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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가 아니라 따름그리스도와 하나됨(갈라디아서 3:26-28)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 승인 2021.05.16 15:37
▲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죄이다. ⓒGetty Image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지난달에도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전해드렸었는데, 오늘도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와 연결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 자체를 사도 바울이 처음 만든 것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사도 바울 시기와 그 이후에도 초대 교회 안에서 세례와 관련되어 암송되던 말씀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12-13절을 보면 오늘 본문과 유사한 형태의 말씀이 나옵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골로새서 3장 9절 하반절부터 11절까지에는 세례가 나타나진 않지만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세 본문은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각 서신이 기록된 목적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례적으로 사용되던 문구에 서신을 보낸 목적에 맞는 이야기가 첨가되어 나타납니다.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세 본문 속에서 똑같이 발견되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유대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어떤 사람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본문 26절과 28절 하반절은 우리말로 보면 서로 달라 보이지만, 헬라어로 읽었을 때 대구가 맞춰져 있습니다.

26절 “Πάντες γὰρ υἱοὶ θεοῦ ἐστε (διὰ τῆς πίστεως)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28절 “πάντες γὰρ ὑμεῖς εἷς ἐστε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26절에 괄호 쳐진 부분, ‘믿음을 통하여(디아 테스 피스튜스)’는 갈라디아 교회에 서신을 적은 목적을 위해 사도 바울이 참가한 말로 보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믿음에 대한 사도 바울의 변론을 담고 있고, 오늘 본문의 바로 앞에서 사도 바울은 이런 변증을 전개합니다.

‘믿음을 통하여’를 빼고 본다면, “너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와 “너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입니다. 따라서 변화된 부분인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는 서로 연결되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라는 의미를 담게 됩니다.

이 본문이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행할 때 사용된 예식 문구라면, 초대교회에서 중요하게 여긴 요소가 상호 간에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8절에 나타난 대상들은 서신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항상 포함되는 대상은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입니다. 인종별, 계급별로 차별이 존재했고,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당시 사회 속에서 이는 상당히 혁명적인 사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 금지와 함께 사도 바울은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합니다. 27절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은 골로새서 3장에도 나왔습니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었다’는 표현입니다. 골로새서에 나타난 표현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말씀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세례를 통해 느꼈던 영적 체험과 감격을 회상시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일시적인 감동 체험을 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가지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저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사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동참한다는 뜻을 갖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 8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일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갑니다.

우리 기독교는 어떤 절대자,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숭배하기만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존재로부터 떨어지는 은혜만을 원하며, 그저 경배만을 드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며,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종교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세상에서 실천하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사람들을 미혹하는 마약도 아니고, 힘든 순간에 잠시 피해 있기만 하는 도피처도 아닙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관한 배우들의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히 인상적인 장면들이 배우의 애드립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저 배우는 재치 있는 사람이라는 정도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재치가 있는 것만으로 저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입니다. 애드립을 잘 한다는 배우들은 많이 있습니다. 영화 메이킹 필름 같은 것을 보면, 한 장면을 완전히 배우의 애드립에 맡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 중에서 기억에 오래 남을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을 별로 없습니다.

그보다는 제작진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떤 상황에 의해서 배우가 애드립을 했고, 그것이 그대로 영화나 드라마에 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장면들은 꽤나 인상적으로 남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드립을 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배우가 그 배역 자체에 푹 빠져서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툭 튀어나오는 한 마디가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배우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을 이해하고 그 사람 자체를 연기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전에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선배 한 분과 인터뷰를 하면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조연급들의 경우에는 대본에 그 배역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서너 줄 정도밖에 안 되는 정보만이 배우에게 제공된다고 합니다. 정보도 거의 없고 출연 장면도 주연보다는 적지만, 조연 연기를 하시는 분들은 그 배역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있기에 우리가 즐겁게 드라마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배우는 자신의 배역을 연구합니다. 그 배역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있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 배역이 할 법한 대사가 입에서 나오게 되고 그런 것이 훌륭한 애드립 장면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마찬가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처럼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겠다고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취하는 행동들은 그리스도인다운 말이고 행동입니까?

혹시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인 언어를 입에서 내뱉고 있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못한 것이고 그리스도처럼 살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는 이유는 배우들이 배역을 연구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왜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우리의 구세주라고 부르는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단지 아는데 그치지 않고 그분과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그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받기만 하겠다는, 그런 욕심과 정욕에 가득 찬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자꾸 저 멀리 높은 곳으로 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만듭니다. 전지전능하신 존재이기에 우리는 감히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높으신 존재에게 그저 경배만 하면서 살아가면 은혜의 부스러기가 떨어져서 우리는 그것으로 복을 누리며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 바로 옆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과 하나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 그 안에 거하자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길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시게 되길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의식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을 기뻐 보실 줄 믿습니다. 또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바꾸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고 평강을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와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이성훈 목사(명일한움교회)  joey8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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