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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 복하나님의 은혜(시편 37:23-26)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4.25 15:09
▲ 하나님의 은혜는 복을 포함하지만, 복이 은혜와 같은 것은 아니다. ⓒGetty Image
23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 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 저도 말씀을 마칠 때나 대표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성도님들께 은혜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항상 구하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은혜’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는 동사 ‘하난(חנן)’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은혜를 입다’로 번역되는데, 이와 함께 ‘하난’은 ‘긍휼히 여긴다’는 표현으로도 번역됩니다. 은혜가 긍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은 이해가 되면서도 약간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은혜’는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주시는 것을 뜻하는데, ‘긍휼’은 마음의 표현으로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은혜’는 ‘복’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은혜와 복은 좀 다릅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었는데, ‘은혜’는 우리가 무엇을 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복’도 비슷한 맥락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복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았을 때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사전을 보면, ‘은혜’는 ‘사랑’으로 번역되는 ‘헤세드(הסד)’와 연결되어, ‘과분한 사랑’, ‘약속된 사랑’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도 있지만,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람들 사이에서 주는 은혜는 모두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표현되는 선의를 뜻합니다.

‘은혜’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말씀이 아마도 ‘이신칭의’라고 불리는 사도 바울의 설명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설명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의 마지막 절인 21절에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행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에게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맡겨지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값없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가졌기에 당연히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어떠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은혜’에도 ‘믿음’이라는 조건이 붙어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3장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허락되는가의 문제는 간단하게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은혜가 사랑과 연결된 개념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허락되어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분명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떠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분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최소한 믿기만 하면, 어떤 선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저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관심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보니 ‘은혜’가 복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재산이 늘어나는 은혜, 건강이 회복되는 은혜, 자식이 좋은 직장이나 대학에 들어간 은혜, 은혜라는 말이 이런 식으로 사용됩니다. 어떤 단어에 담긴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장되거나 축소될 수도 있고, ‘은혜’라는 단어가 추상적인 단어이기 때문에 그 의미가 변해갈 수는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무상의 복’이라는 생각 속에서 ‘은혜’를 구하고 있지 않은지 생각하게 됩니다. 영화 부당거래에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습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라는 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호의를 우리의 권리처럼 생각하며 은혜를 구하고 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은혜는 부활과 천국에 대한 희망일 것입니다. 더 이상 죄에 매여있지 않고 천국을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은혜는 이것만으로 그치진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은혜’라는 단어가 단지 구원에만 연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가능성, 지금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예언자 스가랴는 이런 선포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스가랴 8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이제 내가 다시 예루살렘과 유다 족속에게 은혜를 베풀기로 뜻하였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니라”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기로 결심하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포로기 이후 황폐한 이스라엘에 돌아온 이들을 향해 스가랴는 예루살렘이 회복되리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가능성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그 희망을 가진 이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회복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도움은 아닙니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시는 일이 은혜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몸이 아픈 이들을 치유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몸이 아플 때 치유하시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치유 행위에 있어서도 병을 고쳐주신 행위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시 율법주의 속에서 육신의 병이 있으면 죄인으로 취급받던 이들이 예수님의 앞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상황이 은혜이며, 예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돌아보신 것 자체가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은혜의 결과로 우리가 가능성을 바라보며 살아갔을 때, 그것은 현실적인 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복과 연결시키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중간 과정을 빼버린 채, 은혜를 받았다는 첫 단계와 무엇인가를 얻게 되었다는 결론을 이어붙인 잘못된 연결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현실적인 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현실적인 복으로만 연결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받은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우리의 욕심과도 연결됩니다.

또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해도 현실적인 무엇인가를 얻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능성을 열어주셨고, 희망을 주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 가능성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희망을 품지 않는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내가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낄 때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았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현실에서 받는 물질적인 복이 아닙니다.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무엇인가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구원의 소망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혜이고, 우리가 날마다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은혜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편 37편에 대한 설명보다는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서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시편 37편은 잠언으로 볼 수 있는 시입니다. 잠언과 전도서에도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과 유사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본문 23-24절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가 정해진 길을 걸어갈 때에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시기에 그가 넘어질 때 붙드시어 그가 완전히 넘어지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가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마음을 붙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인 25-26절을 보면, 시인은 이런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밥을 굶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옳지 않은 청지기의 비유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옳지 않은 청지기는 주인에 의해 일자리를 잃게 되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물론 그는 옳지 않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지만,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은 그 청지기에게 은혜를 얻게 됩니다.

일자리를 잃게 된 청지기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주인의 집에서 쫓겨나게 된 이후에도 자신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또한 마태복음 18장에 나타난 용서할 줄 모르는 비유의 내용과도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은 임금으로부터 만 달란트를 탕감 받습니다. 그의 빚을 탕감해준 것은 임금의 호의이고, 은혜입니다. 이 사람은 임금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빚을 탕감 받은 후에, 은혜를 받은 후에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받은 은혜는 잊어버린 채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감옥에 가둡니다. 결국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임금은 이 사람 역시도 감옥에 가두도록 명령합니다. 은혜를 베풀줄 몰랐기에 자신이 받았던 은혜마저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오늘 시편 37편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전해주신 비유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라면 세상 속에서 그 은혜를 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지금 살펴본 말씀들 속에서 누군가에게 끼치는 은혜는 분명 물질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누군가에게 행하는 은혜는 물질적인 도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행하는 은혜 역시도 물질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형태 중에 물질적인 도움이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도움만이 남을 향한 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고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일으켜 세우신 것이 은혜라면, 우리가 남에게 전하는 은혜 역시도 그런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이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힘들어할 때 곁에서 힘을 조금 나눠주는 일도 은혜를 전하는 일입니다. 다만 지금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은혜를 전하는 형태가 물질을 전하는 방식으로 많이 나타날 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평생 돈을 벌어도 서울에 있는 집 한 채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주식이나 비트 코인에 돈을 투자합니다. 희망이 없는 사회, 가능성이 없는 사회가 지금의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하시고 우리 삶에 가능성을 열어 놓으셨음을 전해야만 합니다. 이를 전하려면 우리가 먼저 그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물질적으로 어려움에 있더라도 내가 지금 육체적으로 아픔을 겪고 있더라도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고 계심을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우리가 기쁨을 품고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만 그 은혜를 세상에도 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다시 나아갈 수 있게 하시고 우리가 힘을 낼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물질적 복, 손에 잡히는 복이라는 결과만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느끼며 살아가신다면 여러분께서 원하던 복을 얻게 되실 줄 믿습니다. 또 그 은혜를 느끼며 살아가시기에, 그 은혜 속에서 복을 얻는 여러분이시기에 세상에도 그 은혜를 전하시길 바랍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이 순간에도 다시금 회복의 때가 온다는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은혜를 전하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기뻐하시며 더욱 많은 은혜와 사랑으로 채우실 줄 믿습니다. 평안과 기쁨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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