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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대가 말하기를’주간 평화교회 <신약따라걷기>
이진경 교수(협성대) | 승인 2021.04.28 22:10
▲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설경구 분·오른쪽)과 자산어보 집필을 도운 현지 청년 창대(변요한 분)의 이야기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이진경 교수님의 이 글은 ‘평화교회연구소’(소장 황인근 목사)가 발행하는 웹진 「주간 평화교회」 65호에 실린 것을 평화교회연구소와 저자의 동의를 얻어 에큐메니안에 게재합니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평화교회연구소와 이진경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복음은 어둠에 빛을, 절망에 희망을, 상처에 치료를, 고통에 위로를 선사해주는 복음이었다. 과연 처음 복음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복음으로 새 희망을 얻고 위로와 힘을 얻어 다시금 새롭게 태어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복음은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복음의 정의와 역할로 인해 무의식중에 발생하는 오해도 있으니 그것은 복음을 그저 환하고 따스하고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성질을 지닌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복음은 이런 종류의 따스함과는 전혀 다른 성질도 자신 안에 지니고 있다.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눅 12:49) 예수는 복음으로 인한 평화와 화목이 아니라 그로 인한 분쟁과 불화를 말한다. 복음은 가정과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분란을 일으키고 다툼과 폭력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이 분쟁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관계, 즉 부모와 자식 간에도 일어난다. 이것은 단순한 다툼이 아니라 상대를 죽이기까지 하는 잔혹하고 비참한 분쟁이다. 그리하여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누가의 말에 마태는 칼을 더하여 전한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마 10:34)

불과 칼, 이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 일어날 뜻밖의 사태다. 칼을 전한 마태복음에는 누가복음의 불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 그런데 예수의 어록 114개를 모은 도마복음, 그 기록시기가 모호하여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는 이 외경에는 이 둘을 함께 합하여 전하는 구절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내가 세상에 평화를 던지러 온 줄로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땅 위에 갈등을, 즉 불과 칼과 전쟁을 던지러 온 것을 알지 못한다. 한 집에 다섯이 있을 때, 셋이 둘에 그리고 둘이 셋에, 아비가 아들에 그리고 아들이 아비에 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각기 홀로 서게 될 것이다.”

이 분란은 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분란이 아니라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분란이다. 복음은 마음의 평안을 허락하기도 하겠지만 심각한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던져진 불과 칼, 모든 것을 삽시간에 전소시키고 모든 것을 쳐서 베어버리는 파멸의 도구, 세상은 복음을 그렇게 대할 것이라고 예수는 예언하셨다. 대체 복음의 어떤 점이 이런 무서운 파멸을 불러 온다는 것일까?

이 예언의 실현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의 끝자락, 나라가 자존심과 품격을 잃고 탐관오리가 성행하던 시절,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민초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절, 썩어빠진 조선의 개혁을 꿈꾸던 선비들이 있었다. 조선의 실학자들은 주자의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새로운 개혁 사상의 가능성을 천주교라는 서양의 학문에서 발견했다. 이렇게 조선은 어쩌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들여온 나라가 되었다.

서학에 심취하던 실학자들 중에는 학문의 영역을 넘어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간 이들도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삼형제와 그들의 조카사위 황사영도 바로 그들 중의 하나였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애타는 벌들처럼 적극적으로 그 사상의 단물을 빨아들였으리라. 그들을 매혹시켰던, 세상을 바꾸기 위한 열쇠로서의 사상적 핵심은 아마도 다음의 성경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 3:28)

이것은 무신론자요 좌파철학자인 알랭 바디우조차 서구 역사 속에서 보편주의를 태동시켰다고 인정한 유명한 구절이다. 그리고 이 구절의 핵심은 바울이 유대인과 그리스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바울은 다른 둘이 동등하게 같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둘 사이의 차이 자체가 폐기된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편주의의 본질이다. 모든 계급과 차별이 사라진 평등한 세상이라니,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존귀하게 여겨지는 세상이라니, 이 얼마나 가슴 뛰게 하는 벅찬 이상이란 말인가?

그러나 신분제에 기초한 주자의 세상 속에서 예수의 세상은 설 자리가 없었다. 서양의 학문인 서학(西學)은 빠르게 사학하고 간사한 학문인 사학(邪學)으로 바뀌었다. 최고의 실학자들은 사학죄인이 되어 죽거나 유배되었다. 정약종과 황사영은 순교를 당했고,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은 배교의 대가로 살아남아 유배를 떠났다. 그렇다면 그들은 배교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모든 유산을 자신들의 정신에서 지워버렸을까? 어쩌면 정약전만큼은 아니었을지 모른다고, 이준익 감독은 자신의 영화 《자산어보》를 통하여 정약전에게 남아있었을지도 모를 그리스도교의 유산을 상상한다.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정약용은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내용은 잘 몰라도 필시 이름만은 들어봤을 유명한 책들을 포함하여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런데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은 16년의 유배기간 동안 고작 물고기 백과사전인 『자산어보』 단 한 권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 역사물의 거장 이준익 감독은 불온한 상상력을 펼친다. 정약용은 끝까지 조선이라는 체제를 신봉하여 그 체제의 개혁을 위한 책들을 쏟아냈지만 정약전은 그 체제를 이미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서학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정약전은 섬에서 만난 제자 창대에게 예수의 말씀을 들려준다. 그리고 임금이 없는 세상, 서자가 없는 세상을 말하기도 한다. 그 소리에 창대는 소스라치며 경악한다. 창대의 태도는 복음을 변호하던 바울에게 보였던 베스도 총독의 그것과 꼭 닮았다.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행 26:24) 그렇다. 누군가에게 복음은 이렇게 소스라치고 경악할 만한 소리인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창대는 감독이 창조해낸 영화 속 가공인물이 아니라 『자산어보』에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정약전은 자신의 책 서문에 그를 소개하면서 그의 사려 깊음과 믿음직함, 그로부터 받은 도움을 기록해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책에 ‘창대가 말하기를’이라는 구절을 적어 넣는다. 영화와는 다르게 창대는 아마도 상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에 대해 ‘공자가 말하기를’, ‘맹자가 말하기를’이 상식인 세상 속에서 정약전은 ‘창대가 말하기를’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창대의 말은 공자나 맹자나 주자와 다를 바 없이 귀하고 진실한 것이라고. 어쩌면 이런 생각과 함께 그는 관념에 몰입해 있던 세상을 떠나 사물의 세계, 물질의 세계에 몰입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위해 자신의 남은 인생을 모두 바쳤던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 조선의 땅을 찾은 복음은 과연 그것이 불과 칼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는 사람들에게 이 낯선 사상은 불온하기 짝이 없는 위협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이 태동된 지 1800여 년이 지난 조선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복음은 그 시작부터 불과 칼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계급과 성별과 종교의 차이로 질서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있는 사회에서 그 차이에 대한 철폐는 그 질서로 혜택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명백한 위협이었다. 그러나 그 질서에 짓눌린 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분란은 필연적이었다.

같은 시대와 같은 사건을 소재로 다루면서 그 역시 정약용이 아닌 정약전에 주목했던 소설가 김훈은 그의 책 『흑산』에서 천민들이 천주교를 통해 얻었던 희망,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져본 위로와 희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주여, 주여 하고 부를 때 노비들은 부를 수 있는 제 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웠다.” 이 모든 분란은 다 과거에 속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복음이 일으키는 분란은 지금도 여전히 필연적이다.

이진경 교수(협성대)  peacechurch201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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