ‘바아사’가 22년간 왕위에 있던 것으로 수정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본다면, ‘여로보암’, ‘나답’과 ‘바아사’, ‘엘라’의 가계는 모두 24년 정도만 북왕국을 다스린 것이 됩니다.

「열왕기」의 연대를 그대로 따른다고 해도 이 두 집안은 네 사람의 왕이 50년간 북왕국을 다스린 것이 됩니다. 이는 남왕국에서 홀로 41년간 왕위에 있던 ‘다윗’의 자손 ‘아사’와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남왕국에서 일어난 개혁

북왕국이 잦은 왕위 교체로 인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남왕국은 ‘아사’에 의한 장기 집권 체제에 들어갑니다. 앞서도 남왕국의 영토가 상당히 작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는데, ‘아사’는 대외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부 개혁 정책을 통해 남왕국을 일으키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 Petrus Comestor, 「우상을 파괴하는 아사 왕」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프랑스의 사제이자 성서학자인 포식자 베드로(Petrus Comestor, ~1178)의 『성경 역사(Bible Historiale)』에 실린 삽화입니다. 베드로 사제는 너무나 많은 책을 읽었기 때문에 책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는 의미에서 포식자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서 남왕국 ‘아사’는 우상을 도끼로 찍어내고 있는데, 그의 뒤에 있는 인물은 아마도 그의 어머니 ‘마아가’인 것으로 보입니다.

남왕국 왕 ‘아비얌(역대기에서는 아비야)’과 ‘아사’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할 때 우리는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약간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열왕기상 15장 2절」을 보면, ‘아비얌’은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5장 10절」을 보면 ‘아사’도 ‘아비살롬’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역대기」는 이런 오류를 깨닫고 약간의 수정을 가합니다. 「역대하 13장 2절」에는 ‘아비얌’의 어머니가 ‘미가야’이고 그녀는 ‘우리엘’의 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아가’는 ‘아사’의 어머니라고 적습니다(대하15:16).

하지만 「역대기」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점인데, 한 부분에 오류가 발견되어 수정을 가했을 때 이와 같은 오류가 담긴 다른 부분은 수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대하 11장 18-23절」에는 ‘르호보암’의 아내들과 자식들의 이름이 나타나는데, ‘압살롬’의 딸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아내였고, 그녀의 아들 중에 ‘아비얌’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마아가’는 ‘르호보암’의 사랑을 독차지했다고 말합니다(대하11:21). 그 때문에 ‘마아가’의 아들 ‘아비얌’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대하11:22). 역대기 역사가 집단이 잘못 수정한 것인지 의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역대기」도 ‘아비얌’의 어머니가 ‘마아가’라고 말하고 있음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몇 가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지만, 가장 적합해 보이는 가정은 ‘마아가’가 ‘아비얌’과 ‘아사’의 어머니가 맞고, ‘아비얌’과 ‘아사’는 부자지간이 아니라 형제였다는 것입니다. ‘아비얌’의 통치 기간이 3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 죽은 형을 대신해 동생이 왕위에 오르는 일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비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열왕기상 15장 1-8절」과 「역대하 13장」은 그가 왜 3년만에 왕위에서 내려오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열왕기」는 그가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아비얌’의 남왕국을 견고히 하셨다고 말합니다(왕상15:4).

「역대기」는 여기에 더 과장된 일화를 첨가합니다. ‘여로보암’과 ‘아비얌’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역대기」에서 ‘아비얌’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 왕으로 나타나며,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화려한 승리를 거둡니다. 「역대하 13장 20절」은 북왕국 ‘여로보암’이 남왕국 ‘아비얌’ 때에 하나님의 치심으로 죽음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여로보암’이 ‘아비얌’보다 조금 더 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요절한 왕으로 보이지 않는 말도 추가되어 나타납니다. 「역대하 13장 21절」은 ‘아비얌’이 점점 강성하여 아내 열넷을 거느리고 아들 스물둘과 딸 열여섯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아비얌’이 3년만에 요절했다는 사실에서 독자들의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아비얌’의 요절 이후 남왕국은 그의 어머니 ‘마아가’에 의한 대리청정(代理聽政)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부 학자들이 ‘아사’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등극했을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상 15장 13절」과 「역대하 15장 16절」에는 ‘아사’의 어머니 ‘마아가’가 아세라 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녀를 태후의 자리에서 폐했다고 말합니다. 실제 ‘아사’가 그런 죄목을 들어 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에서 끌어내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야훼 종교를 강조하는 역사서의 특징 때문에 ‘마아가’에게 우상숭배라는 죄목을 붙여 놓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죄목에 의해서건 ‘마아가’는 자신의 아들 ‘아사’에 의해 폐위됩니다. 이는 ‘아사’가 어머니에게 놓여있던 권력을 빼앗아왔음을 의미합니다.

‘마아가’에 의한 대리청정이 훗날 있을 ‘아달랴’에 의한 남왕국의 대리청정과 연결되는 「열왕기」의 구상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대리청정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일 혈통에 의한 왕조 사상이 남왕국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남왕국 ‘아사’에 대한 평가는 「열왕기」와 「역대기」가 차이를 보입니다. 「열왕기」의 경우 ‘아사’는 ‘여호와 앞에 온전한’ 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늙어서 얻게 된 발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역대기」 역시 질병의 원인을 ‘아사’의 죄악에 의한 심판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역대하 16장 12절」은 ‘아사’가 발에 병이 났을 때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의원들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말년에 하나님을 떠났음을 시사합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점은, 두 역사가 집단의 평가 방식입니다. 「열왕기」와 「역대기」는 모두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적습니다. ‘아사’는 본래 하나님께 신실한 왕이었기 때문에 야훼의 성전에 은과 금과 그릇들을 바쳐왔습니다(왕상15:15; 대하15:18). 그런데 그는 아람왕 ‘벤하닷’과의 동맹을 위해 이를 사용합니다(왕상15:18; 대하16:2).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이런 ‘아사’에 대해 큰 반발감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아람과의 동맹을 통해 북왕국의 침략을 물리쳤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미스바와 게바를 건축한 왕으로 기록합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다르게 평가합니다. ‘아사’가 이룬 것에 대해서는 「열왕기」를 그대로 차용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예언자 ‘하나니’가 ‘아사’ 앞에 나와 그를 꾸짖습니다.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람을 의지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아사’는 ‘하나니’의 예언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역대하 16장 10절」은 ‘아사’가 ‘하나니’를 가두는데 그치지 않고 백성 중 몇 사람을 학대했다고 말합니다. 이에 바로 이어서 「역대기」는 ‘아사’의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열왕기」와 「역대기」가 가진 신앙적 차이는 분명해 보입니다. 역대기 역사가 집단이 ‘아사’의 잘못으로 지적하는 부분이 성전에 바쳤던 은과 금과 그릇을 타국에 바친 행위인지, 타국을 의존하려던 행위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적어도 ‘아사’가 성전에 바쳐진 예물을 타국에 바쳤지만,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다른 왕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무엇을 문제 삼고 있는지 파악하는 기준이 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왕들의 연대

이제 다섯 왕의 연대를 정리하고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지난 글에서 ‘오므리’의 통치 기간을 주전 885-874년으로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북왕국 왕들의 연대를 먼저 따져보려고 합니다.

‘시므리’는 7일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오므리’의 즉위 연도와 같은 한 해만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시므리’는 주전 885년에 왕위에 있었습니다. ‘엘라’는 2년간 왕위에 있었는데, 이를 산출해보면 주전 886-885년이 됩니다.

‘바아사’의 경우 「열왕기상 15장 33절」에 따라 24년간 왕위에 있었다고 한다면, 주전 909-886년에 왕위에 있던 것이 되는데, 이렇게 산출할 경우 ‘여로보암’의 통치 기간을 조금 줄여야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따라서 ‘바아사’의 통치 기간은 22년으로 잡고, 그는 주전 907-886년에 왕위에 있던 것으로 봅니다. ‘나답’은 2년간 왕위에 있었기 때문에 주전 908-907년에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전 글에서도 몇 번 언급했습니다만, 왕의 연대는 최소 1-2년의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제안하는 연대가 정확한 연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또 고대 왕들의 연대에 있어서 5년 정도의 오차는 해석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봅니다.

남왕국의 두 왕, ‘아비얌’과 ‘아사’를 살펴보자면, ‘아비얌’은 주전 912-910년에 왕위에 있었고, ‘아사’는 주전 910-870년으로 41년간 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연대를 더 후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사’의 통치 기간을 21년 정도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저희가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정리한 바에 따르면 ‘아사’의 통치기간을 절반으로 줄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분열 왕국을 다스렸던 왕들의 연대표는 북왕국 ‘여로보암’과 남왕국 ‘르호보암’을 다룬 이후에 전체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때 주요한 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연대표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분열 왕국의 첫 번째 왕들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해야 할 이야기가 많아 보이기에 한 번에 다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왕국 ‘르호보암’을 다룬 후에 북왕국 ‘여로보암’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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