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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고백“여호와는 선하시니”(시편 100:1-5)
이상중 목사(초도제일교회) | 승인 2021.06.14 22:48
▲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출애굽 ⓒGetty Image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누구나 외부의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데로 통제함으로서 평안을 얻고자 하는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으로는 결코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평안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기에, 내면에 주어진 평안을 불러일으킴으로서 누릴 수 있을 뿐입니다. 날마다 하나님께로부터 우리 내면에 선물로 주어진 이 평안을 선택하고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주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세상이 가리키는 방향과 달랐던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든 삶과 말씀’이 따라야 하고, 지켜야 하는 진리임을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 틀렸다고,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냐?’며 따르지 않도록 유혹하며,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며 안내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나눌 시편의 고백은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라며 시인하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힘이 되고, 응원이 되는 말씀입니다. 1절과 2절은 주님께 환호성을 올리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환호성을 올려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온 땅아, 주님께 환호성을 올려라. 2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환호성을 올리면서, 그 앞으로 나아가거라. 3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그가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가 기르시는 양이다.” 오늘 시편에 나오는 환호성은 승리를 얻고 난 이후의 ‘승전가’라기보다는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 속에서도 환호성을 올리라는 미래지향적인 감사의 표현입니다.

시편 89편에도 오늘 본문의 1-2절과 같이 당장의 상황을 보면 감사할 제목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감사를 표해야 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5-17절입니다.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온종일 주님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주님의 의로우심을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광스러운 힘이십니다. 주님의 사랑 덕분에 우리는 승리의 뿔을 높이 쳐들게 됩니다.”

시편 89편에서는 축제의 함성을 외치며 감사해야 할 이유가 주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님이 의로우시기에 자신들을 향한 사랑을 드러내시며, 힘을 주셔서 결국 승리하리라는 고백입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기에 우리를 책임지셔서 승리케 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기에 양인 우리를 책임지실 것이다. 그러니 환호성을 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당장은 환호성을 올릴 수 없음에도, 환호성을 올리라는 이 고백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신앙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목자 되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라.”,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앞으로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실지 기록이 되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주님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고백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갑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인정은 “앞으로는 저의 뜻과 목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데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인정할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의 찬양을 올리게 되며, 절망적으로만 보였던 상황이 희망의 상황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계속 선교하기를 원했지만 성령께서 선교를 막으셨다고 기록합니다. 대신에 바울은 성령께서 자신이 유럽에서 선교하기를 원하심을 깨닫고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유럽으로 건너간 바울의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란 게 ‘비난과 폭행, 모함과 옥에 갇히는 일들’ 뿐이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는데 사도 바울이 겪어야 햐는 일들은 승전가를 부를 만 한 일이 아니라 온통 가시밭길뿐이었습니다. 제대로 풀리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옥에 갇혀 있으면서 왜 자신들이 이 모든 일들을 겪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6:30-33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물었다. ‘두 분 사도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리하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간수와 그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그 밤 그 시각에, 간수는 그들을 데려다가, 상처를 씻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온 가족이 그 자리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 나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아, 성령이 보내셔서 이렇게 왔는데 내가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나?’, ‘감옥에 갇혀 있는 거 너무 싫은데!’라며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에 대해 불평만 하고 있었다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모든 상황 속에서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겠다는 확신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고통과 절망 속에 있는 이유는 내 뜻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4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의 노래를 부르며, 그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5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그 이름을 찬양하여라. 왜요? 주님은 성실하시며,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성실하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뜻인 선하신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전히 방황하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인자하시기에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성도님 한 분 한 분의 삶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모든 방향이 선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실하신 분이시기에 이런 자신의 계획을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 제공하시고 이루어가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저와 성도님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성실하시고, 선하신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인슈타인과 랍비>라는 책에 나오는 앨런이라는 분의 삶을 통해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앨런이라는 사람은 수년 동안 말더듬이로 고통을 당하며 하나님께 아주 오랫동안 분노한 상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하필 나란 말인가? 왜 하나님은 자식에게 이와 같이 가혹한 고통을 주는가?” 우리도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뜻하지 않은 상황들을 마주할 때 마다 고백하는 표현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다 알지 못한 채, 내 뜻을 앞세울 때 나오는 고백의 표현들입니다.

앨런은 1950년대에 미국 브루클린에서 태어납니다. 어렸을 때부터 매우 심하게 말을 더듬는 아이였습니다. 당시의 상황이 말더듬이 하는 아이들을 다루는 법을 몰랐기에 앨런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부모는 앨런을 도와주기 위해 심리치료, 최면치료, 약물치료, 정신과 등 안 데리고 다닌 데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충격요법 약까지 먹였습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앨런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분노와 상처로 가득한 아이였다고 표현합니다. 학교에서는 하루 종일 말이 없었고, 함께 놀거나 말을 할 친구도 없었다고 합니다. “당신을 이해해주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나요?”라는 질문에 앨런은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나의 애완동물들뿐이었어요.”라고 대답합니다.

앨런은 놀랍게도 동물들과는 전혀 말을 더듬지 않고 완전하고 유창한 문장으로 대화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앨런은 동물들이 자신을 이해한다고 믿었고, 그 역시 동물들에게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앨런은 이런 다짐을 합니다. “내가 목소리를 되찾아 말더듬는 법을 조절할 수 있게 되면 동물들을 위해 내 목소리를 사용하리라.”

어느 날, 동물원에 갔는데 헐벗고 더러운 콘크리트 감옥에 큰 고양이와 동물들이 갇혀 있었고 동물들이 앨런을 향해 ‘나를 풀어줘!’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갇혀있는 큰 고양이와 동물들에게 “내가 우리들이 함께 가서 살 곳을 찾아낼게. 내가 우리들이 함께 살 곳을 반드시 찾아낼게!”라고 속삭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앨런은 뉴욕 북부에 있는 어느 병원에서 집중치료를 받은 후 말을 통제하는 법을 터득하게 되면서 자신의 나이 19살에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말을 하기 시작한 앨런은 자신이 한 다짐대로 동물들을 위한 삶을 살기 시작했고 평생을 동물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의 약속도 지킵니다. 앨런은 멸종위기 동물들의 서식지 확보를 위해 지구에 남은 마지막 야생지대를 트레킹해서 온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동물학자가 됩니다.

인터뷰어가 앨런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몹시 고통스럽던 말더듬이 장애가 박사님의 소명을 깨닫게 만든 하나의 요소였던가요?”, 앨런이 대답합니다. “지금은 그것이 내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진심으로 믿어요.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선물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말더듬이처럼 혹독한 경험이 없었다면 이 일을 결코 해내지 못했을 겁니다.”

자신의 소명을 깨닫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혹독한 경험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선하심을 인정하는 성도들은 이 박사님과 같은 고백이 가능하게 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 뜻과 목적을 관찰시키겠다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찾고 행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시편 25:8-10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님은 선하시고 올바르셔서, 죄인들이 돌이키고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겸손한 사람을 공의로 인도하시며, 겸비한 사람에게는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신다. 주님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진실한 사랑으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한 수고가 필요합니다. 마태복음 13:44-48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하늘나라는 그저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 밭을 파는 수고를 해야 하고, 좋은 진주를 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며, 그물에서 좋은 고기를 선별해야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도 발견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것을 발견하는 수고가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선물을 찾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행할 수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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