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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없이 다니던 길어떤 하나님을 기다리는가?(시편 43:3-5)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4.18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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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4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오늘은 시편 42편과 43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앙을 품고 있는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시편 43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43편은 본래 시편 42편과 이어지는 하나의 시였을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에 대한 근거를 나열할 수도 있지만, 그런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두 시를 읽어보시면 이것이 연속되는 하나의 시라는 점은 다들 아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편 42편과 43편에는 똑같은 후렴구가 나타납니다. 42편 5절, 11절, 43편 5절에 나타난 말씀입니다. 아마도 성경 암송이나 한 해의 성경구절 같은 것들을 통해 익숙하신 본문일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구절을 후렴구라고 본다면, 시편 42-43편은 세 개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역개정 성경에는 시편 42편 5절과 42편 11절, 43편 5절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42편 11절과 43편 5절에는 ‘나는’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다는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성경에 번역된 내용으로는 시편 42편과 43편에 담긴 의미를 알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히브리어 원어를 따라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리는 의미가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시라는 문학이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제가 읽으면서 느낀 의미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시편 42편과 43편의 기본적인 정보를 살펴보자면,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기에 만들어진 시로 보는데, 포로기가 아니더라도 지방에 유배된 사람이나 디아스포라가 적은 시로 보기도 합니다.

포로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아픔을 담은 시라고 보기에는, 전체적으로 1인칭이 사용되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탄원시로 봅니다. 시인이 가진 고민, 시인의 슬픔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42편 3절과 10절에서 시인 주변의 사람들과 시인의 대적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 있냐”며 시인을 조롱합니다. 시인 스스로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느끼기에 주변 사람들의 조롱은 그에게 슬픔이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과거를 회상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마음껏 예배드리던 때를 회상합니다. 그때는 자신의 친구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며 감사와 기쁨의 소리를 냈다고 말합니다.

1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길 원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목마르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길 원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난다고 여긴 곳은 아마도 하나님의 집일 것입니다.

이런 시인의 고민은 코로나 이후 교회에 나가지 못하는 지금 성도님들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조롱당하고 있는 점도 비슷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이런 교회의 상황에 비해 조금 더 어려움에 처해 있는 듯합니다. 43편 1절에서 하나님의 판단을 바라며 자신을 변호해 주시길 간구하는 점이나 42편 9절과 43편 2절에서 원수의 억압을 이야기하는 점은 그가 편안한 상태에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표현이 약간은 과장된 표현이거나 육신의 고통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시인이 상당히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길 바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42편 2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길 바라던 시인은 5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리라고 말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에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원문은 ‘그의 얼굴의 도우심’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고민 해결을 위해 하나님의 집이 있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최소한 하나님의 집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다면 자신의 고민은 해결될 것처럼 말합니다. 그래서 1연은 하나님의 집을 갈망하는 시인의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분명 하나님의 집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3연인 43편 3-4절도 하나님의 산, 하나님의 거하시는 곳, 하나님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리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점만 본다면 시편 42-43편을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의 집이 아니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를 조금 더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시의 후렴구에 나타난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라는 구절에서 ‘소망을 둔다’라는 단어는 ‘기다린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소망을 둔다’라는 표현이 신앙적으로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저는 이 시에서는 ‘기다린다’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시인은 분명 하나님의 집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어떻게 함께 하시지도 않는 하나님을 ‘기다린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42편 9절에서 말하듯 ‘자신을 잊으신’ 하나님을, 43편 2절에서는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을 어떻게 기다리며 소망을 품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시인이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 하나님 앞에 붙여놓은 수식어의 변화를 통해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시인이 처음으로 찾은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1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집에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앞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집에 가지 않으면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2연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42편 6절에서는 다시금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시인이 지정한 지역이 어떤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만 이스라엘 외부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시인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회상합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의 파도가 시인을 덮습니다. 깊음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물결은 1절에 나타난 시냇물과도 연결됩니다. 시인이 찾아 헤매던 시냇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물결이 그를 뒤덮습니다.

하나님의 물결에 뒤덮인 후 시인은 고백합니다. 아침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함께 하시고 밤에는 하나님의 노래가 자신과 함께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이제 시인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집에서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시인의 ‘생명의 하나님’, ‘삶의 하나님’이 됩니다.

시인의 고백은 하나님의 집에 계신 하나님에서 자신의 삶에 계신 하나님으로 바뀝니다. 물론 여전히 시인은 자신을 억압하는 원수들로 인해 힘들어합니다. ‘반석이신 하나님’은 지금 자신을 돕지 않으십니다. 시인이 ‘어둠 속을 걷게’ 놔두십니다. 여전히 시인의 대적들은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시인을 조롱합니다.

42편의 마지막 절인 11절은 5절과는 한 단어가 다릅니다. 5절에서는 ‘그의 얼굴의 도우심’이었다면, 11절에는 ‘나의 얼굴의 도우심’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성전에서 뵙기를 원하던 시인은 하나님의 물결에 덮인 이후 자신의 얼굴을 하나님께 향합니다.

시의 3연에 속하는 43편에서 시인은 더 이상 ‘네 하나님이 어디에 있냐’는 주변의 조롱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43편에는 그 내용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던 시인이 자신의 삶에 계신 하나님을 고백했을 때, 하나님의 얼굴이 있는 곳을 바라던 시인이 자신의 얼굴을 하나님께 향했을 때, 주변의 조롱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가지 않더라도 시인은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43편 1절은 하나님의 판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니기에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자신을 판단해주시길 원합니다. 시인은 여전히 원수의 억압으로 인해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42편 9절과 43편 2절은 거의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인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과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거늘’만 바뀌고 뒷부분은 거의 똑같습니다. 한 가지 달라지는 점은 ‘다닌다’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의 심경 변화가 나타납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42편 9절에서는 원수의 억압 속에서 내가 슬프게 ‘걷는다’입니다. 그런데 43편 2절에서는 이 단어가 재귀형으로 사용됩니다. 본래 히브리어 재귀형은 ‘스스로 ~을 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스스로 걷게 하다’라는 말이 의미가 이상하다고 여겨져서인지, ‘걷다’의 재귀형은 ‘이리저리 걸어다닌다’로 번역되거나 ‘걷다’의 강조로 번역됩니다.

저는 시편 43편 2절에서는 재귀형 본래의 의미를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시인은 이제 깨닫습니다. 원수의 억압으로 인해 슬픔의 길을 걷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 계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42편 9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부재가 자신을 이런 길로 몰아넣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얼굴을 향한 후에 시인은 자기 스스로가 슬픔의 길을 걷게 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삶 속에서 함께 하셨음에도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얼굴을 비추셔야만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기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 시인에게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일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나아가는 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하나님의 만나는 순간이며 자신의 삶을 돌보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는 순간이 됩니다.

우리가 찾고 신앙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교회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곳에만 살아계신 분입니까?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장소에 상관없이 우리가 예배드릴 때만 우리와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시편 42-43편에서 시인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나아갈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삶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곳에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여전히 그의 원수는 그를 억압하고 어지럽게 만들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삶을 지키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 살아가고 있던 것은 자기 자신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시편 42-43편을 단지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신앙으로만 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 전반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괴로워할 때가 있습니다. 삶의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는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의 삶을 다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과거를 회상하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인은 과거를 바라보던 자신의 시야를 지금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얼굴을 들어 함께 하심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으며, 여전히 기뻐할 때가 있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 순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시고, 그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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