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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로보암, 고대 이스라엘 전통의 계승자인가 파괴자인가이스라엘 역사 알기 ㉝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 승인 2021.04.29 12:28

정식 왕위 계승자 여로보암

북왕국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은 ‘솔로몬’ 시절부터 활동한 인물로 남왕국의 세 번째 왕 ‘아사’ 시대까지 북왕국을 다스린 왕입니다. 그는 「열왕기상 11장」에서 처음 등장하여 「열왕기상 14장」에 나타난 죽음에 이르기까지, 남왕국 ‘르호보암’에 비해 훨씬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열왕기」는 남왕국 출신의 역사가들이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북왕국 왕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지는 않습니다. 분열 왕국 왕 중에서 「열왕기상, 하」를 통틀어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북왕국 ‘아합’의 경우도, 그의 악함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지면이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을 그런 맥락에서 읽기에는 조금 모호한 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의 등장에 앞서 「열왕기상 11장 4-13절」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솔로몬을 향해 ‘한 지파를 제외하고 너의 신하에게 이 나라를 주리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이제 독자의 관심은 이스라엘을 이어받게 될 ‘솔로몬’의 ‘그 신하’가 누구인지로 향하게 됩니다. ‘그 신하’가 ‘여로보암’이라는 사실은 「열왕기상 11장 25-40절」에 나타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여로보암’은 잘못된 ‘솔로몬’을 대신하여 나라를 이어받도록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인물입니다. 앞서 ‘솔로몬’에게 선언된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의 입을 통해 ‘여로보암’에게 반복됩니다.

「열왕기상 11장 40절」은 이런 예언의 선포가 있었기 때문에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고, ‘여로보암’은 이집트로 도망가 ‘시삭(쇼셍크 1세)’에게 도피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죽을 때까지 이집트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모습만을 보자면, ‘여로보암’이 왕위에 등극하게 되는 과정은 마치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선택하시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삼상15:34-16:13). ‘여로보암’의 도피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던 ‘다윗’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합니다(삼삼20-21장). 특히 실로 출신 예언자가 ‘여로보암’의 왕위 등극을 선포했다는 점은 실로 출신 예언자 ‘사무엘’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12장 4절」에 나타난 북쪽 지파들의 요구사항을 보면, ‘여로보암’이 단지 예언자 ‘아히야’의 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솔로몬’을 대적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합니다. 「열왕기상 11장 28절」을 보면, ‘여로보암’은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건축 감독관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파에 속한 지역을 담당하는 감독관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12장 4절」은 ‘솔로몬’이 노예가 아닌 이스라엘의 일반 백성들에게도 강제 노역을 시켰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한 현실적인 이유는 동족에게 자행된 강제 노역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솔로몬’을 향한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고, 반란이 진압되는 과정에서 이집트 도피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얼마나 많은 내부 반란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런 반란을 능숙하게 진압해온 ‘솔로몬’의 정책이 존재했기에, 훗날 이스라엘 백성을 아버지보다 더 엄하게 다스리겠다는 ‘르호보암’ 발언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글에서도 이미 살펴본 바 있는 세겜 총회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유다 지파 출신이자 다윗 혈통의 왕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집트에 도피해 있다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여로보암’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웁니다. 즉 ‘여로보암’은 실로 예언자의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사람이며, 지파 총회의 결정에 따라 왕위에 오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여로보암’은 잘못된 ‘솔로몬’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읽힙니다. 다만 한 지파를 다윗 혈통에게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분열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열왕기」는 전합니다.

이후 「열왕기」는 ‘여로보암’이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라는 우상을 만들었고 이를 숭배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미지는 「열왕기상 13장」에서 더욱 강화됩니다. 「열왕기상 13장」은 남왕국 출신의 역사가들에 의해 삽입된 내용으로 보이는데, 유다에서 온 어떤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 제의를 규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열왕기상 14장 7-11절」에 나타난 ‘아히야’의 예언과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으로 연결됩니다.

70인역 성경에는 마소라 사본에는 없는 ‘여로보암’에 대한 몇 가지 내용이 더 추가되어 있는데, 그의 어머니 ‘스루아’가 창녀였다는 표현과 ‘여로보암’이 이집트로 도피하여 이집트 공주와 결혼했다는 내용입니다. 이런 표현은 아마 ‘여로보암’을 깎아내리기 위한 첨가로 보입니다.

남왕국 출신의 역사가들에 의해 재구성된 왕국 분열의 이야기는 ‘여로보암’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아 정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라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우상 숭배를 장려한 악한 왕이라는 생각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로 인해 북왕국이 멸망했으며, 그는 악한 왕이었다는 이미지는 「열왕기」에서 계속 나타납니다(왕상15:30, 34; 16:2, 7, 19, 26, 31; 22:52; 왕하3:3; 10:29, 31; 13:2, 6, 11; 14:24; 15:9, 18, 24, 28; 17:21f).

하지만 우리가 ‘여로보암’은 악한 왕이었다고 평가하는 남왕국 역사가들의 평가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다윗 왕조 정통성에 대한 사상(삼하7:1-17; 왕상8:25 참고)을 빼고 생각해본다면, 남북왕국 분열의 주범은 유다 지파라고 볼 수 있습니다.

▲ 12지파 분열왕국 비교 지도 ⓒ위키피디아

위의 지도는 「여호수아」에 나타난 12지파 분배에 따른 구분과 분열 왕국 초기 이스라엘의 영토를 비교한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난 글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베냐민 지파가 왕국 분열 이전에 이미 유다 지파에 병합되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조금은 일리 있어 보입니다.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베냐민 지파에 속한 지역 절반 이상은 이미 유다 지파의 땅처럼 다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의 특성상 영토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만, 실제 당시에 영토의 경계선은 명확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계선을 통해 영토를 구분하기보다 각각의 촌락을 중심으로 영토가 지정되었을 것이고, 그 촌락에 어떤 지파의 구성원이 살고 있는가에 따라 12지파의 영토가 구분되었을 것입니다.

12지파 영토 분배 때에 유다 지파가 과도하게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제외하더라도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의 영토 안에 위치한 점도 이상하기는 합니다. 또 시므온 지파의 영토는 왕조 시대로 넘어서면서 어느새 유다 지파의 영토로 병합됩니다.

지파 분배와 그 경계가 이스라엘 왕국 시대 이전에 이미 확정된 것이며, 「열왕기상 21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각 지파의 영토를 지키는 일이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져 왔다면, 유다 지파가 시므온 지파의 영토와 베냐민 지파의 영토를 잠식해버렸다는 사실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지파 분배나 영토 경계는 후대 성서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 지역에 어떤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는 분명 존재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파 분배는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이 시작될 때 왕은 지파 연합 총회의 결과에 따라 선출되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이 계속해서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점은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계약이었을 뿐이고, 이스라엘 전체와 하나님 간의 계약이 아닙니다. 따라서 다윗 왕조 사상을 갖지 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당연히 총회를 통해 왕을 선출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따라 왕위에 오른 것이 ‘여로보암’입니다.

그런데 이미 다른 지파의 영역까지 침범하여 과도한 영토를 차지한 유다 지파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합니다. 이들은 먼저 베냐민 지파의 남은 지역을 점령하여 자신들의 왕국에 병합시킵니다. 그리고 총회의 결정에 따라 왕위에 오른 ‘여로보암’에 대항합니다.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남왕국 출신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자신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올바른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11지파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유다 지파와 다윗 혈통은 지파 동맹의 규정을 깨뜨리고 12지파 연합체에서 물의를 일으키는 존재들이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정책

간혹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점이 있습니다. 분열왕국 초기 남왕국이 북왕국에 비해 훨씬 강대한 국가였다고 생각하는 잘못입니다. 이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심어진 이미지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생각해보더라도 북왕국에는 열 지파가 속해 있었고, 남왕국은 분열 초기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베냐민을 영입하긴 했지만, 두 지파만이 속해 있었습니다. 지파의 수만 보더라도 북왕국이 훨씬 많습니다.

또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솔로몬’ 시절 이스라엘의 속국이었던 에돔, 블레셋 등의 국가는 분열 왕국 초기에 독립을 이룹니다. 그렇기에 남왕국은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인 형태가 됩니다. 반면 북왕국은 여전히 ‘왕의 대로’ 위에 있는 길르앗-라못을 차지하고 있었고, 지중해 연안을 따라 나 있는 ‘해변길’을 이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왕국의 분열 이후 남북왕국 둘 다 군사, 경제적인 측면에서 타격을 입기는 했겠지만, 그래도 남왕국보다 북왕국의 상황이 더 좋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북왕국이 ‘오므리’ 시대에 남왕국보다 먼저 영토 국가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에 나타난 ‘여로보암’의 첫 번째 정책 사업은 수도 이전 사업입니다. 「열왕기상 12장 25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먼저 세겜을 건축하여 거기서 살았고, 다음으로 부느엘을 건축하였다고 말합니다. 이후 「열왕기상 14장 17절」을 보면 북왕국의 수도가 디르사라는 언급이 슬쩍 나타납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의 재위 기간 동안 두 번이나 천도를 결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합니다. 먼저 세겜에 수도를 정한 이유는 세겜이 전통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파 연합의 총회도 세겜에서 열렸던 것을 보면 세겜이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겜을 수도로 정한 것은 ‘여로보암’의 정치적인 판단이라기보다 유다 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 왕국이 시작되면서 처음 수도로 삼기 적절하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여로보암’은 정치적 판단에 따라 브누엘로 수도를 옮깁니다.

브누엘은 「사사기 8장」에 나오는 브누엘과 같은 지역이며, 「창세기 32장」에 나타난 브니엘과도 같은 지역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했던 얍복강 주변 지역이 브누엘입니다. 브누엘 천도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갈리기 때문에 ‘여로보암’ 왜 천도를 단행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쇼생크 1세’의 팔레스타인 침공이 천도의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이집트의 군세를 피해 요단 건너편 브누엘까지 수도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설명은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열왕기상 11장 40절」에서 ‘쇼생크 1세’가 ‘여로보암’을 받아주었다는 사실과 충돌됩니다. ‘쇼생크 1세’의 군세를 피해 천도했다는 주장을 위해서는 ‘여로보암’이 ‘쇼생크 1세’에게 의탁하였다는 구절의 역사적 판단과 함께 ‘여로보암’의 이스라엘 복귀 이후 ‘쇼생크 1세’와 ‘여로보암’의 관계를 먼저 설명해야만 합니다.

‘여로보암’과 ‘쇼생크 1세’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쇼생크 1세’의 카르낙 비문이 북왕국 지역을 점령했다고 말하고 있는 지역 중에 이미 동맹 관계에 있던 지역도 나타나기 때문에 카르낙 비문에 적힌 지역이 전부 ‘쇼생크 1세’의 점령지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또 고고학적으로 북왕국에서 파괴된 성읍의 흔적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파괴의 정도가 미미했다는 사실은 ‘쇼생크 1세’가 북왕국을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침공을 단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쇼생크 1세’의 침공은 일종의 무력행사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확한 상황을 재구성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여로보암’이 ‘쇼생크 1세’를 피해서 브누엘로 천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얍복강변에 위치한 브누엘은 ‘솔로몬’ 시대에 제조산업이 일어났던 지역으로 추정됩니다(왕상 7:46-47 참고). 건축 감독관 출신이었던 ‘여로보암’이 이런 지리적 요건에 관심을 가졌을 수 있습니다. 또 남북 분열이라는 상황 속에서 암몬과 모압과 아람을 견제하기 위해 요단 건너편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후 북왕국의 수도는 다시 디르사로 옮겨지는데, 세겜, 브누엘과 비슷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디르사는 교통의 이점으로 인해 선택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세겜이나 브누엘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진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종교나 경제의 이점을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여로보암’은 북왕국의 중앙에 위치한 디르사에서 무역, 경제, 종교와 관련된 전체적인 이점을 얻기 위해 두 번째 천도를 단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로보암의 종교 전통 복구 정책

수도 이전 정책 다음으로 나타나는 정책이 종교 정책입니다. ‘여로보암’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합니다. 또 지방 산당을 만들고 레위인이 아닌 사람을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또 여덟째 달 15일을 절기로 삼아 유다와 차별화시켰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세운 사실에 대한 해석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밀러/헤이스의 표현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가능해 보입니다. “법궤-그룹과 황소상의 차이점은 주로 신학의 차이가 아니라 어떤 성상(聖像)을 사용하였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밀러/헤이스, 『고대 이스라엘 역사』, 294)

▲ 주전 12세게 황소상 ⓒ이스라엘 박물관(imj.org.il)

위의 사진은 이스라엘 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금송아지 상입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출토된 것으로 주전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금송아지가 이스라엘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였던 성상이었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저희는 출애굽기를 통해 성전에 놓인 법궤와 그룹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놓인 법궤와 그룹이 송아지 상보다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여로보암’이 펼친 종교 정책의 근본에는 왕정 시대 초기인 옛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정신이 있습니다. ‘여로보암’은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송아지를 성상으로 삼습니다. 또 그의 뒤에서 조력한 사람은 과거 제의의 중심이었던 실로 출신의 예언자 ‘아히야’였습니다.

어떤 학자는 ‘다윗’ 시절 예루살렘으로 법궤가 옮겨진 사건에 대해 ‘다윗’이 종교적 상징물을 강제적으로 자신의 지역으로 옮긴 사건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본래 법궤가 있던 장소가 실로였기 때문에 ‘여로보암’이 실로 출신의 제사장 ‘아히야’와 함께했다는 사실은 ‘다윗’ 시절에 유다 지파 중심으로 바뀌어버린 종교 전통을 다시 복귀시켰다는 의미가 됩니다.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도 전통 복구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경은 레위인만이 전통적으로 모든 제의를 담당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사기」나 「사무엘」에 종교와 관련해 나타나는 인물들은 주로 레위인이 아닌 각 지역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과거 각 지역에 존재했던 예언자 집단을 다시 제의의 중심에 오도록 정책을 펼칩니다.

전통적인 종교 제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와 함께 집단 간의 갈등 상황도 존재했을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레위인이 대부분의 종교 권력을 쥐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지방 성소들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그들에게 집중된 권력을 분해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 자신의 신상에게 제사 지내는 여로보암 ⓒ위키피디아

위의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클라스 코르넬리스존 무야르타(Claes Corneliszoon Moeyaert)’가 1641년에 그린 ‘자신의 우상에게 제사 지내는 여로보암’이라는 그림입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Iris & B. Gerald Cantor Center for Visual Arts에서 소장 중입니다. 중앙 하단에 그려진 개는 「열왕기상 14장 11절」에 나타난 ‘아히야’의 예언을 떠올리게 합니다.

벧엘과 단이라는 장소도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진 장소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꿈을 꾼 지역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창28:10-22). 가나안으로 돌아온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곳도 벧엘입니다(창35:1-15). 단의 성소에 대해 나타난 「사사기 18장」의 이야기는 해석이 필요하긴 하지만 「사사기 18장 30절」은 그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전해져온 이야기로 보입니다. 이 구절은 ‘모세’의 손자이며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이 단에서 제사장이 되어 북왕국 멸망 때까지 있었다고 말합니다.

종교 정책에 있어서 ‘여로보암’이 취한 마지막 정책은 전통적으로 지켜지던 일곱째 달 15일의 절기를 여덟째 달 15일로 바꾼 것입니다. 열왕기 역사가 집단은 이에 대해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만든 절기였다고 평가합니다. 북왕국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자기 마음대로 절기를 만들었는데, 이 역시도 유다의 절기를 모방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이 왜 절기를 바꿨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도 분분합니다. 그중에서 그나마 납득할만한 것은 ‘여로보암’이 억지로 절기를 한 달 뒤로 미룬 것이 아니라 윤년/윤달로 인해 절기가 한 달 뒤로 밀린 것이고, 북왕국 전역에서 윤달을 시행할 수 있도록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아시리아 기록에 의하면 ‘엣살핫돈’ 시절에 이런 상황이 펼쳐졌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엣살핫돈’은 평소 아달 월에 지켜지던 종교 축제를 윤달로 인해 한 달 뒤인 니산 월 직전에 지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런 일은 한 번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엣살핫돈’에게 발신된 행정 서신이 그 예입니다. 그 서신에는 왕의 명령이 담긴 서신이 늦게 도착하여 이미 엘룰 월에 축제를 지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음력을 사용했던 이스라엘이 윤달을 사용하지 않았을 이유는 없습니다. 음력을 사용했던 근동 지역 대부분은 윤년/윤달을 사용했습니다. ‘여로보암’이 절기를 한 달 늦춘 이유는 윤달로 인해서였을 수 있는데, 열왕기 역사가 집단이 자신들이 가진 자료 속에서 이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여로보암’에 대한 평가를 낮추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다고 봅니다.

‘여로보암’은 남왕국 출신의 역사가들이 보았을 때, 남북을 분열시키고 결국 북왕국 멸망의 기원이 된 인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자면 그는 이스라엘 지파 연합으로부터 정식으로 공인받아 왕이 된 인물이며 남왕국의 지파 연합 탈퇴 이후 이스라엘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입니다.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한 북왕국은 왕조 전통, 한 혈통이 계속해서 왕위에 올라야 한다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왕조가 계속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은 ‘여로보암’이 ‘다윗’과 ‘솔로몬’처럼 왕조 전통을 구축하지 못했다는 평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북왕국도 분명 세습제를 채택하기는 했습니다만, ‘여로보암’이 이런 전통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정책들은 왕정 체제는 유지하면서 과거 지파 연합이 중심이 되었던 시대로의 복구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로보암’에 대한 평가는 글의 시작에서 이야기했듯이 약간 모호한 것이 사실입니다. 남왕국 역사가들의 평가를 따라가자면,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악의 근원으로 남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열왕기」가 차마 지우지 못한 그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정통적인 방식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전통을 복구하기 위해 노력한 왕임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열왕기」를 읽어가면서 때로는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만을 선택하셨다’라는 남왕국 역사가들의 생각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북왕국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접근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여로보암’을 마지막으로 분열 왕국의 왕을 모두 다뤘기 때문에 ‘솔로몬’을 다루기에 앞서 다음 글에서는 분열 왕국 왕들의 연대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정리한 연대와 함께 몇몇 학자들이 제시한 연대를 함께 비교하고, 차이 나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이유에서 차이가 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성훈 목사(한신대 구약학 박사과정)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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